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9. 12. 15:55 Writer : 김홍덕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을 보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 2:18)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그냥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뭐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도 아니다. 이 사람은 아담이다. 아담이라는 이름의 뜻이 ‘붉다’는 의미이다. 이는 흙이 붉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붉은 색은 사람을 나타내는 색이기도 하다. 하여튼 하나님께서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신 대상은 아담인데, 이 아담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그 모습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남자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남자가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다거나, 아니면 반대로 여자가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말씀을 하시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남자를 보고 사람이라고 한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모습을 가진 사람이 바로 남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것이다. 즉 이는 하나님의 의를 가진 존재를 남자라고 하는 것이다. 즉 내용을 가진 이가 바로 남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신 것은 내용만 있어서는 좋지 못하니 그 내용을 표현할 형식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성경에서 남자와 여자를 말씀하시는 것이 육신으로 남자냐 여자냐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육신이 여자라도 남자의 격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고, 육신이 남자고 힘이 좋고 세상을 좌지우지 할 능력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없으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여자의 격을 가진 존재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사람의 수를 셀 때 남자의 수만 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만을 사람으로 보시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인 사람만 살아 있다고 보신다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 마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율법의 조문으로만 보면 여자를 수에 세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지 않고 그 의 자체로만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말씀인 것이다. 즉 내용이 내용으로만 있고 표현되지 못한다면 좋지 못하다는 것이다. 즉 내용은 형식으로 표현될 때 보기에 좋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만들고 보시기에 좋았던 것은 영이신 하나님의 마음이 형태를 가진 존재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좋았던 것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이라 인정하는 내용을 가진 사람이 내용만 가진 상태로 있는 것은 좋지 못하므로, 그것을 표현할 배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형식이고, 그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여자인 사람으로 나타난 것이다.


실재로 남자와 여자는 전혀 다른 사람인데, 그 가운데서 가장 특징적인 정체성은 남자는 명분을 중요하게 여기고, 여자는 표현된 것과 방법과 형식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내용인 영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시는 성품이자 법을 가지고 계시고, 그 성품과 법으로 내용에 대응하는 사람을 남자로, 또 형식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의 행동 양식도 이런 것을 설명하는데, 여자는 화장을 하고 겉을 꾸미며, 옷과 같이 표현되는 것에 중요하게 여기는 반면, 남자는 겉으로 표현되는 것 보다 자기 안에 능력을 갖추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남자의 본성은 평소에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내재된 것이 어떤 상황과 필요할 때 나타나고, 여자는 보통 평소의 모습마저 늘 꾸미고 단정하게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남자와 여자의 육신의 삶의 모습에서 우리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것이 어떤 관계인지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표현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신 것은 잘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왜 천지를 창조하셨는지, 천지창조의 이유와 목적을 알 수 있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명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남자가 형식을 아는 여자와 함께 하지 못하고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의요 내용이신 하나님 자신이 혼자 있는 것 좋지 못하므로 이를 표현할 존재,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내어 그것을 표현할 형식이 필요하다고 여기시는 분이심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본성이 천지와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 의의 본체고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할 형식을 창조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의의 본체이신 하나님을 표현할 형식을 만드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하나님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이며, 의의 본체이시고 영이신 하나님이 표현된 형식이 바로 세상과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형체가 없으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온전한 내용이고, 의이시며, 목적이신 분이시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가지신 본성이 그 의를 표현할 형식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것을 성경에서 나타나신바 된 것이라고도 하고, 말미암은 것이라고도 한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끌리고 서로를 그렇게 간절하게 필요로 하고 짝을 찾는 이유가 그런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그 본성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표현하고 거하실 형체가 필요했다는 것은 내용과 형식은 언제나 서로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의지라기보다 하나님의 본성이라 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는 그래서 서로가 필요한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통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육신을 어떻게 하나로 만든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남자가 가진 의가 여자로 표현되는 것이나 여자가 가진 표현의 본성을 채울 의를 찾는 것이다. 그렇게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는 것은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는 것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창조섭리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하와를 또한 창조하실 때에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들었다고 하셨다. 이것을 두고 사람들은 ‘남자의 갈비뼈가 여자보다 하나 작은가?’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성경에서 뼈는 <의(義)>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다른 죄수와는 다르게 뼈가 꺾이지 않으신 것이다. 예수님의 의는 꺾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었다는 것은 아담의 의가 하와로 나타났다, 즉 남자의 의가 여자로 표현되었다, 그러니까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다는 것은,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

즉, <“영이신 하나님께서 천지로 표현되셨다.”>라는 말씀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세상은 하나님이라는 내용이 표현된 형식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은 남자와 여자라는 같은 사람이지만 전혀 다른 사람을 통하여 표현하신 것이다. 그것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의 본성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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