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왜 세상의 것이 교회 안에서 가미가 되면 안 되는 것인가? 흔히들 하는 말로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말도 있는데, 기왕이면 더 재력 있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 등용되면 좋은 것 아닌가 싶겠지만, 그것은 두 가지의 잘못된 점이 있다. 그 하나는 그렇게 된다면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교회를 누리기 힘든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것이 문제인데,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이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돈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역차별을 받는 것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만약에 그 사람이 그 가진 것에 대하여 전혀 의가 없고, 교회 안에서 신앙에 관해서 자신이 가진 재력에 상관없이 말씀을 들을 자리에서는 듣고, 또 가르칠 자리에서는 가르치는 자기 자리를 분명하게 아는 사람이라면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오히려 교회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볼 때 은혜롭게 받아서, 그 모습을 볼 때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돈과는 무관하구나!’라는 말을 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좋을 수도 있지만 기왕이면 돈 있는 사람이 좋다는 식의 사고방식이라면 돈 없는 사람은 외면 받는 복음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가난한 사람이 외면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변질 것이다.


이는 복음의 근간을 흔드는 중요한 문제이기에 이것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복음은 심각한 변질을 가져오게 된다. 얼마 전에 교황이 새로 취임하면서 교황이 끼는 어부의 반지를 금으로 하지 않고 금도금으로 한다면 청렴한 교황인 듯 기사가 났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게 아니다. 교황이 왜 금반지를 끼는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그것이 문제이다. 교황이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이라면, 금반지를 끼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말라는 이야기다. 만약에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그 어부의 반지를 낄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반지를 금으로 하느냐? 아니면 금도금으로 하느냐? 가 문제가 아니라, 교황은 그 반지를 끼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여기는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만약에 교황이 자신이 가진 금반지든 아니면 금도금 반지든 상관없이 어부의 반지와 또 그가 입은 옷과 또 그가 기거하는 교황청과 같은 이런 모든 것을 다 버렸는데도 그 사람의 신앙이 모든 사람이 보기에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고백을 자아내는 사람이냐 하는 것이 교황의 정체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또 하나의 나라로 인정받는 교황청에 산다는 것은 분명히 세상적인인 대접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에 교황이라는 칭호와 교황청과 그의 예복과 금반지가 가미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 하나 없어도 교황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그래야 교황인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그런 것 하나도 없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교황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의 모든 큰 교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 교회의 건물이 없어도, 목사의 모든 학력을 다 버려도, 교회의 모든 재정이 하나도 없어져도 교회고 목사여야 비로소 교회고 목사인 것이다. 그 바탕에서 다만 예배의 편리를 위해서 필요한 것만 능력 되는대로 갖추어 가면 된다. 그리고 그마저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어야 교회이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음향시설이 있었던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큰 교회들은 좋은 음향시설이 있어야 좋은 예배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지금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경계하는 교회의 변질인 것인데, 지금의 큰 교회들은 그것이 아예 습관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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