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롬 4:16)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므로 할례를 받은 이들이나 또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나 모두의 조상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기도 하고, 또 할례를 행하고 그 아들 이삭을 얻은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롬 4:11-12)


이런 성경 구절은 어렵습니다. 제가 애용하는 개역한글판은 그 문맥으로도 어렵지만 무엇보다 이 글을 읽고 있으면 도무지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의 관계가 무엇이고 어떻게 구분하느냐가 궁금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율법과 믿음에 대한 말씀을 하면서 아브라함에 대하여 이야기 해 나가는 것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는 것으로나 아니면 또 다른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롭게 여기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고자 함입니다. 그 결정적인 것으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았을까? 이미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는데 할례를 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는 아들 이삭을 얻기 전에 할례를 행하게 하시고 할례를 행한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아들 이삭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큰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그 믿음을 인친 것, 쉬운 말로 하면 그 믿음이 표현되고 발현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블로그에서 지속적으로 말씀드리는 바와 같이 모든 율법은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사람이 살아가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삶의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이란 그 생명만의 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사람은 그 생명의 법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법이 바로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할례를 받아 하나님께 의로워지려 함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이미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라는 명을 좇아 간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할례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있으면 할례를 받는다는 것이나, 믿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의무와 같이 할례를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하나님을 믿으면 무엇을 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할례는 전적으로 그 믿음이 표현된 것입니다. 할례로 인하여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진정으로 안다면 어떤 것을 하나님께서 벌주시니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또 기독교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것에는 이 믿음과 율법을 알지 못하고 또 무엇보다 알지 못하면서 교회의 운영과 교역자들의 생계를 위하여 행함이 있어야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의를 표현하시기 위하여 만들어졌기에 그 본성 안에 어떤 행동을 해서 속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자꾸 교회에 가면 이것저것 해야 된다고 가르치니 사람 안에 있는 양심이 그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에 남아 있는 사람, 부흥하는 교회, 큰 교회는 왜 잘 되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런 교회와 그런 교회에 모인 사람들의 안목은 하나 같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라는 타락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잘 보여야 하고 그러려면 성경을 몸으로 지켜내야 한다고 가르치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에 있는 세상적인 욕망,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은 욕망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보고 양심에 화인을 맞았다고 합니다. 사람 안에 있는 양심은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라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헌금을 하면 부자가 된다는 식의 논리가 안 믿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으니 복채를 내듯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아니 어떤 시대를 살더라도 아브라함이 자기 믿음의 조상이 되고,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의롭다하신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려면 먼저 그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가치관을 바꾸는 것은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미운오리새끼가 날아가는 백조를 보고 자신이 백조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자신이 백조가 되기 위하여 뭔가를 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날아가는 백조가 바로 자신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아브라함과 또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서 행함으로 하나님께 의롭게 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가치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에 있던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데 어떤 행함이 필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단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안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를 인식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빛이 비췬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빛이 있으라 하신 것이 이것이고, 요한복음에서 빛이 세상에 왔다고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빛이 있다는 것은 이제 모든 것을 바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것이 있다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비추시는 빛,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가 바로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면 됩니다.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육신 주신 것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나를 선택하시고 보내시고 은혜를 베푸신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있으면 자기가 깨달은 인생의 존재 정체성대로 살게 됩니다. 그것이 행함입니다. 그리고 그 행함은 생명의 본능적 행동이기에 본능에 속한 그 생명 만의 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사람이 단지 살아갈 뿐인데 나타나는 모습,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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