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이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사람의 무능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율법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또 다른 하나님의 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 또 다른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하여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서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증거라는 것은 어떤 약속이나 보이지 않는 의가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믿음장으로 유명한 히브리스 11장을 보면 증거와 약속이라는 것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많은 선진들이 증거를 받았지만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과 지금 이 로마서의 말씀은 아주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은 받지 못하였으니(히 11:39)


영화나 사극에서 보면 패물이나 칼 같은 것의 반쪽을 가지고 나머지 반쪽을 가진 사람을 찾는 장면이 간혹 나옵니다. 그런 장면이 시사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각각의 반쪽을 가진 사람 사이에는 어떤 약속이 있었는데 서로가 그 약속을 하였고 지킬 것이라는 증거로서 반쪽이 된 증거물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약속이 본질이고 가지고 있는 증표는 그 약속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이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되면, 율법을 행함으로 지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한 모든 것이 무산되었으니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인정받을 법이 없어진 상황에서 주시는 새로운 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법이 율법과 선지자들에게서 나타났기에 율법과 선지자들은 바로 그 새로운 법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 의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나타나는 모든 행위 규범과 사람이 지켜내는 행동 양식은 본질이 나타나는 증거와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 의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나타나는 모든 행위 규범과 사람이 지켜내는 행동 양식은 본질이 나타나는 증거와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전투기에 조종사가 탑승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행위 규범의 본질, 그 모든 행위 규범으로 나타나는 본질적인 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약속이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모든 것은 그 약속을 증거하는 부러진 칼과 같은 증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율법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예수님이 표현된 것이고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그 자체로서, 그것을 문자 그대로 몸으로 이행해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라는 것은 예수님이 본체이고, 그 본체(질)가 드러나는 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을 지켜 의에 이르려고 하면 죄가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법과 방향성과 반대인 방법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이라고 자신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대로 ‘이것이 옳다.’라는 자기 의를 가졌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 맘대로 주장했으니 당연히 죄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자기 죄가 드러났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 됩니다. 율법 곧 본질이 아니라 본질이 나타난 증거를 몸으로 지켜 행하여 의에 이른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바른 것을 알았기에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거나 적어도 이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옳은 것을 알게 된 사람은 그것이 새 법이고 본질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고, 그것이 아니면 최소한 옳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알고자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육신으로 어떤 법을 지켜낸다고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법을 지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법이 자기 안에 있어서 표현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증거란 약속,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약속이 본질인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새로운 법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차별>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은 그 모양도 능력도 혈통도 지식도 재산도 다 달라서 육신으로 어떤 기준을 삼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근원적으로 차별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차별이 없다는 것은 외모나 육신의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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