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1-25) 약속과 믿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1. 2. 21:29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요지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심령 안에 있으면 그것이 행동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고보 사도의 의견과도 같은 것입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은 행동을 유발 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생명의 본성이 그 안에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한 사람은 귀납적으로, 한 사람은 연역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란 그렇습니다. 육신으로 표현하는 것들은 결국 다 생각과 마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속일 수 없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행함은 행함이 주체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행함은 심령의 표현이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그 뜻은 사람에겐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이 심령 안에서 생명이 되어 행함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면 행동으로 약속을 지켜내려 합니다. 뭐랄까 사극에서 약속의 증표로 부러진 단도 같은 것이 있다면 약속의 당사자가 아니면서 그 증거만을 훔쳐서 약속의 혜택을 누리려는 도적과 같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결국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신 약속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그 하나님의 뜻이 인생인 자기 자신의 것이고, 운명이며,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것, 사람을 향하여 두신 의,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사람에게 약속이고, 그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두신 그 뜻이 자기 삶의 목적이고 의미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것을 믿는 사람의 믿음이 그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목적하신 사람 안에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목적 안에서 정말로 살아 있고 생명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마치 시간을 알기 위해 시계를 산 사람에게 시계가 시간을 잘 알려주어 주인의 목적을 달성하면 살아 있는 시계인 것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사람이 자기 운명과 정체성이라는 것을 믿어 자기 심령 안에서 생명이 되면 그 생명이 가진 본성으로 인하여 어떤 행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행함의 모양들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지을 때도 오홀리압과 브살렐[각주:1]과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가지신 성전에 대한 뜻이 자기 안에 있으므로 그들이 만든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식양에 충족되었고 하나님께서 만족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법과 같이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그 약속을 믿었더니 그 약속을 믿는 믿음이 아브라함 안에서 생명이 되어 육신으로 나타난바 된 것이 할례고 믿음의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라, 또는 어떤 것을 하라고 할 때 그 사람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 것을 행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한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할례로 표현되기에 충분한 생명이고 사람이었기에 할례를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신실함, 곧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거짓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정체성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 거짓이고 속이는 것이고 정체성과 본질과 다른 형식을 취하는 것이 간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아브라함 안에 있는 믿음의 본질적인 모습을 가지신 이가 있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나셨다는 것은 육신의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아브라함 안에 있었던 그 믿음, 그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육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한 것은 아브라함 안에 있는 약속의 본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약속이 무엇이든 그 약속을 믿는 믿음을 가지려면 약속이 먼저 있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집보다 설계도가 설계도 보다 집을 짓는 주인의 의가 먼저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그 믿음의 본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니 예수님께서 아브라함 보다 먼저 계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듯 아브라함이 믿은 믿음의 본체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본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생각하던 사람이 ‘이것이 아니구나!’ 깨닫는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정한 의에서 벗어난 사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에서 벗어난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달은 사람에게 이전과 전혀 다른 새 법을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사람의 육신으로 표현된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약속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아니 그 약속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신의 정체성이고 사람인 자신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을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하늘을 나는 백조를 본 미운 오리새끼와 같이.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뜻이자, 사람을 지으신 이유이자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주신 약속이고 그것을 사람이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고, 그것이 율법으로 죄를 알게 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새 법입니다. 


  1. 출애굽기 31장에 나오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성막의 모든 기물을 만든 두 사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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