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24-32) 마음의 정욕과 간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9. 9. 19:32 Writer : 김홍덕

로마서 1장 24,25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4-25)


그런데 이 말씀은 뭐랄까? 해수욕을 즐기기 위하여 바다로 들어가다가 갑자기 물이 깊어진 것 같이 말씀의 강도가 확 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앞에서 문안 인사를 하고 로마에 가서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겠다고 덕담을 하던 바울 사도가 갑자기 돌변한 듯 심각한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망은 누구를 향한 책망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유대인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또 그런 생각과 궤를 같이하는 생각인 육신의 어떠함을 믿음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그런 생각이 바로 마음의 정욕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진 육신의 어떠함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두고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워지는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과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더욱이 바울 사도는 이 말씀에 이어서 남녀의 간음 특히 동성애를 연상케 하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의 겉모습을 가지고 믿음의 대상이 되느냐와 또 좋은 믿음은 육신의 어떠함과 연관이 있다고 하는 것이 마음의 정욕과 육신의 간음에 해당한다고 하는 것은 좀 과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결코 과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가진 마음의 정욕과 하나님 앞에서 간음은 뿌리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에서 난 생각이 교묘하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결탁하면 사람을 외모로 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 뿌리는 다름이 아니라 <“무엇이 본질이냐?”> 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것을 본질로 또 근원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생각과 행동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신앙관은 무엇을 본질로 보기에 마음의 정욕이고 또 간음하는 것이며 또 사람을 외모로 취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눈에 보이는 이 육신의 삶을 본질로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볼 때도 사람의 외모, 즉 세상에 속한 육신의 어떠함을 그 사람의 정체성으로 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어떠함을 하나님을 믿는 마음과 동일하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렇게 사람의 외모, 혈통이나 지식의 정도가 예수님을 믿는 조건이나 자격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정욕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외모를 본다는 것, 그것이 신앙의 기준과 자격과 조건이 된다는 것은 신앙의 본질이 육신의 일에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즉 육신의 마음은 늘 자기 육신의 문제를 걱정하는 것이기에 육신의 일을 본질로 보는 것이 바로 마음이 가진 사욕과 정욕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행위나 외모나 혈통이나 지식이나 재산의 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먼저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나 혈통이나 지식이나 가진 재산을 의로 여기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본질로 여기시지 않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께서는 본질로 여기시지 않는 것을 본질로 여겨 그것을 믿음의 본질로 까지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사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혈통을 기준으로 판단하시지 않고 그 중심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있는지를 보시는데, 사람이 혈통을 기준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즉 의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안목이 간음과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간음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기 짝이 하닌 것과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간음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순리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언급한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간음이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여자가 순리대로 서로를 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려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인데 그 순리 곧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서로를 대하는 것이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간음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람을 보지 않는 것도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대하는 순리가 있는데 그 순리대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의도대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순리대로 사용하지 않는 안목이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람이 살지 않는 것이나 동일하게 자기 짝이 아닌 것과 연합하는 것이기에 다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보실 때에 사람의 의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사람의 외모는 사람의 중심에 있는 것이 각양의 사람의 외모로 표현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땅에 충만하시고 풍성하시기 때문에 혈통의 다양함으로 하나님의 풍성이 표현되고, 지식의 다양한 격차를 가진 사람으로 또 표현되며, 사람의 생김새와 살아가는 모양과 성격과 같은 그 모든 외모는 중심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그 만큼 다양하게 표현되기 위한 것이지, 그것이 구원의 기준이 된다거나 사람의 정체성,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의 본질로 볼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그렇게 보는 것이 바로 순리대로 대하지 않는 것이기에 남자와 여자를 순리대로 대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만큼 사람을 외모로 보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외모와 그 외모의 공로를 의로 여기사는 하나님을 보지 않는데 그것을 본질로 볼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사람의 외모와 공로와 소유의 드림을 의로움으로 보시는 하나님으로 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망령되이 여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믿음이란 사람의 행위나 혈통이나 지식이나 소유의 드림과 무관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신앙에 있어 절대적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 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이렇듯 엄한 말씀을 하는 것은 믿음에 대하여 바르지 않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도 많은 신앙인들이 그 마음에 하나님을 믿는 순전함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도, 교회에서 방언과 같은 은사를 받은 사람을 보고 신앙이 좋다고 말하고, 또 장로를 선출할 때 재력을 보고 선출하는 것을 보면 자기 마음에 가진 신앙에 대하여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나도 방언 같은 은사가 있어야 내 신앙이 온전한 것인가?’라고 생각하게 되고, ‘세상에서 성공해서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방언이나, 또 아니면 모태신앙이라는 것이나, 재력이나, 교회에 봉사하는 시간이나 노력과 같은 것은 하나님께서 의로움으로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다 사람 안에 있는 생각이 표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생명)가 있어서 그러면 모르겠지만,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그런 것이 신앙의 증거요 좋은 믿음이고 복이라는 생각에 그것을 얻는 것이 좋은 신앙이고 믿음이라고 여겨서 그렇게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군인이어서 군복을 입는 것인데, 군복을 입으면 군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래서 자신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육신이 어떠한 것에 무관하게 하나님은 자기 안에 있는 의를 의로움으로 여기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전하려 했습니다. 그것을 <신령한 은사>라고 말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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