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했다. ‘먼저 계셨다’라는 과거형이 아니라 ‘먼저 계시고’라 했다. 현재형, 즉 지금도 그런 분이라는 말씀이다. 또한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함은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 세계 안에서,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로서 의미를 가질 때, 비로소 서게 된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그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또한 그가 교회의 근본이라 말씀하신다. 이것은 오늘 날 이 시대의 큰 교회들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야 할 말씀이다. 머리라는 것은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외형적으로도 그 정체성을 나타낸다. 


모든 동물에게 있어 머리는 그 정체성의 백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교회의 정체성이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 뜻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예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는 신분은 3가지였다. 선지자, 왕, 그리고 제사장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의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이신 분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말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가 나오는 것을 고대하고 또한 그것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으로, 무엇에 관하여 왕이요 제사장이신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두신 하나님의 목적에 관하여 그러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며 사는 존재로 살게 하시기 위하여 만드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산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본성이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또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성육신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고, 예수님의 그러하심을 보고, “나도 그런 존재이구나!” 이렇게 발견되는 사람마다 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고 예수님은 그 나라의 왕이요, 그렇게 구원하는 제사장이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셨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보이신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니, ‘그가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백부장이 하게 되었던 것 같이, 우리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내 모습이구나!' 인정되어지면 나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게 믿음인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고, 수용하는 것이지, 신념을 가지고 “믿습니다!!” 외치면서 믿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무엇인가? 우선 십자가는 누가 달리는 곳인가? 그곳은 죄인이 달리는 죄인의 형틀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은 우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는데 어떤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되었는가? 그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법과 로마의 법에 의하여 죄인 되신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죄인이라 한 이유가 무엇인가? 초라한 꼴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기 때문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심문을 받으실 때에 다른 모든 것에는 답변하지 않으시다가, 단 두 가지 질문에만  답하셨다. 그것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는 유대인들의 질문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하는 빌라도의 질문 그 두 질문에만 답하셨다. 


사실 다른 질문들, 성전을 사흘 만에 짓겠다는 것과 같은 것은 당시 최고형인 십자가형을 받을 만한 일은 아닌데도 그런 것에는 답변하지 않으시고 하필 꼭 답변하면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질문에만 답을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이냐?” 물으실 때, “Yes!”라고 답하면 죽는다는 것을 아시면서 그렇게 하셨는가? 그 외에 다른 어떤 고발에도 답을 하시지 않던 예수님께서 말이다. 





그것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은 스스로도 부끄러워하고 감추고 싶어 하는 육신의 연약함, 발가벗겨지면 부끄럽고, 자기의 곤고함을 자신의 손과 발로 구원하지 못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머리로 해결할 수 없는 모든 사람은 다 예수님께 적용한 죄목으로 다 십자가에 발가벗겨져서 손과 발에 못 박히고 머리에 가시관이 씌워질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분이라는 말씀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들 삼으신 법이라면,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아가길 원하는 사람들의 정체성도 그러해야 한다. 


그렇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심판한 것이 ‘초라한 꼴에, 창녀와 세리와 어울리던 사람이 어디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느냐? 우리처럼 율법도 잘 지키고 해도 될까 말까 한데 말이야’ 라는 기준이었고, 그런 기준 아래에서는 죄인이 되신 것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교회가 지키라고 하는 모든 행위 규범들을 정말 솔직한 마음으로 진실 되게 예수를 믿는다면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을 안다는 것은 그 법아래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며,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죄인으로 인정이 될 것이다.


“왜 교회의 가르침을 못 지키느냐?”, “지금이 어디 율법의 시대냐?’할지 모르지만, 구약이던 신약이던 간에 행위 규범으로 받아 지켜야 할 것으로 받으면 성경의 어디가 되던 율법이요, 반대로 성경을 통해보니 내가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로구나 깨달아져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백하게 되면 복음이 되는 것이요, 그렇게 죽은 자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듯 살리셔서 행위 규범이 아니라, 생명의 법으로 살게 하시므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행동양식이 규범이나 규칙이 아니라, 생명의 본성이 되어 금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런데 오늘날 큰 교회들의 가르침은 모든 것을 Have to로 가르치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해야 한다’, ‘천국에서 잘 살려면 이래야 한다.'라고 가르친다. 그 가르침은 한마디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 종교적 규범인 기도와 말씀 그리고 예배와 봉사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엇을 하느냐?’를 먼저 보시는 분이 아니라, “너는 누구냐?” 하는 것을 보시는 분이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이시기에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의 존재가 무엇인지에 먼저 관심을 두시는 것이다. 그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고백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율법으로 죄인 되였듯, 나도 그렇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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