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보는 두 가지 관점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을 표현할 존재로 지으시고 인생을 주신 것에 관한 두 가지 절대적인 관점이 있다. 하나는  이 인생이 부족하고 하나님 앞에 악한 행동을 많이 하므로 이 삶을 끊임없이 절제하고 고쳐야 한다는 관점과,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다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언뜻 보면 성선설과 성악설의 논쟁과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내용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을 어떻게 보는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님이 지으신 육신을 부정한 것으로 보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과 같이 보기에 심히 좋은 것으로 보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인생을 하나님과 같은 관점과 안목으로 보느냐? 아니면 사람이 정한 선과 악의 기준으로 심판의 대상으로서 인간의 육신이 가진 여러 가지 연약함을 보느냐? 하는 문제이다. 즉 하나님과 같이 생각하느냐? 아니면 하나님과는 반대로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한 기준으로 모든 것을 보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근간에 속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했는데,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그 육신을 부끄러워했다. 즉 하나님은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이 가려지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보기 좋은데, 선악과를 먹은 안목으로 보면 감추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다른 결과와 반응을 나타낸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 안목으로는 이 육신의 벗은 모습, 단순히 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연약함이 다 드러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이것을 절제하고 통제하여 그런 것이 보이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어떤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지켜 행하려는 가치관을 가지고서 그것을 지키려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십계명도 율법이고, 예수님의 말씀도 율법이다. 책을 읽을 때 행간을 읽지 않고 문자만 읽는 것과 같은 모양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구약과 신약은 시대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지 아닌지로 나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안목으로 볼 수 있는 생명이 있다면 십계명도 복음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고 이 육신의 연약함을 행함으로 감추려 하는 안목으로 성경을 보는 사람은 산상수훈도 율법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육신의 모든 것을 바꾸려 한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할 수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읽는 것이다. 즉 복음을 율법으로 읽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군복을 입으면 군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목적과 수단



반면에 하나님과 같은 안목으로 사람을 보는 가치관은 사람이 가진 연약함이든 어떤 것이라도 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렇게 주신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목적을 위하여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삶의 모양과 방법에 있어 어떤 것을 택하여도 무관하다. 하나님이 주신 목적만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의 어떤 것도 다 그것을 위하여 사용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때로는 겸손하고 때로는 과감하고 남 보기에 교만한 모습으로 사람에게 복음을 외치기도 하고, 어떤 것에는 한 없이 자비하나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러면 목적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냐?'라고 반문한다. 그런 질문은 한 마디로 목적을 위하여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해 보지도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실토하는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가장 잘 표현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마구 선택하신 분이신가? 그렇지 않다.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르는 베드로에게 '지금 당장이라도 하늘의 천군과 천사를 불러 군인들을 무찌를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겠느냐?' 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자신에 대하여 거짓 증언하는 이들에게 일언반구도 않고 오히려 자신이 죽을 수 있음에도 분명하게 선언해야 하는 것은 대답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하는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과 십자가의 도를 알고서 목적을 향해 가는 것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혼용하고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도 십자가도 모르고 시비를 거는 사람일 뿐이다.



사랑 받는 자와 같이 옷 입고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다. 그가 말하기를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다는 것에서 그것은 분명한 것이다. 즉 바울 사도는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것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그것은 단적으로 생명이 없거나 아직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외 없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신 안에 없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아주 분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겸손과 자비와 같은 것은 옷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수단이고 공로이기 때문이다. 옷은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지, 옷이 자신의 정체성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군복을 입고 있으면 군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거짓말 하는 것일 뿐이다.


군인은 군복을 입는다. 그것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사람, 하늘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은 그 생명에 맞게 옷을 입는다. 그 옷이 바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같은 것이다. 이런 모습을 잘 보여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뜻을 표현해야 했기 때문에 천군천사를 불러 로마 병정을 물리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가는 옷을 입으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십자가가 보여주는 인간 정체성의 표준이시기 때문인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군인이고 십자가는 군복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이다. 복음을 알면 율법적인 행위로 비치는 것들, 봉사와 헌신과 자비와 예의 바른 삶과 같은 것을 더 잘 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런 수고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든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자신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으로서 살고자 하는 그 생명으로 인하여 금하려 해도 그런 삶을 살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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