(로마서 6:12-23) 다시 종이 되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1. 26. 07:00 Writer : 김홍덕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셨음을 기억하라 그를 인하여 내가 오늘날 이같이 네게 명하노라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일례로 할지니라(신 15:15-17)


위의 말씀은 안식년에 대한 말씀의 말미에 하나님이 주신 계명입니다. 요지는 무엇인가 하면, 이스라엘 안에서 7년째가 되면 그 전에 종이 되었던 사람이라도 다 자유케 된다는 것을 율법으로 주셨는데, 그 중에서 혹시 7년째가 되어서 자유할 수 있음에도 그 주인의 종으로 살겠다는 종이 있으면 그 종의 귀를 문에다 대고 뚫으면 그 종은 영원이 그 주인의 종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이 신명기의 말씀을 로마서와 연결해 보는가 하면,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는 사람이 더 이상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안식년이 돌아와서 자유케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려면 하나님과 그 사람은 이제 서로 안식하는 관계가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하여는 오해하면 안 된다고 먼저 말씀을 드렸습니다. 죄라는 것은 자신이 시인할 때 은혜가 되는 것이기에 스스로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는 것이 있을 때 은혜가 된다는 말씀이기 때문임을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한다고 죄를 더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의지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제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은혜를 입었으니 이제 죄를 짓지 않아야지!’라고 마음을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하여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으려고 해도 죄를 지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안식년을 맞아 자유케 된 사람이 다시 종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런데 바울 사도는 다시 종이 되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롬 6:17-19)


우리의 신앙생활은 정말로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평생 세상의 가치관에서, 애굽의 종살이를 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복음을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을 때에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해서 죄의 종살이 하던 세월을 청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는 나름의 선택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자유를 누리고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죄인도 아니고 또 세상의 종도 아닌 사람으로 인생을 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렇게 하지 말고 죄가 아닌 의에 종으로 드리므로 거룩하게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이란 <구분>된다는 것에서 보면 다른 삶을 살기를 권면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주인의 문에 자기 귀를 송곳으로 뚫은 종과 같이 말입니다.


앞선 글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 안에 살 때는 세상에서는 의인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죄인이 됩니다. 그리고 반대로 하나님의 의(義) 안에 살고자 하면 세상의 죄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것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것은 세상의 의와 가치관 안에서 사는 것은 세상의 법을 좇아 사는 것이니 종으로 사는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의 의를 좇아 살게 되면 하나님의 의에 종이 되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선택이 있다면 <세상의 종으로 사느냐? 아니면 하나님 의의 종으로 사느냐?>의 문제만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의의 종으로 살자고 권면하는 것은 신앙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구원 받은 삶, 하나님을 믿는 삶을 살자고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의로 자유함을 얻고서 하나님을 떠나서 다른 자유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 가능한일일까 싶기도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움과 자유함을 얻고서 하나님을 떠나서 의롭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일까?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움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주요 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인데, 하나님을 떠나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온전히 자신의 주님으로 알게 된다면 주인의 문에서 귀를 뚫고 그 주인의 영원한 종이 되는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의로움에 영원한 종이 되어 사는 것이 유일한 삶의 방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의로움의 종이 되어 살라고 지으신 것이니 이것은 우리가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나님 의의 종이 되고, 하나님 의에 순종하고, 하나님 의에 자신을 드리려면 먼저 하나님의 의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경쟁할 때 손해가 날 것 같아도 성경에 기록한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움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의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하나님의 의와 뜻이라고 생각하고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결정의 순간, 방법의 선택에 있어 성경에 있는 대로 결정하고 방법을 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움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좀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하심과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과 이 블로그에서 너무나 자주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곧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은 또 어떤 것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좇아서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가려하지 말고, 오히려 그런 가치관으로 정죄하는 사람들이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죄인이 되어도 그들을 섬기는 것에 우리 몸을 사용하므로 하나님께서 이 연약한 육신으로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고자 한 뜻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어 오히려 그 가치관에 사로잡혀 세상의 종살이 하는 사람들을 섬기며 살면, 그들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던 것이 보이게 되고, 왜 사는지 몰랐던 인생의 목적이 깨달아지며, 중풍병자와 같이 삶의 목적을 알고자 하는 머리의 생각대로 살지 못하는 육신의 삶이 목적을 아는 삶이 되고, 감각 없는 문둥병자와 같이 온 천하로 표현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느끼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와 목적인 것입니다. 즉 우리 인생의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의가 그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데 우리가 어디에 순종하고, 어떤 의에 종이 되어 살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의로움에 대하여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존재의 목적에 대한 빚을 진 것이고,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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