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9-31) 그러면 믿음은 무엇인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0. 22. 15:05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은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고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런 원초적인 질문을 해 보는 것은 믿음의 행위와 믿음은 아주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것 말입니다. 


기도가 율법이나 행위니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도를 해서 의로워지느냐? 아니면 의로운 사람이 기도를 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서 의로워진다면 그 또한 바울 사도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는 행위에 속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어 그것이 금하려 해도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 중의 하나가 기도라면 이것은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대하여는 먼저 다음의 글을 참조하면 좋을 것입니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 (골로새서) 1:2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믿음을 이야기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믿음만 있으면 된다.’, ‘믿음이 있어야 한다.’와 같이 말합니다. ‘믿으니 되더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믿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답하는 내용이라는 것이 믿음의 사전적 정의나, 아니면 좀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일과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객관적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특히나 믿음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신념>입니다. 이것은 매우 혼돈되어 사람들을 미혹케도 하는데, 이 혼돈이 믿음을 믿음의 행위로 둔갑시키기 때문에 아주 분명하게 할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의심이 되고 불가능한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된다며 의지를 가지고 믿으려 애쓰는 신념과 의지를 믿음으로 크게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들이 꼭 필요한 집에 아이가 잉태되었습니다. 그 가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 아이는 분명히 아들일 것이라고 믿고 성별 검사 같은 것조차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출산하고 보니 딸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정말로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셨다고 믿었다면 그 가족들은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 성별이 바뀔 것이라고 믿어야 할 것이지만 딸아이를 보는 순간 그 아이를 아들로 주실 것이라고 믿던 믿음은 실망과 함께 버려 버립니다. 이런 것이 바로 믿음이 아니라 신념인 것입니다.


이 믿음과 신념을 구분하는 기준은 다음 아닌 능동과 수동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아주 수동적인 것인 반면에 신념은 아주 능동적인 것입니다. “(골로새서) 1:2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라는 위의 링크된 글에서 믿음이라는 것이 충성과 방향성만 다르나 그 본질적인 것은 같은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이 수동적인 것이라는 것은 생소한 개념일지 모르겠습니다. 어려워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완전히 수동적인 개념입니다. 믿음이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기본적인 관계에 기인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언제나 <하나님에게서 사람으로>라는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표현되시고자 하시는 의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또한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씀하시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행함이라는 것,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자기 믿음을 보이려는 모습은 능동 그 자체입니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겠다는 의지와 노력입니다. 그 행동 강령이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그 믿음의 행위가 능동적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사용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엄연히 주인이 있고, 주인의 의도가 분명한 세계를 자기가 다르게 해석하고 사용하고 또 믿고 관철시키려 하는 것은 명백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말씀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제사와 같이 보이고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괜히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 능동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 드리는 내용, 하나님의 의가 삶으로 나타나는 것을 드리는 것이 제사라는 것을 안다면 그 또한 수동적인 믿음의 세계요 순종의 세계입니다. 사무엘이 사울 왕을 책망한 것은 사울 왕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을 드리려 한 것이 아니라, 제사라는 의식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날 사람들이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자기 삶을 보살필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것을 분명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다른 성경에서는 이런 말씀들을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온전한 믿음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의가 나에게 수용되는 세계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성경을 지켜서, 하나님이 원하실 것이라는 착각 안에 있는 확신으로 성경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님이 확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신앙 안에서 노력하는 행위가 성경에 기록된 것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자신이 믿음 안에 있다고 믿고 그것이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안타깝지만 그런 것은 전혀 믿음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믿음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참으로 수동적인 것이고 순종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무혈 입성할 수 있도록 사람이 가만히 그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바로 그 믿음의 표상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이신 것이 다름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이 예수님의 순종은 하나님께만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도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예수님을 못 박는 것에도 순종하셨습니다. 그것을 이길 충분한 능력이 있음에도 그것에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겠다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일까 싶은데 그것에 마저 순종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 뜻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 육신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육신으로 십자가를 물리치는 능력을 나타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지켜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을 보이려는 지금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라는 나무틀을 믿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마음과 운명이 바로 자신의 운명이고 인생의 정체성이며 자기의 삶이고 삼의 목적이고 의미라는 것을 순종하고 수용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러니 믿음은 100% 온전히 수동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성경을 능동적으로 지키는 모습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이 순종과 이 믿음이 있으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삶의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이 바로 야고보서에서 말씀하시는 행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하게 될 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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