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믿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그리고 하나님은 실수를 하지 않으신 완전하시고 온전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고 있다면 신앙은 그 자체로 온전한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하나님을 창조주로만 제대로 믿어도 온전하다는 것은 많은 신앙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라는 설명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장조주로 믿는다는 것은 신앙의 근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자신과 세상의 창조주로 믿는다면 신앙은 참 단순하고 쉬우며 또 온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려워서 공부를 해야 한다거나, 살아가면서 이것과 저것 중에 어떤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지 고민하는 것과 같은 갈등이란 원천적으로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말을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기도 하지만 자신들이 하나님을 분명히 창조주로 신앙하고 있지만 신앙은 늘 어렵고 선택의 문제가 숨 쉬듯 있으며 심지어 새벽 기도회부터 교회가 또 성경이 시키는 것을 열심히 하면서 살지만 늘 자신의 신앙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고,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실수 없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 그것 하나만 온전히 믿고 있다면 세상은 정말로 평안 그 자체입니다. 아니, 온전하신 창조주께서 실수 없이 다스리시는 세상에 그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고 있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삶에 문제가 있다면 분명히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온전치 않거나 아니면 자신이 하나님을 잘못 믿고 있거나. 이정도 생각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정말로 맹신이고 신념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말씀과 이어지는 로마서 3장에서 하나님께서 의로운 믿음으로 보시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의 행위나 혈통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의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행위나 혈통과는 무관하게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율법과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고 말씀하기 위하여 지금 그 서론을 이야기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 이 신앙을 이론적으로 설명함에 있어 절대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것이 신학적인 고증과 연구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가 그렇게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사람들이 로마서를 통해서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너무나 아쉽게도 행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달력의 시대로 신약시대 그 이후를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들의 신앙도 신약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약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이 로마서를 기준으로 본다면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이 시대가 아니라 서기 3,000년 이후에 산다고 해도 그 사람의 신앙 안목이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여긴다면 그는 구약시대의 사람이고 율법 시대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율법이라는 것도 모세 오경이나 십계명이나 또 옛날 유대인인들 혹은 이스라엘의 보수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신앙 규범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읽고서 ‘이렇게 행동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또 심지어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복음서도, 바울의 서신서도 다 율법입니다. 성경을 읽고서 행동강령으로 여기는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짓으로 바꾸는 사람의 정욕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렇게 자신의 행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려고 하는 것일까요? 이것을 생각하기 위해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든 장면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귀가 아담을 유혹할 때에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이유가 사람이 그것을 먹으면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속인 것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분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리고서(마귀의 말을 듣고서) 아담이 선악과를 보니 ‘보기에도 좋고 먹기에도 좋아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먹었습니다. 사람 마음 안에 있는 정욕, 곧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 선악과를 먹게 했습니다. 선악과는 이 블로그의 창세기에서 또 따로 자주 언급한 내용인데 단순히 먹지 말라고 한 과일 하나를 먹은 불순종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거짓말 하시는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의의 기준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어떤 것은 선으로 또 어떤 것은 악이라고 판단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하나님의 피조물로 살면서 세상의 일과 자신의 존재 정체성에 관하여 어떤 것은 선한 것이라 하고 또 어떤 것은 악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이고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 인생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다고 여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기준으로 보니 문제가 있고 잘못되었다고,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또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처음에 이야기 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실수도 않으시고 온전하시며 그 온전하심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경영하신다는 것을 믿는데 세상과 인생의 어느 부분이 하나님의 경영하심을 벗어나서 문제가 있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거나,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있다는 것입니까? 시편 기자가 동쪽 끝에도 서쪽 끝에도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셨는데 도무지 어디에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공백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경영하심이 온전하다는 것 그것 하나만 믿으면 신앙은 정말로 온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귀에게 속아서 하나님을 거짓말 하시는 분으로 만든 아담과 같이 그 마음에 선악과 곧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감히 피조문인 주제에 ‘이것이 옳다.’며 주장하고 그렇게 동의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당신의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지으신 사람을 자기 맘대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을 거짓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바로 사람 마음의 정욕입니다.


사람은 절대로 부족하지 않습니다. 세상도 절대로 문제없습니다. 사람을 부족하게, 또 세상을 문제투성이로 보는 것은 모두 그 사람의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다고 하시는 것은 그렇게 사람들이 하나님과 세상과 자신을 보는 그 안목,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여 자기 기준으로 사람과 세상의 일을 ‘선하다’. ‘악하다’ 판단하고 규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넘쳐나는 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람들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그 주장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서로 위해하며 전쟁하고 다투고 죽이고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이 의로우니 그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안 되면 폭력을 쓰고 사람을 괴롭히기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자기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이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외모가 어떻고 혈통이 어떠하면 지식수준이 어떠하며 또 얼마나 교양이 있는지를 가지고 선하고 악한 것을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람에 대한 판단입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그것을 이야기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며, 하나님의 정체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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