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에 마태복음을 마치고 어떤 내용의 글을 더 올려볼까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관점에서 글을 쓰겠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글을 쓰다보면 어느새 성경을 해석하는 듯한 모양새로 흘러가곤 하는 것에 늘 ‘이래서는 안 되는데…’하곤 했다. 특히나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성경의 단어나 당시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지식은 아무래도 부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이라는 것은 훌륭한 견해는 아니라고 생각이 된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더 독자들이 볼 때 자신의 이야기로 와 닿는 그런 글들을 쓰고 싶었다. 사실 <미가서>나 <야고보서>와 같은 성경을 이야기 해 보고 싶었다. <미가서>를 가지고는 신앙이 변질되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과 혼합되는 것이라는 것을 써 보면 어떨까 싶었고, <야고보서>라면 그야말로 <‘행함과 믿음’>이라는 영원한 논제를 이야기 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보다 앞서 이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서 늘 배경처럼 깔려 있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주제를 먼저 다루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에 대하여 글을 쓸 생각이다.


마태복음의 말씀을 블로그에 올리기 위하여 적은 초벌 파일이 있는데, 아래한글로 작성한 분량이 A4용지 사이즈로 506페이지나 되었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끝나고 나면 책으로 출간할 생각이었는데 너무 분량이 많고, 무엇보다 아무리 생각해도 문장과 설명이 매끄럽지 못한 것 같아서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번에 쓰기로 한 <내용과 형식>은 글을 다 쓴 다음에 전자책으로 출간할 수 있게 좀 더 정성을 기울여 볼 생각이다. 


<내용과 형식>은 평범한 단어들이라서 성경을 보는 열쇠적인 관점으로 도입하기에 큰 임팩트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대명사적이 도입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가, 사람과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는 것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의도하신 바가 있고, 그 의도하신 바가 사람과 세상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내용>이 ‘사람과 세상’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지신 내용과 그것이 표현된 사람과 세상의 관계성을 성경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성경의 골격을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것들 중에서 대표적으로 내용과 형식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예를 보면,

  • 하나님과 사람

  • 남자와 여자

  • 보이는 것과 나타난 것(히 11장)

  • 약속과 증거(히 11장)

  • 하나님의 형상(이미지)과 사람

  • 믿음과 행위(야고보서)

  • 생명과 행함

  • 말씀과(이) 육신(이 되심)

  •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 복음과 율법 등

많은 것들이 있다. 이러한 것이 <내용과 형식>이라는 구조로 볼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영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표현하시고자 사람을 만드시고, 그 뜻하신 바대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하나님의 의가 사람을 통하여 나타나는(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이시고, 그것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 하나님의 의와 말씀과 같이 형식이 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과 의와 목적과 같은 내용이 형식과 몸을 가진 세상과 사람으로 표현되고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성경의 말씀은 늘 어렵고, 그것을 지켜내는 것 또한 어렵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세계와 현상계 안에서 육신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오늘 우리 자신이 그렇게 갈구하는 삶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자아 정체성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뜻이, 사람인 나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아찔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신앙, 성경에서 진리와 자아 정체성을 찾으려는 신앙 안에 있는 지속적인 의문들이 있다. ‘행위냐 믿음이냐?’라든가, ‘정말로 말씀만 있으면 되느냐?’, 그리고 그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이것을 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에 관한 것들이 그것이다. 많은 의견들이 있지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통일된 관점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필자가 또 하나의 이론을 더하는 것이 이 글의 정체성이 될지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모든 난제들(실은 난제가 아니지만) 안목이 바뀌지 않으면 이해하거나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목이 바뀐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을 본질로 볼 것인가?’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까 <내용을 본질로 볼 것인가?> 아니면 <형식을 본질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즉 모든 형식은 내용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내용이 본질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이 현상계가 본질이라고 생각이 된다면 그것은 형식이 내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형식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성경을 믿는 신앙 안에서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을 대하면서 그 모든 말씀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인가 하는 절대적인 문제를, 행동과 삶의 모양, 즉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절제하고 연단하고 훈련함으로 풀어내는 것이 일반적인 신앙의 모습이다. 즉 형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거나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있어 형식은 언제라도 다시 만들 수 있는 것일 뿐 관심사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형식이 없는 영이신 분이시고, 의(義)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육신이나 이 천지만물도 하나님의 의와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먼저 의와 말씀인 내용이 있고 그것이 사람으로 또한 세상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즉 내용이 형식이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 역시 그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겪는 모든 일과 그 모든 일의 기반이 되는 육신과 세상의 만물들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행동을 잘 관리하고 훈련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은 그 사람의 행동을 나타내는 그 사람의 생각, 즉 그 사람이 가진 의에 대한 기준과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 의와 본성이 바뀌지 않는다면 몇 번은 자신의 행동을 선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율법의 기준과 같이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어기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행동에 대한 규범이 아니다. 그렇다고 행동은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먼저 삶의 모든 행동을 결정하고 나타내는 사람이 가진 의에 대한 기준과 본성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내용이 본질이라는 것을 인지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세상 모든 것을 준다는데도 시험에 빠지지 않으신 것이다. 마귀가 보여준 만물이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모든 세상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라는 내용에서 마귀가 보여준 모든 것이 다 나타난 것인데, 어느 것을 경배하는 것이 선한 것인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인생의 모든 것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와 사람 지으신 목적이라는 내용이 사람을 통하여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목적과 생명의 정체성이 나의 본성이 되면 성경의 모든 말씀과 같이 나의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있으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자연스럽게 지켜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이 가진 구조이고, 하나님 말씀의 본질인 것이다. 즉 행동은 버릴 것이 아니라 내용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의미도 그것이다. 내용이 없으니 행동이 없다는 것이다. 호흡이 없으니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용과 형식> 이라는 구조를 알고 성경을 보는 것은 성경을 보는 아주 좋은 관점이다. 성경을 <내용과 형식>이라는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내용을 본질로 본다는 것이다. 신앙 안에서 내용이라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이다. 그리고 인생은 그것을 표현하는 도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성경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형식인 육신의 삶을 연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 곧 무엇을 의로 여기는지에 대한 관점과 가치가 바뀌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본성이 육신의 모든 삶으로 나타나고 비롯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내용과 형식>이라는 관점으로 성경의 뼈대를 세워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내용이 사람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성경에 어떤 내용들이 있고, 또한 <내용과 형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이 얼마나 밝아지는지에 대하여 글을 써 가려고 한다. 그리고 이 글은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에 대한 설명에 이를 것이다. 결국 하나가 된다는 것은 내용이 자기에게 맞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 그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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