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예수님을 본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고, 자신도 예수님을 못 박는 세상의 안목, 시대에 무관하게 가지고 있는 그 안목 앞에서는 늘 죄인이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의 안목으로 못 박은 예수님을 통해 뉘우치고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사람들을 용서 하라는 것이 바울 사도의 말씀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같이 사람들을 용서하고 용납하라고 하니, 사람들이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고 손해를 끼치고 열 받게 하는 것들을 용서하라는 것으로 한정하여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누누이 말하지만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는 편협한 시각이고, 그 관점은 예수님과 같이 사람의 본성을 표현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몰고 가는 안목과 궤를 같이 하는 생각이다.


예수님의 용서하심은 어떤 행위에 대해서 용서하심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죄인으로 심판하는 안목과 가치관 앞에 죄인이 되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용서하심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하나님의 생명을 표현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고 해도 무관할 정도로.


바울 사도도 골로새서를 이어가면서 예수님과 같이 서로 용서하고 이것에 사랑을 더하라고 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 가증 큰 사랑은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남녀도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 없이 서로 육체적인 관계만 가지는 것을 성경은 음란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가지신 의와 뜻으로 의미가 있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사람이 다른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으면 그것이 바로 음란하고 간음한 것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과 짝하는 존재, 즉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에 그것에 적합하지 않은 행동을 하면 그것은 다 음란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사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냥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찾아야 할 의미를 찾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운 오리새끼에게 백조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한 몸으로 부르심에 감사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있는 신실한 형제들에게 서로를 용서하고 이것에 사랑을 더하라고 하면서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죄인 되심을 순종하심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안목을 가진 모든 사람을 용서하시되, 그 용서하심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 정체성과 존재 목적을 회복하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법을 알게 하시는 사랑을 보이심으로 모든 것이 온전하게 됨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는 사람을 그와 같은 자리로 부르시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그렇게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심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이 또한 다른 사람이 자신을 보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질 수 있게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라고 부르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평강은 단순히 평화(peace)라고 한정 짓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평강을 뜻하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샬롬(shalom), 헬라어로는 에이레네(Eirene)이라고 하는데, 이 에이레네라는 말 안에는 '가까이 부른다'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즉 한 편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를 주관하게 하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라는 말씀이고, 그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같은 안목을 가진 한 편이고, 함께 하고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아 다툼과 갈등이 없는 동일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한 것 같이 서로를 용서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평강이 함께하고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다. 감사하라가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존재)이 되라는 말씀이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은 감사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속으로는 감사하지 않는데, 인생이 날마다 곤고한데 감사하라고 하니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 곧 감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먼저 어떤 존재가 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그 존재의 본성과 행함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에 어떤 사이트에 '위로함이여 만족이 되라!'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그 주된 내용은 무엇인가 하면, 나 역시 잘 살고 싶고 부유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처지에서 예수님이 나의 위로가 되기는 한데 만족함이라고 하기 에는 마음이 동의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마음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너희는 돈 있느냐? 난 예수 있다!>라는 것 이였다.


그러니까 내 마음에는 부자가 되고 싶고 세상 좀 편하게 살고 싶고 이 육신이 원하는 것 좀 맘대로 하고 싶은데 잘 안 되서 슬픈데 다른 대책은 없고 다만 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니 죽어서 천국 가서 보자는 마음, 또 나는 내용은 있는데 내용 없이 부유한 불특정 다수에 대한 상대적 비교 우위를 예수의 이름으로 누리려 했던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만족이 없고 감사가 없는 삶이었다. 그 당시 나의 마음은 분명히 성경에 대한 관점이 바뀌고 성경에 대한 의문이 풀려가는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생각하면 만족이나 감사가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것은 내가 사람 앞에서 죄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복음을 안다는 것이 부지불식중에 사람들 앞에서 내 맘대로 더 높은 사람이 되었는데 실상은 낮은 모습으로 사니 만족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로 모순이었다. 복음을 알고 성경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는 것은 높아짐이 아니라 낮아짐에 관한 것으로 볼 때도 모순이고, 내용에 관한 것이 살아가는 형편이라는 형식과 비교되었다는 것도 모순이었다. 즉 제자리가 아닌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또 만족이 없으니 감사도 없고, 그런 감사가 없으니 사람 앞에서 여유도 없고 거저 빡빡한 사람일 뿐이었다. 한마디로 감사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감사



