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1-25) 일과 은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0. 28. 18:55 Writer : 김홍덕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경에 기록된 것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믿으면 구원을 주시고, 기도하면 들으시고, 십일조를 하면 복을 주시고, 사랑하면 은혜를 베푸신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다 조건이 들어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보응(삯, 급여)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모두 사람이 무엇 무엇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하여 반응하시는 구조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고 있는 은혜로 여기지 않고 마땅히 받아야 할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빚이란 ‘사람인 내가 이렇게 했으니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셔야 한다.’고 생각하니 하나님은 자기 행동에 대하여 보응할 빚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열심히 하다가 낙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에서 배우는 대로 또 성경을 읽고 자기 생각에 ‘이러면 되는 것이다.’라는 확신 같은 착각에 빠지면 하나님은 당연히 자기 믿음과 신앙에 대하여 보응하셔야 한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기대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실망합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신이 되고, 빚진 것을 갚지 않는 악덕 채무자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이 은혜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고, 거두어 가시는 이도 여호와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필요한 것을 다른 신도 아니고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많은 신들 중에서 가장 경쟁력이 있는 신으로 사람에게 간택 받으심을 기뻐하시면서 사람이 자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사람이 구하는 것이라면 다 퍼다 주시는 간도 쓸개도 없는 바보가 아닙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기에 어떤 행동이나 소유의 드림에 반응하시고 보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하나님께 가서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은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내가 많은 신들과 세상의 가치관 중에서 당신을 택했으니 당신은 나에게 빚이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구하면 내어 놓으십시오, 대신 내가 당신이 시킨 대로 서명으로 <예수 이름으로>라고 서명은 하겠습니다.’라고 협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그 청구가 더 효과적이도록 하나님께서 뜻하신 생명이 있는 자의 법과 행동과 모양을 기록한 성경을 보고서 그 행동을 흉내 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런 모습을 <노릇>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아양을 떠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했으니 그 모든 것은 다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간혹 아픈데 작정 기도하고 주일 예배 빠지지 않고 금식도 하면 다 나을 것이라 믿다가 죽는 기막힌 일도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정말로 터무니없는 믿음에 대한 착각들이 단순한 착각을 넘어 ‘예수는 이렇게 믿는 것’이라는 법이 되고 또 주장이 되어 남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하고 그 말하는 것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신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어 세상적인 방법으로 시험을 쳐서 권위를 부여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이런 일과 동일한 일들이 바울 사도의 때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 율법을 지켜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것은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시대라도 사람이 하나님의 정체성을 어떻게 믿느냐와 무엇을 본질로 보느냐에 종속된 문제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육신으로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하고 드려서 하나님 앞에 의로움을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 행동에 대한 빚이 있는 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 신앙과 행함이 바로 일이라고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믿음을 인정받은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뭘 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떠나라고 해서 떠난 것은 아브라함이 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잘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이 어떤 행동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이 무엇을 했기에 부르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들이 자기의 어떤 일(앞에서 말한)로 인한 보응으로 여기지 않고 은혜로 여긴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님 믿는 것은 복불복이구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사람들이 망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런 투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임을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인생은 태어나서 인생으로 산다는 것, 그것이 자기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인생 그 자체가 이미 거저 주신 것이고, 이 삶의 기회가 바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은혜로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아무 것도 일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정말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은 고난이라고 합니다. 인생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인생이 자기 맘대로 되는 사람이 있다면 인생을 두고 고난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인생은 자기 힘으로 존재하게 될 수 없는 것이기에 이 인생은 이 인생 자체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인생의 존재는 하나님의 허락하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과 같은 기회입니다. 우리 인생이 임의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른 이도 아닌 만유의 주재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형상과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을 때 이미 하나님이 택하시고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담을 그릇으로, 그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 지으셔서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이것을 믿는 이에게 자기 인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예수 믿었더니 세상에서 성공하게 해 주신 것이 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삯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미 받을 것을 다 받은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 형상을 표현하고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나라는 인생을 조성하신 것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것도 한 적이 없는데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신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 인생의 존재 목적을 하나님 앞에서 발견한 사람은 이 놀라운 은혜를 압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 무엇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러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로 아버지와 아들, 뜻을 가진 이와 그 뜻을 표현하는 존재의 관계라는 것을 아는데 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려 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나의 정체성,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이 내 삶으로 표현되기만 하면 그 모든 행동과 삶이 하나님의 뜻하신 대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데 왜? 무슨 이유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서 무엇을 얻고, 공로와 소유를 드려 인생의 성공과 행복을 구하겠습니까? 이 인생과 육신의 목적이 그것이 아닌데.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에 있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 인생의 존재 자체가 은혜고 감사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삯을 구하거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빚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갚아야 할 것이 있다면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내어야 할 존재의 빚이 있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믿음, 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절대로 하나님께 무엇을 하면 하나님이 주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니 천지의 주관자이신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자기 의를 나타낼 존재를 만들면서 그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것을 빠트렸겠습니까? 이것 하나만 알아도 하나님을 다 아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몰라서, 인생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또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에 부족하다고 여기기에 뭔가를 자꾸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다 먹이시는 하나님께 자기 인생이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를 행하기에 늘 부족하다고 하는 것이 과연 믿음일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해야 의로워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은 사람이 무엇을 하면 하나님께서 반응하고 보응하시는 관계가 아닙니다. 사람은 이미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해서 의로워지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믿음은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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