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오는 많은 가르침들, 특히 사람의 관계에 관한 말씀들은 행동강령이 아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어떤 조건에 관한 것이나 의무가 아니다. 그런 모든 말씀은 다 생명을 가지고 있으면 표현되는 생명의 본성에 관한 것이다.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지침이나 의무가 아니라 열매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이라는 생명이 있으면 그 열매로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나오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뭔가 부족한 말이다.


바울 사도도 여러 성경에서 그런 말씀을 많이 하고 있다. 골로새서에서도 마찬가지로 부모와 자식과 남편과 아내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를 노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물론 이런 말씀도 다 어떤 생명의 열매이거나 그렇게 하는 이유와 원인 인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 없이 이것을 행동으로만 따라하는 것은 노릇이고 거짓된 것이다. 내용과 형식이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아들, 종과 상전과 같은 사람들의 관계들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온다. 이런 모든 것들은 그 관계 자체에 대한 도덕규범과 같은 의미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 모든 것은 전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상의 구조를 그렇게 만드시고 그 관계들을 이용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말씀시고, 또한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표현하는 대상이고 방법이고 육신이 되는 말씀의 실체들이다.


성경에서 남자 혹은 남편은 항상 하나님을 의미하고 여자는 사람을 의미하는 그런 관계다. 하나님이 아버지로 표현되는 것도 이것이지만 이것이 육신으로 남성에 대한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다. 육신으로 설사 여자라도 남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관계라면 그 역할은 반대가 되는 것이다. 즉 의와 뜻을 가진 존재가 남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를 가지고 남자들이 우월주의에 빠진다면 그것은 말씀을 문자대로 보는 율법저의가 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겠다고 생각한 유대인과 같은 생각의 세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또 반대로 육신으로 남녀라는 것은 그저 형식일 뿐 내용만 있으면 되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서, 여자가 먼저 말씀을 깨달았다고 모든 것에서 남자를 주관하는 것과 같이 사는 것은 영지주의적인 발상이고 실제로 그런 신앙은 영지주의라고 볼 수 있다.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그 이미지와 성품과 존재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시고 또한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또한 사람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 여러 가지 관계와 세상의 법칙과 사회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과 세상의 모든 것이라는 형식이 어우러져 하나님이 표현되는 법이 하나님의 법인 것이다.


이것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나온다. 즉 하나님의 의가 형식을 가진 사람과 세상의 만물로 표현되었을 때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하나님과 같은 능력 같은 권세를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의 초등학문적인 생각일 뿐 전혀 성경적이지도 않고, 그렇게 하나님과 같이 죌 인생도 신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의(義)와 실체들, 그러니까 내용과 형식이 하나 되어 온전해지는 것을 모른다. 그것은 전적으로 선악과의 영향이다. 선과 악을 가려내고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을 먹어 버린 가치관은 어떤 것이든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그 중에서 선이라고 생각되는 하나를 축출하고 그것에 매진하는 것이 신앙의 순수성이나 삶에 대한 열정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남녀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형식적인 면만 중요하게 보거나 아니면 형식은 버리고 의미만 보게 된다는 것이다. 형식만 보게 되면 남성우월주의가 되고, '왜 하나님이 아버지만 있냐? 어머니 하나님이라 하자'와 같은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되고, 반대로 육신으로 남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 의미만 알면 되니 말씀이 있으면 삶의 모든 것을 다 그의 뜻대로 따라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영지주의 신앙이 되는 것이다.


