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3:18-25 남편과 아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2. 12. 22:02 Writer : 김홍덕

남자와 여자



바울 사도는 남편과 아내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다. 남편은 (성)씨를 가진 사람이다. 전통적으로 인류는 대부분의 경우 남자의 성씨를 아이들에게 부여하고, 서양에서는 결혼과 동시에 여자들의 성씨 또한 남편의 성을 따라가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이러한 모양을 취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결혼과 또 남자와 여자라는 관계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생각이 남자와 여자, 그리고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녹아 있고, 또 그것을 통하여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늘 아버지로 곧 남자로 기록되었고, 또한 예수님도 육신으로 세상에 오실 때에 남자라는 성별을 가지고 오셨다. 성경에서는 아버지 하나님, 또한 신랑 되신 예수님, 그리고 씨 뿌리시는 농부로서의 하나님과 같은 말씀들이 많이 있는데, 이것은 농부가 땅에 씨를 뿌려서 농부가 얻고자 하는 소산을 얻는 농사의 법과, 남녀가 결혼하여 남자 가문의 자손을 얻는 것과 같은 것이, 하나님의 의가 사람을 통하여 표현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표현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다. 흙에 씨가 뿌려져서 나무가 되고 열매가 되면 그 열매를 씨앗의 이름을 따고 그 생명이 되듯,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서 새 생명이 되어 거듭난 생명이 되면 그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또한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는 육신으로 여자인 사람이 자신의 성씨 곧 자신의 생명과 다른 생명을 낳는 것과 같은 법이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의 의와 뜻이 흙으로 지어진 육신으로 표현된 분이시라는 것 역시 그렇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남자, 남편은 하나님의 의와 뜻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여자는 남자의 씨를 받아 새 생명을 잉태하고 낳듯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생명을 낼 수 있는, 아니 내어야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서는 여자와 같은 것이다. 이는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서 신부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는 밭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얼핏 보면 남성 우월적 가치관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여자와 아이는 사람 세는 숫자에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그런 생각이 성경 전반에 흐르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육신으로 여자를 무시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라는 관계로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생각을 설명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도 모르면서 남자로서 우월하고 여자는 복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무슨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지도 모르면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가치관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또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씨 곧 말씀을 가진 사람이 남성의 격을 가진 사람이니 육신으로 남녀의 구분 없이 모든 것을 말씀의 계시가 밝은 사람을 기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영지주의 사상에 가깝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남자로 나게 하신 이유가 있고, 또한 여자로 나게 하신 이유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으로 남자로 나게 하셨다면 남자라는 육신을 가지고 표현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고, 여자로 나게 하신 것은 또한 여자라는 육신으로 표현하고자 하시는 것이 있기 때문인데 사람이 그것을 송두리째 무시할 레벨은 아니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복종하라



어떤 일에든지 원리와 뜻을 아는 사람이 있다. 하다못해 운전 하나만 하더라도 여러 명이 모이면 운전을 더 안전하고 잘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누가 운전해도 되는 상황이고 차라면 가급적 그 사람이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바로 그런 것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은 단순히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무조건 복종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어떤 일에 있어 더 나은 의를 가지고 있거나, 또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게 맡기라는 것이다. 맡기라는 것은 결과가 어떠하든 순종할 수 있는 마음으로 맡기라는 것이다. 그것이 복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 골로새서를 읽고서 남편에게 복종해야지 한다고 복종될 것 같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해 봤자 겨우 몇 번 하다 바로 복종은커녕 싸움이 되기 일쑤다. 즉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신의 남편이 되고, 또한 자신의 삶의 내용과 본질이 되지 않은 사람은 그 육신이 남자든 여자든 간에 자신보다 더 나은 것을 하는 사람 앞에 복종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행여 한다면 그건 어떤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본성이 그런 것은 아니다. 그 본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생명에게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생명이 된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남편에게 복종도 할 수 없고, 뒤 이어 나오는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않는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건 훈련이나 의지로 되는 세계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느냐 아니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과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에게 사람의 정체성과 본질을 알려주는 것이듯, 어떤 의가 없는 사람, 어떤 일에 있어서 잘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 의와 일의 본질을 알게 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먼저는 알지 못하는 괴로운 상태로 두지 말라는 것이고, 알지 못함을 인하여 놀리거나 심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에 있어 원리와 뿌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의 의와 뜻이 인생의 본질이고 의미라는 것을 모르는 괴로움을 방치하지 말고 또한 그것을 모른다고 무시하고 외면하고 심판하지 말라는 것이 바로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의 본질은 하나님의 의에 관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있는 남편, 곧 생명의 말씀인 씨를 가진 사람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 아내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을 낳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남을 전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복종이라는 것은 반드시 속마음과 복종하는 것이 일치할 때 복종인 것이다. 속은 복종하고 싶지 않은데 절치부심하듯, 아니면 어떤 목적을 위해서 복종하는 것은 복종이 아니라 거짓일 뿐이다. 그러므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육신이 여자라는 이유로 복종하는 것은 할 수도 없고, 설사 그렇게 하는 듯해도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복종은 아니다.


