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1-25) 아브라함과 믿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0. 25. 16:47 Writer : 김홍덕

이스라엘 사람들뿐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 믿음의 조상을 아브라함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단군의 후손인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육신의 혈통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모태신앙에 대한 막연한 가산점이나, 목사라는 육신의 신분을 세습하는 것과 같이 혈통과 육신에 관한 것을 믿음의 기준이나 증거로 삼는 것을 보면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의 이런 마음이 바울 사도에게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에 있어서 할례를 받고 하나님 앞에서 선택받은 혈통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바울 사도에게도 말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하면서 행동은 혈통에 매인 모습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할례를 받기 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고향 땅을 떠난 때는 75세였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100세에 낳았습니다. 이삭을 얻기 전에 할례를 받았을 테니 24,5년이나 지나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은 것은 할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 아브라함이 바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은 믿음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 아니라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여기는 사람 역시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면서 정작 믿음이라는 것은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할례를 받아야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다니면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십일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신성과 신으로서의 정체성을 내가 그대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아니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서 구하기를, ‘육신의 일을 주께 맡깁니다.’, ‘제가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 되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시고,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는 그야말로 회칠한 무덤과 같습니다. 내용이 일면 거룩해 보이나 기도가 이루어져서 은혜를 입는 것이 모두 이 육신과 세상의 일, 그것도 소유와 공로(공적)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런 것으로 영광을 삼고 또 그것을 의롭게 여기시는 신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를 주관하시고, 사람이 어떤 것을 드리고 어떤 공로를 쌓으면 의롭게 여기시는 신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소유와 공로에 관한 신은 다름이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입니다. 풍요와 다산이라는 것이 그 신들의 주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십니다. <무엇을 하느냐?, 드리느냐?>가 하나님의 주제가 아니라 <너는 누구냐?>, 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가 주제고 기준이신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께 가서 믿고 구하는 것이 육신의 것이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믿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면 혈통이나 어떤 공로와 같이 내용이 아닌 형식을 본질로 알고 그것이 잘되어야 하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이 무엇을 했기 때문이 전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아들 이삭을 드린 것은 아들 이삭을 드렸기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믿음이 먼저 있고, 그 믿음이 행함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은 행함의 시점과 행함으로 인함이 아니라 그 행함이 나오게 하는 본성을 보시고 의롭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어쩌면 너무 뻔하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브라함과 할례의 관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사람이 어떤 행동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얻어야 하는 것이라면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를 떠나기 전에 할례를 스스로 행하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면 할례를 받아야 온전한 믿음이라 하는 것이 합당하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일이 오늘 우리와 어떤 상관이 있습니까? 바울 사도 시대에 할례라는 것이 쟁점이었다면 지금은 십일조 하는 것, 주일 대예배에 빠지지 않는 것, 교회에서 어느 한 부서에서라도 봉사하는 것과 같은 것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와, 대예배와, 봉사와 기도와 같은 것을 해서 복을 받고 의롭게 여김 받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심령이 있는 사람이 십일조도 드리게 하고, 예배를 기뻐하며, 봉사도 하고, 감사하고, 말씀을 더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명이 본성이 되어 하는 것은 금할 것도 없고 온전한 것입니다.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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