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그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이 오늘날 우리에게, 또 당시 골로새교인들에게 구원이 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이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대속했으니, 그것을 사실로 믿어라 그러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왜 그런 구조가 성립이 되는지에 대하여 설명을 하지 못한다면, 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과 또한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과, 그 이유가 우리 때문이기에 당신이 믿어야 한다.”라고 전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해 왔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2,000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거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서 죽은 한 사람의 명분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에 대하여 이 시대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다음 카드가 늘, “안 보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게 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실존 사실과 행적과 기적의 실존을 객관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그건 정말로 남의 나라 신화를 믿는 것과 같은 것일 뿐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기록해 놓은 것은, 그것을 볼 때 나와 상관이 있는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안 되기 때문에 도올 김영옥 교수 같은 사람이 기독교는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다.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알아냈다. 그것이 서양의 발견이라고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왜 그런가? 그건 그 만유인력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데 나와 상관있는 물리적 법칙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도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 때, 나에게 구원이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명백한 관점에서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골로새의 교인들과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것에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들을 때에 나 자신과 상관있는 이야기, 그리고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이야기로 발견되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어떻게? 그 십자가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였다는 것인가? 그것이 중요한 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자기와 화목하게 한다고 했다. 먼저는 우리가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있었다고 했는데, 우리가 멀리 떠난 기원은 당연히 아담의 선악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 선악과는 악과가 아니다. 즉 선하고 악한 것을 한꺼번에 먹었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사람이 그 마음 안에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을 ‘선악과’를 먹은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기 전의 아담은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에는 자신의 모습이 잘 못되었다고 생각해서 숨은 것이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도 벗고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이렇듯 사람이 그 마음 안에서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하다고 여기면서부터 가장 심판을 받은 것이 어쩌면 인간의 육신이다. 즉 육신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도 떨쳐 버리려 했고, 육신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욕망도 정죄를 받아 늘 억제를 당해야만 했다. 그것이 옳은 것이라 생각했다면 그럴 이유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육신으로 만들어 놓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하셨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난 이후에 육신의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육신을 보는 안목이 달라진 것이다.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한 것이라고 보는 안목이 생긴 것이다.


아담이 그렇게 타락했다면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으로 인한 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즉 그것은 세상의 어떤 것을 깨끗하게 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세상에 있는 것을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물로 보게 하도록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거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악하게 정죄하는 세상의 부정적인 모든 요소와 선한 것, 그 모두가 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라는 것을 믿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피조물이 바로 <인간>인 것이다.


유대인이나 또한 모든 종교나 철학들이 사람의 육신으로 오는 욕망과 연약함을 부인하고 이기려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 방법이 어떠하던 간에 그 모든 출발은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것에서 출발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인간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그 육신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것이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친히 육신으로 오신 것이고, 또한 그 육신의 가장 연약한 모습이자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심은 인간의 모습이 아무리 추해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이시고자 하심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책망할 것이 없다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책망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도 책망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책망할 것이 없다고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여기시는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것이기 책망할 것이 없는 것이라는 의미인데, 그런 온전한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거룩함이 바로 그것이다. 거룩함은 구별된다는 의미이다. 즉 예수님이 구별이 된다는 것이다. 즉 세상과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른 것은 세상 사람들이 사람의 육신을 늘 부정하게 여기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육신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하심으로 십자가에 달리는 죄인이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러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형식으로 또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육신으로 표현된 아들로 살아가기 위한 존재이기에 더 없이 온전한 존재인데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정한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볼 때 이 육신을 악하게 여기는 것과는 다른 분이셨기 때문이다.


철학이나 과학이 가미되면 더 좋은 신앙이라 여기는 것도 그것이 없으면 부족하다 여기기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모습 그대로는 부족하니 과학이나 철학으로 무장하면 더 나은 신앙, 더 나은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 바로 그런 생각들은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구분되시는 배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과는 다른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골로새 교회에 있었던 영지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철학을 중시하거나, 그런 것이 있으면 더 신앙이 좋은 것으로 보는 그 모든 시각은 십자가에서 사람이 부정하게 보는 모든 것을 화목제와 같이 드리신 예수님을 전하는 바울 사도의 신앙 안에서 볼 때 어림도 없는 것이었고, 그것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또 단호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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