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으로 사람이 죄를 알게 한다는 것은 쉬운 표현으로 한다면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르려고 노력하다 보면 그것이 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르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면 분명히 그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의로워지는 것에 실패했으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이 율법으로 인하여 죄를 깨닫는다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는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법을 육신의 행동으로 지켜서 의에 이르는 세계에 있다는 것이 바로 죄의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행동으로 지켜서 의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은 자기로서는 안 된다는 것, 곧 그것은 자기 정체성과 자기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많은 경우, 너무 많아서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경우 행동으로 의에 기준을 만족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되지 않으면 다 자신의 부족함이라 여겨 더 매진합니다. QT도 더 열심히 하고, 기도도 더 열심히 하고, 헌금도 더 많이 하려고 하며, 자기 안에서 나오는 각종 생각들을 잊기 위하여 허벅지로 바늘을 찌르듯 자기를 늘 각성시키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깨어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또한 그런 모습이 신앙인의 모습이고 좋은 신앙이라고 여기고 서로 격려하며 설교합니다.


하지만 미운 오리 새끼 이야기를 생각해봅시다. 백조인 미운 오리새끼는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오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가 오리처럼 되지 못한 것이 노력이 부족해서일까요? 아닙니다. 근본적인 자기 정체성이 오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의롭게 여기는 기준을 스스로 세우고 그것을 지켜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생각하면서 노력하지만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그 육신의 능력으로 의롭게 되는 존재로 지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노력하는 의에 기준이 성경말씀이면 그것은 옳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미혹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아담을 미혹할 때도 하나님을 언급했지 바알을 언급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성경을 지키지 않아서 그렇게 책망 받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또한 지금 많은 교회들이 성경은 고사하고 상식적으로도 어이없는 일들을 하면서 모두들 ‘주의 일’을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영화 <밀양>에 나오는 유괴 살인범처럼 말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것은 ‘성경대로 행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되라고 주신 것인데, 성경을 가지고서 행동 지침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온전치 못하므로 의롭게 되기 위하여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을 지키면 되겠지?’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성경은 <예수님(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어떤 존재인가?)>를 설명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지, <예수 그리스도 제조법>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성경대로 살아서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이 보이신 대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도 나처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서 어떻게(How) 하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가를 생각하면서 읽고 그 방법을 찾아 지키려는 신앙은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제조법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는 너무나 하나 같이 “어떻게 할까요?”를 묻는 것입니다. 목사들도 입만 떼면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질문과 설교가 뭡니까? “성경을 어떻게 지켜내면(How to do?) 의로워지는가?” 아닙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늘 <How(어떻게)>가 아니라 <‘Who’ or ‘What’(너는 누구냐?, 나를 누구라 하느냐?)>를 물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가 관심이 있으신 분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를 어떤 존재로 보느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 곧 ‘존재의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이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의 신앙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미운 오리새끼가 오리가 될 수 없듯이.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으로 인하여 죄를 깨닫는다는 것은, 

  1. 먼저 율법을 아무리 지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2. 그렇게 율법을 아무리 지켜도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 존재가 그것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며,

  3. 자기 존재가 그것이 아닌데 그렇게 행위로 의롭게 여김을 받으려 하였다는 것이 바로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떠난 죄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렇게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이제 새로운 세계, 곧 새로운 법이 자기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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