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9-31) 값없는 은혜의 시작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0. 19. 11:38 Writer : 김홍덕

율법은 가만히 두고 있으면 그 의미를 알기 힘듭니다. 하지만 율법이란 하나님의 생명이 본성이 된 사람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 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의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서 그것을 지키고자 시도한 사람은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 이것은 사람이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지키는 것은 정말로 힘들구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내가 부족하여 잘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라는 사람과 ‘이걸 정말로 사람이 의지를 가지고 지킬 수 있을까?’생각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하셨으니 하나님을 무시한다면 몰라도 하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은 이것은 지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명을 보고 듣고서 그것을 행동으로 지켜내려고 노력했는데 잘 되지 않으면 의심이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는데 과연 사람의 역량으로 이것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셨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으니 사람의 능력은 누구보다 잘 아실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외에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으려면 이렇게 하라고 계명을 주셨는데 사람이 해 보니 잘 안 된다? 그러면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순간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각오를 다지는 것은 다른 어떤 간절함이 있어서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 육신의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기 육신의 삶에 어떤 불편한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는 간절함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 하나님이 자기 삶을 주관하신다는 것은 알기에 하나님께 잘못하면, 하나님이 지키라고 한 것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벌이 육신의 삶에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죽어서 지옥 간다는 대명제가 있지만 지옥에 가는 이유도 행위가 잘못되어 간다고 하니 같은 범주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생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 소유의 인생이 복을 받아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간절함 때문에 율법을 육신으로 지키기 힘들다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는 듯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는 다르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으면 사람의 역량을 잘 아실 텐데 이 율법을 행위로 지켜낼 수 있다고 여기시고 우리에게 주셨을까?’라는 생각이 들면 은혜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사람을 지혜롭게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셨고 그 사람에게 지켜야할 계명을 주셨는데 해 보니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렵다? 그러면 어딘가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컴퓨터를 조립해서 만든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터넷을 찾아서 조립법을 인쇄해서 옆에 두고 알려준 대로 각 부품을 주문하여 받아서 조립을 했는데 잘 안 된다면 사람들은 필시 ‘어디가 잘못됐지?’라고 돌아봅니다. 잘 안 되니 어떻게든 되게 하려고 자기 고집대로 계속 밀어 붙이면 필시 다 망가지고 말 것입니다. 잘 되지 않으면, 매뉴얼이 잘못되었거나 뭔가 부품이 맞지 않거나, 어떤 것이 불량이거나 한 것이니 그것을 찾으려고 해야지, 자기 가진 것대로 해 놓고 정상 작동될 때까지 계속 전원만 넣었다 뺐다가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도 하나님의 율법과 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들고서 그것을 어떻게 해야 지켜낼 것인가 자기 생각대로 방법을 찾아서 열심히 했는데 잘 되지 않으면 뭐가 잘못된 것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흔히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을 두고 사람들이 뭔가를 해 보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사람이 지킬 수 없는 계명을 주어 죄를 깨닫게 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일정 부분은 일리가 있지만 한 가지 하나님은 그런 짓궂은 신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회복한 사람은 이런 행동을 하게 되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계명을 지키라는 것은 그런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은 계명을 들고서 자기가 가진 기준으로 그것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생각해보니 사람이란 존재가 너무 부끄럽고 연약해서 그냥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으니 행동으로 지켜내기 위한 각종 규칙과 법을 정하여 지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문제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계명이 잘못되었거나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이 그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여기서 하나님을 온전한 신으로 믿는 믿음이 있으면 답은 하나가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율법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율법은 몸으로 지켜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의 생각과 기준과 의로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성경과 말씀을 보았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 죄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고백이 율법으로 인하여 죄를 깨닫게 되는 고백인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자기가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보았다는 것,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이 있는 사람의 삶의 모습인데 그것을 흉내 내어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한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정한 사람의 정체성의 자리를 벗어난 죄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율법 앞에서 자기의 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자기의 죄를 깨달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리를 벗어난 것을 알았을 때 그러면 어느 자리가, 어떤 정체성과 어떤 모습이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의롭게 여기시는 사람의 자리인지를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는 율법 앞에서 율법을 지키려고 그렇게 노력하고 수고한 사람 앞에 어떤 행위도 필요치 않다는 위로가 있는 은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자기가 세운 의에 기준에 맞는 행동으로 그렇게 노력했건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인생 앞에 사람이 수고하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기 위하여 그렇게 자기를 쥐어짜듯 수고한 것을 값으로 내어 놓았지만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만 드러난 인생에게 이제는 사람이 수고하지도 않고 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율법 앞에서 자기의 의로 그것을 지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애쓴 삶이 하나님 앞에 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값없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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