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5:1-11) 그리스도인의 소망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1. 6. 06:03 Writer : 김홍덕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2-6)


바울 사도는 이제 로마서 5장에 들어서면서 방향을 제시하기 시작합니다.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율법으로 무장한 이들이 와서 미혹케 하는 것에 대하여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겠다(롬 1:11)고 한 그 신령한 것을 이야기 해 가고 있습니다. 그 시작이 믿음이라는 것도 함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지신 사람을 만든 목적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이 인생에게 은혜가 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의가 같아지는 화평을 이루고 이제 그 화평함이 어떤 삶을 살게 하는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신령한 은사인지를 말씀해 가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은사의 본질을 설명해 감에 있어 먼저 소망을 이야기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은 늘 자기의 모든 소망은 예수님께 또는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많은 하나님께 자신의 소망이 있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실 분은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 속에 나오는 소망, 아니 성경이 말씀하시는 소망은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하여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육신에게는 소망이 없으니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만 그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육신에게 소망이 없다는 것은 자기가 바라는 것이 인생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건강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으니 하나님께 의지해야 하고, 시험이나 취업이나 사업과 같은 세상의 일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시니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고 믿는 것을 두고 인생에 소망이 없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의지해서 얻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인생의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속이려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가진 인생에 대한 소망,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얄팍한 속셈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경말씀을 몸으로 지키는 것으로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복권을 사면서 복권 수익이 가난한 사람을 돕기 때문에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듯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소망을 오해하는 근본 이유는 바울 사도가 경계하고 있는, 아니 성경을 오해하고 있는 이유와 같습니다. 즉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하는 사람들의 안목이 그렇게 소망을 오해하게 하고 성경을 오해하게 합니다. 그 안목은 늘 인생의 본질을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본질이 무엇인지에 따라, 무엇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사람은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인생의 일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생의 본질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살아가는 동안 육신에게 일어나는 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늠하려 합니다.


예를 들어 뭔가 자신이 살아가는 일에 불행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뭔가 잘못한 것은 없는가 생각하고 돌아봅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 그와 동일한 안목을 가진 목사에게 물어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할까요?”라고 무당에게 물어보듯 묻습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행위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의 근본 곧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행위는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늘 하나님께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드릴까를 생각합니다. 그런 가치관이 바로 바울 사도가 경계하고 있는 이들, 예수를 믿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이들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외식하는 자요 회칠한 무덤과 같이 그 행위는 율법을 지키는 것 같지만 율법이란 사람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서 표현된 행동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생의 소망 역시 자기 육신의 일에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인지라, 자기가 본질로 생각하는 것이 형통하려면 어떤 도움이 있어야 하는데 그 형통함을 돕는 소망, 희망이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자기 육신의 일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하면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아니시면 이런 일을 도울 수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런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소망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겪는 갈등, 마음에는 원하는데 육신과 세상의 일이 자기 주관 아래 있지 않기에 세상과 또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행위가 자기 소망과 희망에 저항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그것을 참고 견디려 합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참고, 자신과 달리 생각하는 세상과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 믿는 사람의 모습을 보이기 위하여 참습니다. 마음에는 분이 있지만 겉으로는 참으면서 그것을 환난이라 하고 그것을 억지로 참는 것(자기 육신의 소망을 이루려는 목적을 위해)을 인내라 여깁니다. 그래서 그런 연단을 거치면 자기가 바라는 육신의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소망이라며, 하나님이 자신의 삶의 소망이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소망은 많은 경우, 아니 대부분의 경우 실패합니다. 자기 소망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 입시에 대한 소망을 가졌다고 합시다. 모집 인원보다 지원하는 기독교인의 수가 많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는 공기업 입사 시험에 응시하는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이 항상 모집 인원보다 작을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의 편에 서야 합니까? 헌금 더 많이 한 사람? 아니면 그런 어려운 입시 준비 중에도 예배에 빠지지 않고 교회에 봉사한 사람? 과연 그런가요? 우리는 이미 경험적으로 그런 시험을 앞두고 교회에 와서 충성하는 것 보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의 결과가 더 좋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 둔 소망을 가진 사람이 부끄럽게 된 것입니다.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이 소망은 하나님의 우리 마음에 그 사랑을 부은바 된 것이기에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소망을 품은 것으로 인하여 실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시험이나 취업과 같은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여 소망을 품었다가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는 일과 같은 것은 이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고 소망하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아주 큰 확률로 그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그러면 어떤 이들은 자기 믿음이 작기 때문이라고 자책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또 같은 소망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그런 소망이 100%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부끄럽게 되지 않는 소망과는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또 바울 사도가 로마서 5장에서 말씀하시는 소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존재의 본질에 대한 소망입니다. 인생으로 우리가 살게 된 이유와 목적, 알지 못했던 그 존재의 목적과 이유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인생들은 모두 사는 동안 자기 삶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에서 모든 이의 소망이 자기가 누구인지 왜 사는 것인지를 아는 것에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소망이라는 것은 이 육신의 일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인생이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우리의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이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존재의 정체성을 설명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 그것이 모든 인생의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컨대 경부선 위에 놓인 부산발 서울행 열차가 서울에 도착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가진 소망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놀라운 운명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바라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생은 예수님과 같은 목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모든 인생은 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자기 삶의 목적과 이유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모든 인생의 소망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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