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5장에선 지금이라면 용납되지 못할 일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간음한 자가 교회에 버젓이 다니는 게 용납되는 일이다. 특히나 바울 사도가 책망하는 건 간음한 자들은 뉘우치지 않고, 교회는 세상 지식화한 복음으로 그들에게 면죄부를 준 일이다.

 

복음을 세상 지혜와 같은 법으로 대하면 생기는 문제가 있다. 복음은 문장으로 보면 행간에, 법률로 보면 법리에 본질이 있다. 반면 세상 지혜는 문장 구조와 맞춤법 혹은 화려한 구사를 지향한다. 법률은 암기와 응용, 활용이 능력이다. 이런 관점으로 복음을 다루면 결국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하는 게 복음적이란 결론에 도달하려 한다.

 

바울 사도가 책망하는 간음한 자를 교회에서 용납한 일이 그렇다. 명백한 죄인 간음을 용납하려면 기술적으로 복음을 이용해야 한다. 담배 피는 사람이 성경에 담배 피지 말란 말이 어딨느냐?는 식의 항변 기술이 있어야 한다. 이런 기술이나 개념은 복음을 세상 지혜로 조명하면 생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이런 어리석음은 교만함이라고 부연한다. 자신이 전한 복음에 없는 일을 의롭게 여긴다는 건 복음보다 자기들의 생각이 더 옳은 것이라 생각한다는 의미다. 간음한 자를 용납하는 명분을 생산하는 생각과 그 생각의 동력인 세상 지혜가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있다는 책망이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었다면 예수의 이름과 능력으로 이런 자들을 사탄에게 내어 주어 구원을 얻게 하할 것이란 다소 난해한 말씀을 이어간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오늘날도 이 말씀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이 바울 사도의 책망이 간음 자체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는 걸 알고서 보면 낫다. 지금 책망은 간음도 간음이지만 간음한 사람을 버젓이 수용하는 명분과 명분 생산의 동력인 세상 지혜다.

 

고린도전서는 줄곧 세상 지혜를 경계하라고 말씀한다. 바울 사도가 사탄에 내어 주라는 사람은 세상 지혜로 복음을 조명하여 자의적으로 복음을 해석하여 간음한 자를 용납하는 게 복음인 양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단에게 내어 준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이다. 그렇게 해야 교회에 온전한 구원이 있다는 말씀이다. 세상 지혜를 경계하라는 권면의 연장선 위에 있다.

 

바울 사도의 의도는 누룩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누룩은 아주 작지만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드는 것의 상징이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세상의 지혜, 세상 지혜로 복음을 조명하는 신앙, 이런 것들은 교회 안에 작은 부분이지만 누룩과 같다. 더욱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익숙해서 당연하게 받아진다. 그러나 이건 명백히 하나님 지혜에 반하는 것이다.

 

언제나 언급하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은 낮아질수록 영광이나 세상 지혜는 높아지는 걸 추구하고 인도한다. 이건 세상을 사는 사람에게 너무 익숙한 진리와 명분이다. 그래서 교회도 이걸 진리처럼 여긴다. 신학이란 세계 안에서 경쟁해서 이기고 높아진 사람이 더 큰 교회의 목사가 되는 법 그 하나가 교회가 세상 지혜라는 누룩으로 상했음을 증명한다.

 

바울 사도의 때에 고린도 교회는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는 자들을 용납했다.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그럴 수 있는 명분을 만들었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바로 이것을 책망한다. 그러나 이 간음한 자를 용납한 건 하나의 대표적 사례다. 교회가 너무나 많은 것을 세상 지혜에 의지하여 용납한다. 더 비싼 전자오르간을 설치하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된다는 생각으로 대변되는 수많은 누룩이 교회와 복음을 잠식했다. 바울 사도는 이 모든 것을 사탄에게 내어주고 구원을 얻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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