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 어떤 피해가 갈까요? 분명히 하나님과 사람은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어떤 영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하나님에서 사람으로 향하는 방향을 가지고 있지,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향하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천지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시니 세상과 사람을 다시 만들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의미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한다고 하나님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돈 많은 부자가 필요해서 휴대폰을 사지만 휴대폰이 고장이 나거나 말썽을 피운다고 부자가 거지가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 사도가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졌음으로 선민사상에 빠져서 율법의 증거인 할례를 부각시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차별화하고, 예수님을 믿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책망하면서도 그래도 유대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민족이라는 장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장점이라는 것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자신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하려고 합니다. 아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아니라고 펄쩍 뛸지 모르지만 이는 아주 명백한 사실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의 기도가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세상에서 성공해서 안 믿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서 하나님을 믿을 것이니 자신들에게 축복을 해 달라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축복할 근거를 자신들이 마련하려 합니다. 바로 육신으로 말씀을 그대로 지키면 하나님께서 그 보답으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요약하면 자신이 하나님을 움직이는 조건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과 같은 소리도 합니다. 그 내용은 색깔은 다양하지만 결론은 하나님 앞에 어떤 행위의 공로를 드리는 것이나, 또 자신의 재화와 용역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돌이키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 때문에 그 뜻을 움직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 분명히 성경에는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돌이켜서 사람을 축복하신다는 말씀을 수도 없이 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반문할 것입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라는 신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름이 <여화와>이십니다. ‘스스로 있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시는 것은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어떤 존재로 관계를 맺게 되느냐에 달린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장 핵심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은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아 너는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여기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이 가장 궁금하신 분이십니다. “너는 나를 존재의 신으로 보느냐 아니면 행위의 공로와 소유의 드림을 의로 여기는 신으로 보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아들의 공로로 만나는 존재가 아니고, 아버지 또한 아들을 아들의 수고의 정도를 보고 아들을 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나 지금의 교인들이나 모두 자신들이 어떤 종류의 믿음의 행위를 하는 것을 두고 그것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는다고 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그랬냐?’고 할 수 있겠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는다.’,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물질적인 축복을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 그것입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움직이시지 않는다, 즉 신실하게 대하시지 않는다.’고 믿고 생각하고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이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거짓말쟁이라도 하나님께서 신실하심이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도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이것을 전했더니 사람들은 ‘그러면 우리 사람이 악해져도 괜찮다는 말이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에 좌지우지 되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면, 놀랍게도 ‘그럼 막 살아도 되냐?’고 묻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생각이 어찌 그리 똑같은지 놀랍다는 것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했으니 죄를 더 짓자.>고 하는 것과 같은데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논쟁 아닌 논쟁, 문제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생명이 되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모든 (행함으로 비치는)말씀이 생명의 본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언제나 <하나님에게서 사람을 향한> 방향이라는 것도 몰라서 그렇습니다. 이것만 알아도 사람이 그 마음에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저렇게 해 주실 것이야!’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행위가 하나님의 신실함의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언뜻 보기에는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실 것이다.’로 보이지만, 그 본질은 ‘하나님의 의가 있는 사람은 이렇게 살게 될 것이다.’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은 행위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법으로 살게 되는 생명이 되는 것에 대하여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사람으로 향하는 방향성과는 반대로, 또 자기 행위가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신실함이 온전해지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롭게 여기실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율법을 몸으로 지켜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사람이 알게 되는 것은 “아 이것은 행위로 지키라는 것이 아니구나!”, “아 이것은 행위로 지킬 수 없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자신이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한 가치관을 가진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리, 정체성을 벗어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이 자기 정체성을 벗어난 자리에 있는 것, 자기 존재 목적의 자리를 벗어난 것이 죄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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