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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알려면(2)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7. 6. 10. 11:26 Writer : 김홍덕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보는 것’이라는 수많은 외침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하여 먼저 이야기 했었습니다. 그것은 그 가르침을 우리 자신이 따라할 수 있느냐는 것, 그 자리에 이를 수 있느냐의 것인데, 많은 수고와 노력 끝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내 모습 그대로 이를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관점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전반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예수님과 같아질 수 없다면 사실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그렇게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웅이라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영웅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되고자 함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이 성경을 바로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바로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을 보는 견해가 달라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좀 솔직해진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를 믿어 입고자 하는 은혜는 대부분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 중에서 우리 육신을 가진 인생 이상의 일을 사모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병원에서 고치지 못하는 병을 고쳐주셨으면 바라고, 또 때로는 가벼운 병이라도 병원에 가는 번거로움 대신에 기도 한 번 하면 쾌유케 되기를 바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도 살리셨지만 우리는 죽은 사람 살리는 것은 고사하고 기침도 참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이르는 자리가 그런 기적을 일으키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어야 합니다. 간혹 어떤 이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키기는 하나 그렇다고 우리가 그것을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기적이나 예수님의 기적은 기적이 목적이 아니라, 그 기적으로 설명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있으신 하나님께서 보이신 능력의 한 모습이지 그것이 우리가 이를 자리로 여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어서 보통의 사람들일 할 수 없는 일을 이루여 합니다. 피라미드의 조금 더 높은 곳에 이르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이르러서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에 왔다”고 간증하는 것이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고 여기기에 끊임없이 그것을 바랍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하는 것은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피라미드는 위로 갈수록 자리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는데 자신이 만든 사람의 능력을 모를 리 없습니다. 또한 능력이 부족해서 사람을 이 모양으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도 인정하지 않는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할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을 채우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보이셨지만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것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따라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면 세상에 좋은 신앙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 얼마 안 되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런 고생을 했다고 믿는 것이 예수 잘 믿는 것입니까? 바로 그런 기대와 생각으로 예수님을 믿으려하기 때문에 어떤 외침이 온전한 것인지 혼돈스럽기도 한 것입니다. 무엇이 더 자신의 기대를 채워줄 수 있느냐를 따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떤 주식을 살까 고민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은 우리 인생의 한계와 정체성입니다. 그것을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입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좇으려 하면 어떤 세상의 기준이 나타나서라도 죄인이 되게 하는 존재이나 그런 자신의 모습을 인정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아들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 모습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게 하실 계획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렇게 보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도 아리송하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자신의 기대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성경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싫어하는 이 연약함과 또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많은 부분에서 부정하게 보이는 우리의 정체성이 하나님께는 보기 좋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 모습 그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공부해서 우리의 이 모습으로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해 낼 수 있는 사람이 되려하기 때문에 성경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외침을 따라 갈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 고민을 해부하듯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로서 할 수 없는 것을 어떤 외침이 해 줄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위로 올라가는 것은 늘 어렵고, 또 높은 자리는 늘 모자라나 내려가는 것은 쉽고 또 언제나 거할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하여 ‘이것이 온전한 관점’이라는 외침이나 ‘이렇게 믿어야 온전한 것’이라는 외침이 제 아무리 많아도 우리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인정하지 않을 뿐.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의 삶과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이야기 할 때 온전한 것이라는 그 관점을 좇아간다면 절대로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주신대로 그 능력대로 하는데 무엇이 잘못되겠습니까? 그럴 리도 없겠지만 설사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그것은 사람의 책임은 아닙니다.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많은 관점들을 들어보면 우리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 마음의 욕심과 세상에서 이기려는 가치관으로 볼 때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는 그곳이 바로 온전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할 수 없지만 여기 와서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된다.’는 것은 그 ‘열심히’를 내가 할 수 있느냐와 또 ‘도달한 자리가 과연 낮은 자리인가?’를 생각해보면 온전한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이 따라 나설 때는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은 어디에 버리고 빌라도의 뜰에서 채찍질 당하는 모습을 볼 때, ‘저 예수는 또 누구인가?’ 근심했고 매 맞는 예수는 자신이 따라온 예수가 아니기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따라 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기대한대로 세상의 임금이 된 예수님의 좌우에 앉은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회피할 기적을 일으키며 지금까지 살고 있는 제자도 없습니다. 그들도 다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서 살다 죽었습니다. 단지 그 육신으로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대로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대로. 