이 복종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땅은 어떤 경우도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 땅이 가물다는 이유로 하늘의 비를 부를 수 없는 것이다. 비는 그냥 하늘이 내리는 것이다. 땅이 춥다고 자기 맘대로 봄을 부를 수 없는 것이다. 땅은 언제나 하늘에 종속된 상태로 대기하는 것이다. 하늘이 바뀌면 비가 오고 땅은 젖고, 하늘이 따뜻해져서 봄이 오면 땅에도 봄이 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도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뜻이 표현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어떤 일에든지 복종해야할 상황 앞에서 복종하는 사람이 된다. 어떤 순간 자신이 이 상황과 의 앞에 남편 앞의 아내와 같다는 것만 인지되면 어떤 상황이라도 복종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다.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또한 아내를 사랑하는 것 역시 같은 것이다. 자신이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인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이듯,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 그런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3장 12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자처럼"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하나님의 의요, 사람의 존재 목적이자 인생의 의미를 알게 하신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 의에 대하여 아내와 같은 이에게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생명을 낳게 할 수 있는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씀하시는 사랑 역시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본질은 하나님의 의요 인생의 본질을 알 수 있도록 아내와 같은 이를 위하여 수고하고 희생하며 헌신하는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이기에, 이 사랑을 전하려면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생의 본질을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이 인생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는 사람에게 늘 그것을 전하려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마음뿐만 아니라 그 사랑을 전함에 있어 그리스도께서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언제나 죄인이 됨으로 그 의를 전하는 사랑을 하게 된다. 그것이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니까.


사람들은 흔히 다른 사람들 보다 조금만 더 알고 잘하면 그것으로 우쭐대고 그것을 인정받기 원하고 그러려고 노력한다. 즉 자신이 아는 세계에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도 동일한 현상이 있다. 즉 하나님을 믿는 것에 앞선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고 심판하며 가르치고 뒷 담화를 하고 좋은 신앙 외의 것은 생선의 뼈를 바르듯 다 발라내려 한다. 그것이 바로 아내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 


아내를 괴롭게 한다는 것, 신앙 없음을 나무라고 사람 안에서 선한 것을 축출하려 하는 것은 선악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선과 악으로 나누고 선을 추구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라고 하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더 안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이 하나님 알지 못하는 것을 비난하고 외면하고 심판하는 것은 아내를 사랑할 수 없고 괴롭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며, 선악과의 기준으로 사람을 보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므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더 밝은 사람이 죄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밝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르고 모욕한다고 죽임을 당하심이 사람을 향한 최고의 사랑이 아니었던가? 그 사랑은 아내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보여주는 남편이 희생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계가 온전히 이루어진 관계가 바로 남편과 아내, 곧 하나님의 의를 아는 사람과 그 의를 통하여 다시 하나님의 의가 삶이 되는 거듭난 인생으로 사는 삶이 되어 또 다시 아내를 위하여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고 사랑하는 삶을 사는 관계, 그것이 바로 남편과 아내의 관계이다. 그리고 이 법을 아는 사람은 육신으로 남편과 아내이든 다른 어떤 사람과 세상의 일에 있어서도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다. 본성과 생명이 그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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