진정한 감사는 제자리에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은 제자리에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사람의 자리는 십자가의 자리이다. 즉 사람의 모든 연약함이 드러나는 자리가 바로 사람의 올바른 자리인 것이다. 그 자리는 그리스도의 자리이고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이며 또한 우리 사람들을 부르신 자리고,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일치하는 사람의 제자리인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 곧 탕자는 진정한 감사를 보여준다. 자기 집에 돌아 왔을 때, 아니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을 때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 집에 거하는 제자리에 거하는 것이 바로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경의 많은 말씀들이 인생을 나그네로 표현하는 것은 나그네라는 정체성이 자기의 머물 곳이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다. 즉 사람이 아버지 하나님의 집, 곧 하나님의 의와 뜻과 생명이 주인이 되는 정체성의 자리로 돌아오면 나그네의 길이 그치고 방탕한 길고 그치고 아들로 안식하게 되는 감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자는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이고, 이 자기 자리는 그리스도께서 부르신 그리스도의 평강의 자리이고, 그 자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 박은 안목 앞에 죄인이 되는 자리이고, 그렇게 십자가로 끌려감으로 다른 사람에게 또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는 자리인 것이다.


이러한 자리에서의 삶은 분명한 감사가 있는 자리이다. 이 감사는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진정한 감사이고 진정한 순종이 있는 자리이다. 이것은 밥 얻어먹고 느끼는 감사와는 다른 것이다. 즉 삶 자체를 감사히 여기는 감사이므로 살아가면서 겪는 각양의 어떤 일 앞에도 감사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감사는 증거가 있다. 즉 그 감사함은 어떤 것의 동력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지혜로 피차 가르치는 것과 서로 권면하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동력이고 원인이 바로 감사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높은 곳에서 더 아는 사람으로 가르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을 보임으로 배우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이끌어내는 감동을 주는 가르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피차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권면 또한 마찬가지이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혼내고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의 대 전제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아닌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죄인 되심과 같이 죄인이 되고 용납하고 본을 보여 자기 자리로 부르는 그런 권면을 말씀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표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하심을 보고 그 마음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알게 됨으로 이 세상의 선과 악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과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야 선이 되는 것이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라 십자가와 같이 우리의 연약함과 실체를 인정하는 그 자리에서 발견된 하나님의 생명과 뜻이 자신의 삶과 목적과 의미가 된 생명으로 살아가는 그 자체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 사도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도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 그것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과 목적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 역시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 앞에서 회복되면(되어야) 범사에 감사하는 존재가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또한 감사의 본질적 대상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사람이 웬만하면 태어나기를 잘 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물론 돈이 넘쳐나서 자기 맘대로 할 수 있고, 세상의 재밌는 것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조건을 갖추기만 하면 어떤 사람이라도 다 감사하고 태어나길 잘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기에 그것이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정체성을 회복한 사람은 그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범사가 어떠하든지 다 감사하게 되고, 태어나지 않음 보다 태어나서 한 평생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삶이 된 삶을 살았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삶이 주어졌기에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아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이론이나 환상적인 일이 아니다. 사람이 그럴 수 없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헛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존재가 되게 하셨는데 감사함은 없고, 그저 이 험한 세상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객관적인 사실로 믿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위로를 삼으려 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헛된 것이 되는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뜻을 제대로 알면 이 인생은 정말로 감사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도와 믿음의 선진들이 간증으로 증거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에 이르지 않고, 지금은 괴롭지만 죽어서 천국갈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아들 시험에 붙게 해 주셔서 감사한 것이 감사의 전부로 하는 것은 본질도 하나님의 뜻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사를 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모든 삶의 동력으로 감사가 없다면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간에 권면하신 성경의 어떤 말씀도 이루어지지 않을 수밖에 없다. 존재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즉 유리잔으로 망치질 하는 것과 같이 존재와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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