지금 시대에 여기서 말하는 영지주의적인 신앙은 대체로 이단이라는 사회적인 비난에 직면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육신의 기본적인 관계를 부정하고 종교에 몰입한 삶이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신앙이라는 세계 안에서 이 사회 속의 구조를 어떻게 수용하고 그것에 순종하고 그것에 죄인이 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은 신앙이라는 것이 전해져야 하는 것이고 전달 받을 곳은 신앙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세상은 복음을 그려내는 캔버스와 같은 것이고, 또한 어떤 면에서는 신앙의 평가를 받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해 가는 것은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내용들이 육신으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에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육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의미일 뿐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울 사도의 의도도 그것이 아니고 성경의 기본 골격도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남편들아, '아내들아', '자녀들아', 아비들아', '종들아' 이렇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관계에 관한 지체들에게 어떻게 하라는 것이 과연 골로새교회가 당면한 문제인 세상의 철학과 과학을 신앙에 가미하는 것과 어떤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땅의 것, 세상의 초등학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납하고 용서하지 않고 오히려 늘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사람이 과연 그 기준에 적합한지, 기준 이상인지를 늘 심판하는 법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기준으로 보면 골로새교회를 세운 에바브라 역시 철학과 과학에 관해서 그것이 있어야 더 좋은 신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비하여 부족했기 때문에 말씀 전하는 것에서 점점 밀려난 형국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고자 골로새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철학이나 과학은 세상의 초등학문이고, 그것에 의존하는 것은 땅에 속한 생각이며, 철학이나 과학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이어서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가진 사람들, 곧 그 속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아는 사람들의 실생활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설명함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좇는 신실한 성도들에게는 권면이 되고, 그렇지 않고 땅의 것을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심판이 되는 삶의 본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3장 후반부의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이 블로그를 통해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된 사람은 그 생명으로 인하여 살아가는 방향과 모양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면 속사람이 바뀌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믿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명이 있으면 어떻게 되고, 어떻게 사는지를 말하는 것이지, 성경대로 살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말씀하는 책이 아니다.


지금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남편과 아내, 아비와 자녀, 상전과 종과 같은 관계들에도 철학과 과학의 안목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하듯이 하면 그 관계가 온전할 수 없다. 특히나 이러한 사람들의 관계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는 모델이고, 형식이기에 이 형식에 빠지면 율법주의 남성우월주의 권위주의가 되고 또 막무가내로 형식을 무시하면 영지주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런 모든 관계는 잘 유지하기 어려운 것으로만 보이지만 바울 사도는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피차 서로 용납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 관계, 모든 가족관계와 사회관계에 동일한 하나님의 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용납하심은 사람이 자기가 가진 안목으로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에 따라 악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심판하는 본성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에 대하여 죄인이 되신 그러한 용납하심이다. 즉 세상의 가치기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못 박았던 그 기준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대할 때에 그 기준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그런 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용납하신 법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법이다.


그러면 모든 일이 잘못될 것 같아 보인다. 남편이 아내에게 주장하는 것이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할 때, 아내가 더 밝은 계시가 있어 그것이 하나님의 법과 달라 보인다고 생각이 되면 '그것이 아니라, 이러 이러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만약 그 앞에서 아내가 죄인이 된다면 분명히 보이는 하나님의 뜻이 무시되고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지만 그렇게 죄인이 될 때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승리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도 제자들이 볼 때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은커녕 죄인이 되어 심문 받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이고 나라고 다 망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 떠나 버린 것이다. 그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그렇게 예수님께서 죄인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이 육신으로 통하셔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이 표현되는 거룩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법을 모든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취하라는 것이다. 아니,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남편, 아내, 아비, 자녀, 종, 상전 누구 할 것 없이 그런 법으로 산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것은 이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시끄럽고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지 죄인이 되고 내가 잘못했고 내가 십자가를 지는 그런 사람으로 인해서 시끄럽고 갈등이 일어나는 법은 결단코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세상이 자기 맘대로 돌아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법을 벗어나서 절대로 되는 것이 없고, 특히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법과 성품과 사랑이 나타나는 것에 있어서는 절대로 예외가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고 하나님 만드신 세상인 것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나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나, 아비가 자녀를 또한 자녀가 아비를, 또 종과 상전 그 어떤 관계라도 한 쪽이 세상의 법과 기준으로 다른 이를 대할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죄인이 된다면 어떤 관계가 잘못될 수 있겠는가? 그런 법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가 그러한 법으로 살아간다면 그 관계 안에는 정말로 예수님과 같이 피차 서로 용납하고 설 용서하는 법이 그 관계의 기초가 되는데, 여기에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갈등과 분쟁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절대로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행위규범으로 받아서 사랑하려는 사람, 남편과 아내를 공경하고 사랑하려 노력하는 것과,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와 같이 서로 죄인이 되는 용납과 용서가 있는 것, 어느 것이 온전한지는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법이 주관하는 삶이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사는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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