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3:5-11 어떤 사람에게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2. 6. 11:56 Writer : 김홍덕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가 되면 사람의 삶은 바뀌게 된다. 기적을 논하는 것에 있어서 본다면 가장 큰 기적은 사람이 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이 바뀐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성격이나 성향이 바뀐다고 하기보다, 그것을 표현하고 사용하는 것이 바뀌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나이를 먹으며 신체의 반응 속도가 느려지는 만큼 행동이 느려질 수 있지만, 그래도 일을 처리하거나 닥칠 일을 대비하는 것에 관한 마음 씀씀이 같은 것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성격 급한 사람이 느긋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라기보다, 그것을 어떻게 어디에 사용하는지가 달라졌을 때 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해 가는 것은 복음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고 살면 모든 것이 되는가 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사실 이런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신앙이라는 세계 안에 'have to'와 같은 것이 너무 많고, 또 뭔가를 해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는 문화를 쉽게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현상은 아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하시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자연은 살아 있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볼 때 자연은 스스로 살아 숨 쉬듯 생태계를 유지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듯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도 그런 사람, 그런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 있느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한다. 즉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에 부합된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지신 목적은 사람이 육신인 인생의 한계를 극복하고 위대해지거나, 육신이 가진 연약함을 숨기고 절제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보실 때 목적에 부합된 사람이 아니라, 그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우선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실존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지으신 그 형상으로 뭔가를 할 수가 없다. 지으신 대로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 지으신 실존으로 하시려는 것을 하실 수 있겠는가? 그건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을 항상 경계하고 부인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집을 사거나 그릇을 살 때 이런 말을 한다. '손님 오면 보기에도 좋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정작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에 누가 오는 것을 싫어하고 부담스러워 한다. 화장하고 만나는 것은 괜찮지만 속옷 차림에 화장실 드나드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담이 벗은 몸을 부끄러워 한 것과 같은 것이다. 누구나 다 그런 모습임에도 그 모습을 보이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한 생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활동, 곧 성과를 내고 돈을 벌고 명예롭게 되는 것에도 똑같이 한다는 것이다. 늘 어두운 면은 감추고 어떻게든 남 보기에 좋은 것으로 꾸미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보이기 좋은 것이 되는 것, 그것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기준이다. '사람이 적어도 이래야지!'하는 기준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사람이 어떠해야 <선한 사람>인가를 가늠하는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기준으로 인해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연약함을 자랑할 것인가?



감추지 않는 것과 자랑하고 떠벌리는 것은 다른 것이다. 이것은 믿음과도 연관성이 있다.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라 누누이 말해 왔다.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자신의 연약함이 드러나는 순간이 되었을 때 그것을 힘써 감추고 피하려 하지 않고, 그것이 드러남으로 인하여 부끄럽고 죄인 되는 것을 피하지 않고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의 시작이다. (사실 사람의 이런 모습은 굳이 신앙이 아니라도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그리고 사람이 그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신앙에 있어 중요한 전환이다. 우리가 연약함을 시인하고 죄인 됨을 시인하는 것은 연약함에 머무르거나 죄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반전이 있다.


사실 반전이라기보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사람이 자신의 연약함을 시인하는 것은 부끄럽고 많은 경우 세상이 가지고 있는 선의 기준에 의해 죄인이 되는데, 그렇게 죄인이 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살리시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첫 열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이 바로 이 법인 것이다. 다시 산다는 것은 먼저 죽었다는 것이고, 왜 죽었는가 하면 세상이 가지고 있는 선의 기준으로 볼 때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모습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도 죄가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죄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우리 모습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부인하고 배척하고 산 것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시인해야 하는 죄인 것이다.



죄를 시인함으로 의에 이르고……



사람이 자신의 존재의 연약함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외면하고 산 삶에 대하여 시인하는 것은 죄인으로 머물기 위함이 아니라 의롭게 되고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위함이다.


여기서 잠깐, 이는 도끼를 잃어버린 나무꾼의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이므로 그것을 목적으로 죄를 시인하는 교묘함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금도끼가 목적이 아니었듯, 사람은 거저 자신의 실체를 인정하는 그것으로 끝이고 그 다음은 하나님의 권세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 가는 것을 목적으로 회개하는 것과 같은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런 고백과 참회를 해 본 사람은 아는 것이다.


요한 사도는 이에 대하여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라고 하셨다. 즉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실체를 인정하고 또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의 실체를 부인하는 죄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과 같이 우리를 살리시고, 또한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깨끗하게 한다는 것 역시 깨끗하게 두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어떤 것을 깨끗하게 하는 이유는 그것을 어떤 목적에 맞게 사용하기 위하여 깨끗하게 하지 버릴 것은 깨끗하게 하지 않는 것이듯 하나님도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 사용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깨닫는다는 것은 이때까지 그렇게 살지 못해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던 삶을 고백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세상의 법 앞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죄인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고백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 사람을 목적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적인 권면을 해 가는 바울 사도



사람이 하나님을 존재로 만나면 신앙은 완전하고 온전한 것이다. 아이가 태어날 때 반인 반수로 태어나지 않고 온전한 사람으로 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끝은 아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위하여 갖추어야 할 것이 많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아이가 자라면서 사람으로서 가진 생명으로서 부족함을 채워야 하는 것은 없다. 이미 태어나는 순간 사람의 유전자로 온전하기 때문이다. 다만 생명이 자라서 어른이 되어야 다시 아이를 낳고 기르는 부모가 될 수 있듯 하나님 안에서도 그런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기는 한 것이다.


하지만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삶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 않듯이,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도 어떤 이들은 자신의 분량이 또 다른 생명을 낳는 것에 이르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죄는 아니다. 


언젠가 언급하겠지만 신앙의 척도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에게 주신 분량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 안에서 하는 것이다. 그것 이상을 하려는 것도 죄고, 그것을 채우지 못함도 죄가 될 수 있지만, 객관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죄로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잘 말씀해 주고 있다.


이제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실제적인 권면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에 한 가지를 분명하게 하고 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복음이 어떤 사람, 어떤 민족에게라도 동일한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만유가 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하는 것인데 하물며 사람이 인종이나 성격이 다르다고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이 말씀으로 인하여 교회 안에서는 차별이 없을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강단에서 설교하는 권한(이걸 권한이라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을 강도권이라고 한다고 한다. 그런 것이 대표적인 것이다.


사실 그런 권한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런 권한을 가지는 과정이 문제라면 문제인 것이다. 즉 시험을 치고 신앙을 학문으로 공부한 신학(어째서 신앙이 학문이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경력자라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는 것이 이미 복음에 대한 절대적인 차별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사람이기만 하면 하나님을 알고, 또한 자신이 아는 하나님을 전하고 고백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선포할 수 있는 것에 대항하는 차별인 것이다. 


이 복음은 온 인류를 위한 것이고, 사람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복음이라는 것이 듣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땅 끝까지 전하는 것이 복음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해서 그것을 표현하고 전하는 어떤 과정에서도 차별이 없는 것이다. 그저 사람이기만 하고, 자신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면 더 필요한 것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모든 인류를 위한 보편성이 복음의 진정한 순도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이 있을 때 사람이 아기로 태어남과 같은 거듭남이 있는 것이고, 그리고 이제 목적을 위하여 깨끗함을 입은 것처럼 또한 사람이 자라서 장성하여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 듯 이 복음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를 향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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