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 1:18-23)



바울 사도가 로마서를 기록할 때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비단 바울 사도의 로마서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사람이 글이나 어떤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에는 그 이유와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로마서도 그렇습니다. 큰 시야로 보면 복음에 대하여 전하는 것입니다만 그렇게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복음의 어떤 면을 집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계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18절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경건치 않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보편적 관점으로 보는 것은 틀리지 않지만 우리는 여기서 로마서를 쓰게 된 계기와 다른 사도와는 달리 바울 사도가 가진 사도로서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더 좋은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로마 교회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절기를 지키러 왔다 갔다 하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듣고 그것을 복음으로 알고 그 복음을 나눔으로서 세워진 교회이지만 그렇다보니 유대인이라는 선민사상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로마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울 사도가 전도여행을 하는 동안 지속적으로 부딪힌 문제였습니다.


물론 골로새교회와 같이 세상의 학문이나 사상과 복음이 결탁하는 문제, 고린도 교회에 같이 복음을 받고서 타락하는 문제와 같은 것들도 있었지만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동안 끊임없이 겪었던 문제는 바로 복음이 만민을 위한 것이라는 것에 반하는 생각들이었습니다. 복음이 만민을 위한 것이라는 것에 반한다는 것은 유대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나,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하듯이 기왕이면 세상적인 학문을 잘 아는 사람이면 더 좋은 복음이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하는 것이 바울 사도 일생의 일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것은 혈통이나 공로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나, 지혜가 있거나 없거나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일 복음의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 당시에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하는 것이 조건이었다면 지금은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앙에 대한 어떤 지식이나 행위가 믿음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그런 것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21절에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며’라는 말씀은 참 의미가 큽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자기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정의하기 일쑤입니다. ‘복음은 유대인을 위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기왕이면 교회에서는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 모두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의 것으로 바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자의적으로 믿는지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소 비판적이겠지만 이야기 해 본다면, 우선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목사’라는 자리를 생각해 봅시다. 어떻게 목사가 됩니다. 우선 신앙이 학문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자기 안에 있는 고백인데 공부라는 공로를 쌓아야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는 취업을 위하여 Spec.을 쌓듯 경력을 쌓아서 목사를 청빙한다는 교회에 놀랍게도 <이력서>를 냅니다. 그러면 교회는 먼저 서류 전형을 합니다. 지원자의 스펙, 곧 공로를 얼마나 쌓았는지 봅니다. 그리고 불러서 설교를 시켜 봅니다. 말은 잘하는지, 성품은 어떤지 잠깐의 설교로 사람의 모든 것을 평가합니다. 그렇게 목사를 뽑습니다. 이 전 과정은 신앙이라는 탈을 쓰고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방법 위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세상의 가치관과 간음하는 것입니다.


장로도 마찬가집니다. 교회 안에서 장로를 선출할 때 가장 우선은 재력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어떤 공로가 있는지를 평가합니다. 거의 인기투표 수준인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일입니다. 이것 역시 신앙이라는 허울만 있을 뿐 모든 가치관과 법과 생각과 의가 세상의 법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상으로 바꾼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목사를 청빙하고 장로를 선출하는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다 보니 자신들이 청빙한 목사에게 또 장로에게 기대하는 것도 세상적인 것입니다. 얼마나 도덕적이냐, 다른 목사나 장로에 비하여 얼마나 고상하고 수고하느냐와 같은 것을 기대합니다. 그리고는 다툽니다.


교회가 이런 것은 교회 안에 있는 신앙이 이렇게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신학을 얼마나 했느냐?’ 라든가 ‘공로가 얼마나 있느냐?’ 라든가 ‘세상적인 역량을 얼마나 갖추었느냐?’와 같은 것이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조건을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유대인이냐?’, ‘할례는 받았느냐?’, ‘방언을 받았느냐?’, ‘신앙이 좋으냐?’와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번도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늘 그들이 나를 버렸다고 했고, 이방신을 섬긴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성전에 이방신상을 들여 놓은 적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신을 섬긴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의 생각에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을 판단하는 가치 기준이 신앙과 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사람을 볼 때 혈통을 보고 가늠하고, 또 그 사람의 사회적인 신분이나 재력과 고상함의 정도를 보고 사람을 가늠합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같은 신앙의 모습을 보여줘도 세상적인 것이 더 갖춰져 있으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아무래도 성격 좋고 착한 사람이 신앙생활도 잘해!”와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한 이방신을 섬기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신앙과 결탁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로와 소유의 드림을 의로 여기시는 잡신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심히 경계하는 것, 유대인이어야 한다는 것,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생각도 그것과 같은 것이기에 바울 사도가 이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버리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하고 보여 주기 위하여 로마에 가고자 하고, 가서 보여주고자 하는 은사 또한 그것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로마서를 읽고 진정으로 이것이 오늘 나의 말씀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면, 오늘 우리도 신앙에 있어 세상의 가치관이 더해지면 좋다고 여기는 것,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식으로 세상의 어떤 것을 사람을 판단하는 조건과 기준으로 삼고, 또 좋은 신앙의 기준으로 삼는 것에서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신 뜻을 알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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