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5:1-11) 그리스도와 화평하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1. 4. 22:19 Writer : 김홍덕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그 어떤 행위로도 불가능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도덕적인 삶도 그렇거니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가 되었던 성경을 보는 것이든 교회를 위하여 죽을힘을 다하는 것이든 다 소용 없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지 공로와 소유를 드림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이므로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생각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적인 행위를 열심히 한다고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성경에서 알게 된 모든 신앙적 행위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보이는 생명의 특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생명이 있으면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이지, 성경을 몸으로 지켜낸다고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군인이 군복을 입는 것이지 군복을 입는다고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모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그 뜻이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어 삶으로 표현되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자,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며, 그 약속이 자신의 것으로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바울 사도는 이 믿음을 그리스도와 화평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화평이라는 것은 다툼이 없고 평화를 유지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화평하지 못한 상태, 곧 서로 다툼이 있고 적대시하는 상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람이 서로 화평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 밖에 없습니다. <의(義)>가 달라서 그렇습니다. 의가 다르다는 것은 선하다고 여기는 것과 악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소란하고, 우리 각 개인이 살아가는 매일의 일상에서 겪는 모든 갈등을 생각하면 그 종류가 수도 없다고 여기겠지만, 사실 그 모든 다툼의 원인은 하나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의 다툼은 오직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서로 선하게 여기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선하게 여기는 것이 같은 사람을 일컬어 ‘마음이 맞다.’ 하고, 서로 모임과 공동체를 만듭니다.


하지만 서로 선하게 여기는 것, 옳다고 여기는 것이 다르면 만남 자체가 바로 다툼이 됩니다. 개인과 개인이 그렇고 나라와 나라가 그렇습니다. 심지어 사람과 물건이 만나도 그렇습니다. 물건의 정체성과 사람이 바라는 것이 다르면 갈등이 일어나고 사람이 화나게 됩니다. 그런 상태가 바로 화평하지 못한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면 바울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화평하자고 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과 의가 같은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의가 같으면 무엇이 선한지 무엇이 악한 것인지에 대한 생각과 안목과 가치가 같아지는 것이니 그러면 당연히 화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예수님과 본성과 생명이 같은 존재가 되자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본성, 그리고 의가 같아진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본성이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과 뜻을 예수님과 같이 육신으로 표현해내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과 화평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예수님과 다툰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달리 화평할 이유도 없을 것 같은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화평하지 못한 것은 의가 달라서라는 것을 안다면 예수님과 화평하자고 하는 말은 결국 이전에는 예수님과 정체성과 의가 달랐던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예수님과 같은 생명의 본성을 가진 존재가 되자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은 이제는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목적과 뜻(말씀)이 육신 곧 자신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인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을 믿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면 율법의 모든 것을 다 지켜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의 예로 말씀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할례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 계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믿음이 할례를 받는 것으로, 할례로 표현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난 다음에 할례를 받았다는 시기적인 결정적 증거와 함께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예수님과 생명의 본성이 같고 존재의 정체성이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모든 율법을 온전케 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며 예수님과 화평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같은 의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의를 가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실체가 그러했고,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는 것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달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의에 관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는 사람에 대한 의입니다. 성경을 사람에게 주신 것이니 당연히 사람을 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이 사람의 삶으로 나타나신 이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완성시키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율법도 다 하나님의 의에 관한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과 같이 삶이 되었을 때 나타난 삶의 모양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숨만 쉬어도 율법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과 의가 같아지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화평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화평케 되는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과 같은 의, 같은 생명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시고 다 이루었듯 우리도 살아갈 뿐인데 이상하게 율법이 다 지켜지게 되고, 성경의 모든 말씀이 다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 하지 말고, 예수님과 화평케 되어 사나 죽으나 율법과 하나님의 모든 의를 지키고 이루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바울 사도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그렇게 되라고 오늘 우리가 이 로마서를 묵상해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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