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는 이어서 음란과 우상 숭배와 같은 것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다고 하고 있다. 이 새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그것은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좇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대 원리이다. 성경이 시작될 때 창세기에서 이것을 선언하듯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의(definition)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 성경의 정의가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이신 이유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라고, 또 될 수 있다고, 또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육신을 가지고 오셨고,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습 외에 아무 것도 없었고 


또한 인간의 모습 이외에 아무 것도 없고 고통 받는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올 수 없는 것이 인생이고 사람이라는 것을 몸소 보이신 곳이 바로 십자가의 자리이고, 그 모습을 보고 모든 사람이 자신도 그리스도와 같은 운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바라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좇은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십자가에 대하여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 같지만, 바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십자가는 초인적인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귀신이나 흡혈귀를 퇴치하거나 사람이 육신으로 지은 모든 죄를 법정의 결과에 상관없이 모두 사하여 주는 그런 능력을 가진 것이 십자가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십자가를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인간의 표준이 드러나는 자리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주는 자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공산품으로 치면 금형(mold)과 같은 것이다. 십자가를 거쳐야 온전한 사람, 곧 하나님의 형상을 좇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십자가는 우선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지는 아는 것이 우선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또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서 하나님 앞에 죄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죄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 죄가 없다면 죄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인 관점으로는 죄가 매우 크다. 그러니까 사형을 당하신 것이다. 하지만 이 성경과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이 세상의 법과 이치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인지할 수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그리스도의 모습,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 세상의 법, 곧 예수님을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은 법이 무엇인가 했을 때, 사람이 하나님이 지으신 그대로의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고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라고 하면 죄가 되는 그런 법인 것이다. 그것이 유대인의 법이고 로마의 법인 것이다.


그 법은 오늘, 아니 인류가 가진 영원한 법이다. 왜냐하면 이 법의 뿌리가 선악과에 있고,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나면서 육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기준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스스로 정해서 그렇게 되고자 하는 것이 있는 한 영원한 법인 것이다.


그 법은 오늘날도 늘 우리 곁에 있다. 세상은 늘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간 사람만 승자요 의인으로 인정한다. 하다못해 사람이 겸손하고 봉사하고 착한 것도 경쟁과 비교가 되고 그 중에서 승자가 의인이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런 구조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 수 있지만, 문제는 모든 사람이 한 분야의 경쟁 방식에서 다 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운동이라는 분야에서 보면 모든 사람이 운동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고, 또 사람이 봉사를 하고 고상한 것으로 치면 또 다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또 사람이 아무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해도 나이 들면 도움이 필요하게 되는데, 나이 드는 것이 자신의 잘못도 아님에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다.


사람은 흔히 말하는 대로, "적어도 사람이 이래야지!"하는 것을 갖다 대기만 하면 웬만하면 죄인이 된다. 설사 어떤 것에 만족하더라도 세상에 있는 또 다른 기준으로 보면 무조건 다 죄인이 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가지고 있는 "적어도 사람이 이래야지"하는 모든 기준을 만족할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율법은 일 만개 중에 단 하나를 어긴 것이나 9,999개를 어긴 것이나 어겼다는 것에서는 동일한 기준을 가진 것이 율법이고 세상의 법이다. 그러므로 더욱 더 세상의 법 앞에서 온전한 의인은 있을 수 없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의 법으로는 육신을 가진 인생은 언제나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이신 곳이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죄인이 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의인이 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의인으로 삼는 것을 잘하는 사람을 얻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본연의 모습으로 있는 그 자체, 그러니까 스스로 선악 간에 판단하는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사람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스스로 만든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도무지 왕도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는데, 유대인의 왕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죄인이 되셨던 것이다.


로마의 법으로 볼 때 왕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사람들 위에 군림할 힘을 가진 정치와 무력의 승자여야 하는데 예수님은 허구한 날을 죄인들과 세리들과 창기들과 놀고 있으면서 왕이라고 하니 용납할 수 없고, 안식일을 모양으로 범하고 유대인들의 규례는 지키지 않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그 또한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세리나 죄인들은 다 세상의 법으로 죄인 된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선하다 여기는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은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이 더 하나님을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함께 했다는 것은 그 격이 같다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바로 그런 모습, 선악과를 먹기 전에 아담이 자신의 벗은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듯, 사람이 세상의 법으로 죄인이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 심히 좋았던 인간의 모습,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모습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을 좇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사람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기에 살리실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었기에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이다.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의 표상인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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