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신앙인들이 적어도 한번쯤은 가져봄직한 의문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대한민국) 조선시대 때 사람들은 아무도 하나님을 전해주지 않았는데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다시 말해서 살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듣거나 알지 못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되는데 그것이 합당한가 하는 의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문에 먼저 반문이 있습니다. “그게 당신의 문제인가?”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에 대하여 안다는 것이니 일단 그런 의문을 가진 사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자신의 신앙에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남의 상태를 보살필 여유도 없는 문제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에 확신이 있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본성처럼 자기 안에서 자기 삶을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의 상태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도 모르게 남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조선시대 사람과 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 답을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 1:18-20)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불의>



앞에서 우리는 <의>에 대하여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 그리고 의인이라는 것에 있어 의로움은 일반 사회가 말하는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그 안에 있느냐 없느냐, 하나님께서 의도한 삶을 사느냐 아니냐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불의하다고 여기시는 것은 횡영을 했거나 사회정의를 역 역행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불의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의도하시고 목적하신 것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데 이 하나님의 의(의도하심)는 창세로부터 항상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몰랐다고 변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공평하거나 공의롭지 못한 것과 같이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공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거나 들린다면 그것은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달라서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의문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 같으나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데 어째서 하나님의 행사가 의문스럽겠습니까? 사람이 하는 행동이 때로 이상해도 잘 아는 친구들은 그것을 이해하기 마련입니다. 안다는 것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하나님의 의가 창세로부터 세상에 표현되었는가?”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그렇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드는 공산품도 그 제조사의 제조철학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예로 들면 애플사의 제품에는 애플사의 철학이 들어 있고, 삼성의 제품에는 삼성의 철학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품성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원래부터 하나님을 아는 존재



사람이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것에 대하여 대단히 강조합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8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의가 형식을 가진 존재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온 세상은 다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 표현을 봐야 하기 때문에 표현하는 것입니다. 관객 없는 공연이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온 세상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을 표현하신 것은 그 하나님을 인지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인정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을 인정하고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낼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을 나타내어 역시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앞에서 말한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살아내는 것이 자기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연극이나 영화를 보면 그 제작자의 의도가 자기의 것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세상을 제대로 관찰하고 온전히 살고 있다면, 모든 것은 존재하고 있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존재하고 있기에 행동이 있고 소유가 있으며 관계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는 존재의 의미이고 그 의미가 있어야 어떤 행위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것 역시 하나님과 자신이 어떤 의미 있는 관계가 되면 그 의미에 맞는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법, 이런 습성은 이미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결혼을 할 때 배우자가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이성이기에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남자니까 여자하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또 세상에 아이들이 많아도 자기에게 의미가 있는 아이가 자신의 아이이고 그 아이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입니다. 가끔 자기가 낳았어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학대를 하고, 반대로 양자를 들여도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아이면 그것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과 자신이 어떤 관계인지를 분명하게 하려 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뭔가를 하려 합니다. 공로를 쌓아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합니다. 또 자기 소유를 드려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공로와 소유로 의로움을 삼으시는 분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내나 남편, 부모와 자식에게 수고하고 가진 것을 주는 것이 상대가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실천하면서 살고 있고, 또 건축물이 본질이 아니라 건축물을 짓고자 한 주인의 의도가 본질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공사한 사람이 아니라 지으려고 한 사람이 건물의 주인이 되어 세상을 살고 있으면서 하나님과 지신의 관계는 그렇게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몰랐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단자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대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몰랐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법이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 열리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법아래 있고 심지어 자신도 하나님의 법이 다스리는 세계 안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을 몰랐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와 같은 의문이 있다는 것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와 법이 없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질문을 한다는 것, 그것이 의문스럽다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아직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의문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자기 안에 있게 되는 것은 이 모든 세상이 처음부터 항상 하나님이 표현되고 있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도 아는 상태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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