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는 어떤 면에서 보면 지금 간절한 상황에서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 간절함을 자기의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들도 알기를 원한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왜 그래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지금 이 골로새서를 기록한 배경이 있다고 말해왔다. 


이 골로새서를 기록한 이유는 그를 통하여 말씀을 들은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를 세웠고, 그 안에서 복음을 전해가는 중에, 당시 골로새가 속한 아시아 지역에서 발전한 철학과 과학에 대하여 박식한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왔고, 교회 안에서 그런 사람들의 박식함이 보기에 좋아서, 복음과 함께 세상적인인 지식이 더해진 사람이 더 중용되어야 한다는 생각들이 들어왔고, 또 한편으로는 초대교회 시절 골치 아팠던 영지주의와 같은 사상들이 또한 교회로 들어오려 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하여 경계하기 위하여 에바브라가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을 찾았고, 그 소식을 들은 바울 사도가 이렇게 편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사실 지금 이 시대의 교회에도 심각한 문제이다. 지금의 큰 교회들도 교회 안에서 그 사람의 신앙 고백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형식이자 사회적인 신분과 능력과 재력 등이 교회 안에서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세상에서 성공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기독교가 세상에서의 부와 명예를 위한 종교로 전락해가고 있다는 신호이자 변질의 현상이다. 그리고 그런 현장으로 인하여 교회는 더 좋은 건축 자재와 방송시설로 지어지고 꾸며지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명분이 하나님께 사용되는 물건이니 더 좋은 것일수록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논리에 기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하는 점이다. 이건 어떻게 보면 아주 간단한 대답이다. 그런 교회의 생각과 흐름에 기여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믿기 어려운 예수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가 사회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독교’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에 오라는 권유를 받을 때 생각해보게 된다. ‘십일조를 잘 낼 수 있을까?’, ‘술, 담배를 끊을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하고, 또 ‘교회가 말하는 그 도덕적 기준을 내가 지킬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잘 살지도 못하는데 내가 가서 그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등등의 생각을 한다. 그리고는 이내 포기하게 된다. 


그러다가 교회가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키거나 하면 그 사람들의 마음에는 심각한 배신감이 든다. 자신들은 교회가 요구하는 도덕성에 미치지 못할 것 같아서 다니는 것을 포기했는데, 그것을 배신했으니 오죽하겠는가? 그렇듯, 오늘날 교회가 사람들로 점점 외면 받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들만의 교회>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시각과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교회가 가고 있는 방향은 누가 봐도 아무나 믿을 수 있는 예수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가면 사회적인 신분이 높은 사람이 더 대우 받는다는 것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복귀하는 소망교회의 모습만 봐도 자명한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사회에서는 대통령을 했다 해도 교회에서는 그저 한 교인일 뿐이고, 오히려 교회에서는 그 신앙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인정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모습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 안에 이미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 


이러한 모든 현상이 왜 일어났는가 하면, 교회가 세상적인인 가치관을 교회 안에서 용납하고, 더 나아가서 그것이 중요한 가치관이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바울 사도는 바로 지금 우리 시대의 교회가 가진 이 모습을 경계하였기 때문에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이 말씀을 전한 에바브라의 초라한 사회적인 역량을 보고 무시하고, 오히려 세상적인인 지식과 철학이 있는 사람들을 등용하는 것을 심히 경계한 것이다. 바로 교회가 오늘날의 모습과 같이 되는 것을 막기 외해서 그렇게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사도 바울 사도는 그 당시로 보면 최고의 사회 계층에 속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최고의 석학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고, 또 비단 그 뿐 아니라 이 복음 안에서도 죽은 사람도 살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그 어떤 조건도 예수 믿는 것에 아니 예수를 잘 믿는 조건이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오히려 그런 것을 자랑하는 자들 앞에서 ‘부득불’이라는 전제하에 그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말하기 위하여 자신의 어떠함을 말했을 뿐, 그 어느 순간에도 바울 사도가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을 예수 믿는 조건으로, 또는 예수 잘 믿는 조건으로 제시한 적이 없고 남들이 가지지 못한 자신의 어떠함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말한 적도 없다.


그것이 바로 2장 2절에 나오는 원만한 이해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와 또 오늘 우리에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어떤 지식이나, 또 어떤 신분이나, 공로나 소유의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이 더 된다고 하는 그런 모든 변질된 생각을 멀리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모든 것이라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요 지식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잘 지키는 것이 바로 굳은 믿음이고, 또 그러한 모습이 있을 때 1장 22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사회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을 흠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런 것이 있는 육신을 부인하는 것을 사도들이 더 경계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것이 더해질수록 신앙이 좋다고 여기는 모든 말을 공교한 말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에 속지 않기를 권면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큰 교회들은 이미 그것에 꾀였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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