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3:1-4 위의 것과 땅의 것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2. 2. 15:24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가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하신 말씀에 나오는 <위의 것>은 바울 사도만의 표현은 아니다. 물론 이런 표현이 자주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 전체로 본다면 하늘의 것이 있고 땅의 것이 있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물>이다.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는 이를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라고 말씀하고 창세기 7장에서는 홍수가 날 때 하늘의 창이 열리고 깊은 샘이 터졌다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창 1:8-9상)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창 7:11)


특히 이 중에서 노아의 홍수의 경우에는 홍수의 원인 곧 하나님께서 땅을 심판하시겠다고 생각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6장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고 그 사이에서 위대한 자 네피림(용사)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창 6:2-4)


먼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물은 만드셨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나누었다고 하셨는데, 이 물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의 갈증 곧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가?'와 같은 인간 본연의 갈증을 해갈하는 물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가진 자신의 존재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물, 곧 말씀을 취해야 하는데, 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물은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궁창 곧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 곧 땅에 속한 것이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 생활에도 상수도가 있고 하수도가 있다. 상수는 마시는 물이고, 하수는 상수를 사용하고 난 다음에 버려지는 더 정확히는 소산물이다. 그리고 사람만이 마시는 상수와 사용된 하수를 구분한다. 그러니까 짐승들은 마시는 물과 사용하는 물의 구분이 없고, 심지어 자신이 마시는 물속에 배설까지 하지만 개의치도 않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을 보면 사람은 분명히 마시는 물과 마시고 난 다음에 버려지는 물이 있다. 그것은 육신도 그러하지만 영혼 곧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것 역시 그러하다. 즉 사람이 자신의 존재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기 위해서는 마셔도 되는 상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궁창 위의 물,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하늘 위의 물을 먹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취했다는 것은 성경에서 여자(비유이지 여자라는 존재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를 사람과 땅의 것으로 비유되는 것으로 볼 때 이것은 골로새 교회의 문제와 같이 땅에 있는 과학이나 철학이나 재물이나 명예와 같은 것이 좋아 보여서 그것을 신앙에 더하는 모양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배필 곧 동급의 짝으로 삼았다는 것은 사람의 존재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는 상수도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과 땅에서 난 것이 짝을 이루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위대한 네피림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들이 더 크고 위대해지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 위대함을 좇자 하나님은 사람들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셨다. 즉 이는 내용은 없고 형식만 남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육신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내용이 있을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육신이 된 사람, 곧 상수와 하수의 구분이 없는 짐승과 동일한 존재가 된 사람을 땅에서 멸하시려 홍수를 일으키셨는데, 이 때 하늘의 창이 열려서 물이 쏟아지고 땅의 깊은 샘이 터져서 물이 넘쳐서 합해져서 홍수가 되었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물, 곧 하나님의 말씀과 땅에서 나는 과학과 철학과 같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 같은 것이요, 하수도 물과 같은 것이며, 땅에서 나는 것이 섞이면 홍수, 곧 물은 넘쳐나나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홍수는 자기 정체성에 목마른 사람, 곧 육신이 되어 버려 내용이 없어 내용에 대한 채움이 있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하늘과 땅의 물이 합쳐져서 넘쳐났지만 오히려 그 넘쳐나는 물로 다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섞으면 죽음에 이른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의 것과 땅의 것에 관한 분명한 하나님의 생각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에 있어 가장 위험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생각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세상을 뒤섞는 생각, 그리고 신앙에 땅에서 난 지식, 곧 금방은 사람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갈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수가성 여인이 내내 길러야 했던 그 물을 섞는 것이 가장 타락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골로새 교회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이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땅에서 비롯되는 생각, 곧 사람이 연구하고 생각하여 낸 것은 그것이 아무리 위대하고 사람의 정체를 밝혀 낼 것 같지만 그것은 다 궁창 아래의 물일뿐이다. 과학은 아직 사람을 다 알지 못하고, 철학도 모든 인류가 공감하는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사고를 내어 놓은 적이 없다. 


그런 것이 설사 이후 세대 언젠가 가능해진다 해도(그럴 리도 없지만) 이전 세대에도 적용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인 것이다.


하수는 다 상수도를 사용함으로 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땅의 모든 과학이나 철학이나 재물이나 명예와 같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것을 초등학문이라고 하신 것이다.


위의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의일 뿐이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뜻은 사람 지으신 뜻이다. 즉 사람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존재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는 유일한 물이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인 것이다.


이 물은 마시면 다시 갈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넘쳐 난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그 유전자가 안에 있으면 언제나 그 생명력을 발휘 한다. 언제나 넘쳐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하여 준비하고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살아가기만 하면 넘쳐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그저 사람으로 살기만 하면 사람이라는 것을 넘쳐나게 표현한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이 그렇다. 꽃도 꽃이라는 유전자가 표현되면 향기가 넘쳐나는 것이다. 동물은 그 넘침을 활동으로 보이고 식물은 향기와 같은 것으로 넘쳐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은 늘 위의 것을 사모해야 한다. 즉 사람은 하나님을 담기 위한 질그릇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을 담아내고 표현하기를 사모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위의 것이고, 그것이 궁창 위의 물이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이다.


이 물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구분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에 대한 구분이 없으면 하나님의 세계가 창조되지 않은 사람이다. 이것은 분명한 구분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상수와 하수를 구분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로 섞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에게 노아 홍수를 초래하는 것이 될 뿐이다. 죽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섞은 신앙은 하나님께서 죽은 것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그 물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세례다. 그곳에서 살 수 없다는 고백이 바로 세례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것을 섞은 세계 안에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이 있는 사람이 진정한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또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것 이외에 어떤 것도 사람의 본분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다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있고(롬 8장), 또한 그것은 하수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오는 산출물과 같은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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