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3:5-11 땅에 있는 지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2. 3. 17:14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에 이어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유는 땅에 있는 지체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고 특히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 (요한일서 5장 13-21절) 우상



먼저 이 말씀에서 우리는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땅에 있는 지체'는 이 육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육신이기만 하면 무조건 여기에 해당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땅의 것을 생각하는 지체, 땅의 것이 전부인 것으로 아는 세계 안에 있는 육신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문맥적으로 뒷받침 하는 것은 7절에서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서 살 때에는'이라는 말씀과 같이 땅의 것을 본질로 아는 세계 안에 살 때라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땅에 있는 지체가 가진 것이 바로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은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육신이라고 그것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욕심도 정욕도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좀 다르다. 사람이 정욕을 가지고 있는 것과 음란이 다르고, 부정은 말할 것도 없고, 사욕은 욕심의 사유화적인 개념이며, 악한 정욕과 우상숭배와 같은 탐심은 다 사람의 본성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자리를 벗어난 상태에서 가진 욕망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메겨 놓은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을 벗어난 자리에서 사람의 육신과 세상의 만물이 본질이라 생각하고 그것에 매몰된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듯 사람이 자기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은 위의 것과 땅의 것에 대한 개념이 없이 위의 것과 땅의 것을 혼합하거나 아니면 땅의 것을 본질로 아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실상은 그런 삶 그 자체가 바로 음란이고 사욕이고 부정한 정욕이고 탐심과 우상숭배인 것이다.


음란이나 간음의 정의는 정당한 짝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있어 성생활이라는 것이 부부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축복 받는 것이지만 그 짝이 아닌 상대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음란한 간음이라고 하는 것이듯, 사람도 자기가 내용으로 삼아야 하는 것과 짝이 되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간음이고 부정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맞는 짝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의와 성품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와 목적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나타내어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것을 짝으로 삼아서 자신의 본질로 삼지 않으면 어떤 아름다운 삶을 살아도 그것 자체가 이미 음란한 것이다.


이는 마치 해적이나 간첩이 서로 간에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정도로 각별하고 또 일반 국민들에게 유익한 일을 한다 해도 그것으로 죄를 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해적이나 간첩에게 가장 선결되어야 하는 것은 국가에 자수하는 것 그것이다. 그것이 아닌 상태에서 하는 어떤 일도 다 배우자 이외의 상대와 관계하는 간음과 같은 것이다. 


실재로 성경이 말씀하는 간음, 하나님께서 음란한 백성들이라고 하는 표현들은 다 이런 맥락이다. 그리고 이것을 종교적인 용어로 말하면 바로 우상 숭배가 되는 것이다. 즉 사람이 마땅히 섬기고 자신의 주인으로 삼고, 자기 삶의 내용과 본질로 삼아야 하는 하나님외의 것을 사모하는 땅의 것을 생각하는 땅에 있는 지체로서 사는 것은 그 자체가 간음이고 음란이며 우상 숭배인 것이다.


또한 이것이 탐심이 되는 것은 사람이 육신과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살아가게 되면 그것의 유익을 위하여 살게 된다. 즉 육신의 삶이 자신의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열심히 사는 것은 다 탐심인 것이다. 하나님을 표현하고 주신 인생을 자신의 것으로 훔쳐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또한 성경이 말씀하는 근원적인 도적질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 바울 사도가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형제들에게 이러한 우상 숭배의 것을 버리라고 하고 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지금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골로새 교회에 지금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현상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권면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세상의 과학과 철학을 신앙에 가미하려는 생각이 바울 사도가 지적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하나님께서 죽었다고 하는 것은 단 하나,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생명이라는 것이 유전자만 있으면 어떤 장소 어떤 상태라고 해도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 것이듯, 그 대칭점에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진노하시고 죄로 여기시는 것이 아무리 다양하고 복잡해도 그것은 단 하나 하나님의 존재 목적을 상실한 상황에서 모든 것은 그것이 어떤 아름답고 위대한 모양을 하고 있어도 다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신앙은 참 단순한 것일 수 있다. 생명이라는 것이 생명으로 살아가는 모양은 단순해도 생명인지 아닌지, 생명이라는 것만 알면 그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단순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사람의 존재 목적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삶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고, 아들이며, 성경의 모든 것이 그 사람의 삶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인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는 짓이 아무리 대단하고 아름답고 고상하고 위대해도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늘 음란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의 한 단면으로 신앙에 과학이나 철학과 같은 것이 더해지면 더 좋은 신앙이라 여기는 것이 골로새 교회의 문제이기도 하고 오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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