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는 골로새의 신실한 형제들에게 지금까지 세상의 과학이나 철학과 같은 것은 세상의 초등 학문이며 땅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하늘의 것, 곧 위의 것을 생각하고 에바브라를 통하여 전한 그리스도 외에 신앙에 어떤 것이 더해지면 안 된다고 말씀을 해 왔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제 그것과는 좀 다르게 보이게 뭔가를 어떻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다. 용납하고 용서하고 온유하고 사랑을 더하라와 같은 Do에 관한 것들을 주문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성경을 잘 모르는 견해일 수 있다. 언제나 성경은 존재를 이야기 하는 것이지 행함을 요구하는 말씀은 아니다.


먼저, 성경을 '~게 하라'는 말씀으로 보는 사람은 자신의 안목이 행함으로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행함은 기도나 성경 읽는 것이나 전도하는 것이나 심지어 사랑하는 것이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모든 것은 그것을 행함으로 본질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의 유전적 본능으로 가지고 있는 생명이 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것이 성경의 행간이라면 행간이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사랑하라는 것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남을 돕고 헌신하는 그런 행동을 해라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셔서 그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알려 주시려는 가장 근본인 사랑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그 아들을 그 목적을 위하여 보내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아는 삶을 살게 되고 그 목적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표현하는 삶,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한 그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그 사랑, 그 사랑을 전하는 목적을 위하여 남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사랑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근원을 알지 못하고 그저 사랑의 행동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하는 것은 다 <노릇>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는 것이고,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은 것이기에 하나님은 그런 것을 가증하다 하시고, 그런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만하고 만홀히 여긴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이러한 것을 옷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옷은 먼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 것이 선행되고서 다음에 그 사람의 정체성에 맞게 입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그리고 그에 맞는 옷을 입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 옷이 바로 온유함과 오래 참음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성경의 말씀은 일관된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먼저 설명하는 말씀이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고,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정체성이고 자신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미운 오리새끼가 본 하늘을 나는 백조의 모습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회복되고 나면 그 사람의 삶은 이전과는 다른 삶이 된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이다. 달라진다고 하니 성격이 바뀌고 직업도 바꾸고 예수 믿는다고 집을 뛰쳐나오고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것에 몰입하고 그것이 옳다 하면 이단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가치관이 있는 이 사회 속에 두신 이유를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의 가치관이 인간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그 안에 두신 뜻은 전혀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과 같은 관계를 비롯하여 사람들 중에 협의(grievance : 불평, 불만, 불평거리)가 있는 사람들을 용납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 같이 용서하며 모든 것에 사랑을 더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이 사회, 어떤 가치관을 가진 다양한 환경 속에 거하는 것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안에서 서로 용납하고 순종하며 살라는 것이지 예수 안 믿는 사람, 예수 믿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는 어울려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떠나고, 심지어 가족도 버리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용서하시는 예수님



바울 사도는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피차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만난 적도 없는 예수님께 내가 용서를 구할 어떤 짓을 한 적이 없을 것이다. 이 시대 사람들은 말이다. 물론 골로새 사람들은 예수님 승천하신지 얼마 되지 않은 때 이니 바라바를 외칠 때 있었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예수님의 승천도 성경 말씀을 읽고 문자 그대로 보는 관점으로 행하면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식으로 본다면 아직도 하늘로 가고 계셔야 한다. 사람이 예수님 올라가시는 모습을 봤다고 했으니 그 속도가 광속이 아닐 테고, 그런 속도라면 뭐 화성까지나 가셨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은 그런 관점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은 우리가 예수님께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때리거나 워 어떻게 했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던 그 안목을 지금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도 우리는 옛날 예수님과 같이 창녀들과 죄인들과 놀면서 당시의 규례를 어기면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왕이다.'라고 하면 다 죽이고 죄를 물으려 하는 안목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 예수님을 만나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여야 하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안목으로 죄인 되어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 받고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렇게 억울한 죽음을 순종하심으로 자신을 죄인으로 못 박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알지 못함을 하나님께 고하고 용서를 구하셨을 뿐 아니라, 사람이 그런 안목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이심으로 자신을 그릇된 안목으로 죄인으로 못 박은 사람들을 오히려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이시는 용서의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의 용서는 그런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돈을 빼앗아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 아니다. 2,000년 전 유대 땅에 계시던 예수님께 내가 지금 잘못한 것이 뭐 있겠는가? 그러니까 행위나 소유로 예수님께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지금도 예수님을 못 박은 그 가치관을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예수님과 같이 사람의 본질과 존재의 목적을 보이는 사람을 죄인으로 심판하는 우리의 안목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것 앞에 죄인이 되고 심판 받으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용서의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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