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생명에 관한 말씀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렇듯 성경의 모든 것이 다 생명의 말씀이라면 모든 표현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에 비하여 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성경을 생명의 말씀으로 보지 않으면 방향이 역행하게 된다. 


무슨 말이냐 하면, 모든 생명은 안에서 밖으로 자라고 성장하지만, 생명이 아닌 가공과 율법의 세계는 밖에서 안으로 만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령의 9가지 열매(갈 5장)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에 대하여 보통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열매를 맺어가야 합니다"라던가 아니면 아예 "이러한 9가지 열매를 맺기 위하여 노력하고 힘써야 합니다."라고…… 이런 설교나 권면은 생명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이다. 





정말 생명에 대하여 안다면, "당신은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십시오. 그러면 성령이 9가지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기 때문이다. 9가지 열매는 사실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오히려 성령만 있으면 자동으로 맺히는 것이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듯 말이다.


골로새서 2장 6절과 7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러한 생명의 세계의 관점에서 말씀을 이어가고 있다. 바울 사도는 

너희가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2:6)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안에서’라는 말씀은 어떤 공간이나 조직 안에 있으라는 말씀이 아니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 있으면 주 안에 있다고 여긴다거나, 아니면 교회에 등록되어 있으면 주 안에 있다는 말씀이 아니다. 또한 그 안에서 행한다는 것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니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행동 규범에 관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에서>라는 것은 어떤 세계 안에서라는 말씀이다. 즉, 똥개든 세퍼트던 삽살이던 진돗개든 어떤 것이 되었던 다 <개> 안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모양이나 형태가 어떠하던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있는 것이고, 그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관한 말씀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면서 사는 존재가 아들이요, 아버지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생명의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보이신 모습이다. 그 모습은 정말로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 생명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하나님은 살리실 수밖에 없는 생명의 정체성인 것이다.


십자가의 대속은 그저 차비를 대신 내어주듯,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죄를 받으신 것 같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모습을 볼 때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심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고, 그 뜻으로 인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이 발견될 때에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 생명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듯, 우리도 그 분과 같이 그리스도의 직임을 감당하게 사는 것이고, 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었듯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이 내 모습이라면 그렇게 억울한 죽음도 없는 모습인데 그것을 보고 감사함이 나오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것은 형식만 볼 때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모습은 형식에 관하여 죄인 되심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죄목은 신성모독과 반역죄이다. 그것은 유대인이 종교적인 형식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의 모습은 죄인의 모습이었고, 또 로마의 법이라는 형식으로 볼 때 예수님의 모습이 죄인이 되신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세계 안에 있으면 감사함이 넘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운전할 때 눈앞에서 벌어지는 끼어들기 하나 앞에서도 감사할 수 없는데, 이 억울한 환경 안에서 내가 발견될 때 감사함이 넘쳐난다는 것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세상의 것에 관하여 옳다 그러다 하는 마음이 없이 오직 그 앞에 닥친 일이 무엇이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면 감당해가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기에 그 안에 감사함이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세상의 일에 대하여 많은 불만과 또 하나님께 그런 것을 고쳐 달라고 기도한다. 못 마땅하고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냥 받아가셨다. 예수님께서 그러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 안에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주장하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죽음이라도 순종하시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살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운영하시는 세상에 불만을 가지고 이것을 고쳐 달라 저것을 없애 달라 새로운 것을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이고, 그 안에서 행한다면 무엇이라도 감사하게 되는 마음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피조물의 하나로 살아가면서 이 세상의 어떤 것을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월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불온전하게 만드셨으니 책임지라고 우기고 따지는 처사이니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무엇이 선한지, 즉 무엇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마음이 없으며 세상을 감사함으로 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은 자기 안에서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는 것이고, 그것은 아직 선악과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알게 하심에 있다. 우리가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고 자신을 포함한 사람을 정죄하고 또 율법을 지키는 것과 같은 행함으로 구원을 얻어야 하는 것으로 알아 수고하는 자기 자리가 아닌 삶을 떠나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 안으로 들어가게 하시기에 감사한 것이다.


이룬 오리새끼가 하늘을 나는 백조를 보고 자신이 백조인 것을 알고 날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감사하겠는가? 아마 백조였던 미운 오리새끼에게 자신이 백조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 이상 감사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미운 오리새끼가 자신이 백조인 것을 아는 순간 먹는 것 입는 것 심지어 하늘을 나는 것까지 모든 것이 자신에게 감사함으로 다가오지 않겠는가?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보고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 저주스럽던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가 되는 것 같은 그런 축복을 받는 것이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돈 필요할 때 복권이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감사이고 다른 세계이고 다른 안목이다. 우리의 감사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함이 넘치게 되는 것은 정체성이 회복되고 나면 그 정체성으로 살면 살수록 감사함이 넘치게 되는 것을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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