그런데 왜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겠다며 오히려 반대인 위로 가려하고, 이 육신 이상의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라 생각하면서 그것을 기대하고 그 기대를 채워줄 곳이 어떤 곳인지를 살피다 세월만 보내고 있을까요? 그러면서 정말로 어떤 외침이 하나님을 바로 알려주는 외침인지 알기 어렵다는 근심만 하고 있어야 할까요? 그것이 아니라면 이 글을 시작할 때 던진 두 가지 문제, <무엇이 제대로 된 외침인가?> 하는 것과 <따라나선 것이 진리임을 어떻게 알 것인가?> 중에서 첫 번째 의문은 해결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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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알려면(1)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7. 6. 9. 10:29 Writer : 김홍덕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알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알아가는 데는 크게 두 가지의 애로사항이 있습니다. 먼저는 ‘이것이 성경을 보는 진정한 관점’이라는 수많은 외침들 중에서 어떤 하나를 분별하여 길을 나서야 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따라나선 그 길이 진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알고자하는 마음도 있고, 알려주겠다는 외침도 많은데도 망설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하나님과 성경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결정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 이유를 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어쩌면 쉬울 수도 있지 않을까요?



불확실성은 사람으로 인한 것?


사람들은 확신할 수 있는 것을 따라나서려 합니다. 하나님이라면 분명히 사람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을 보이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하신 말씀과 계시를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도 그대로 보느냐는 것입니다. 


같은 하나도 각자의 안목과 생각대로 보는 것이 사람이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자신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의도대로 보는지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문제가 정리되어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사람이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하셨는지를 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성경은 분명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바로 선악과의 문제가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에 대하여 가지신 뜻과 아담(사람)이 가진 생각이 달라서 죄의 문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사람이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하신 반면, 같은 나무를 보고 아담과 하와는 보암직도 먹음직도 한 것으로 본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은 온전하다는 것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흐릿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정하는 것은 어쩌면 기본적인 가정일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최선을 다하여 말씀하셨지만 사람이 각자 생각과 기준이 다르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혼돈스러워진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 없이 많은 외침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견해’라는 많은 외침들 중에서 올바른 안목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아직도 세상이 망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테니 누군가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바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엇을 보고 이 불확실한 여정을 떠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문제인 무엇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본질인지에 대하여 하나님을 믿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불확실한 여정을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이 불확실한 여정을 떠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말 그대로 홍수와 같이 성경을 해석하는 말들이 많습니다. 노아의 홍수도 이와 같았습니다. 물 곧 말씀이 넘쳐났지만 그 물로 인하여 사람이 다 죽었습니다.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합쳐져서 넘쳐나는 물에 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법이 어우러진 ‘이것이 올바른 성경 해석’이라는 수많은 외침들에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을 선택할지 망설이다 세월 다 보내서 죽어가고, 또 가 봤더니 생명이 아니어서 죽어갑니다.


이런 혼돈을 이기려면 “빛”이 있어야 합니다. 빛이 비춰야 무엇이 무엇인지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빛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두고 요한 사도는 “빛이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빛인가? 그것은 사람들에게 무엇이 온전한 것인지를 구분하고 인식하게 하는 기준이시기 때문에 빛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 비추어서 바르고 같은 것이면 옳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가진 특징은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그것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이나 우리나 다 십자가에 매달리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기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성경을 아는 것이라는 수많은 외침들 중에서 무엇이 온전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인생이기만 하면 되는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연약하고 부정하게 보이는 이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인지를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면 외치는 외침들 중에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나도 그 기적 같은 현상은 만날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그건 적어도 오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런 기적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여 나도 그런 기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면 한 번 도전해 봐도 좋습니다. 그러면 기적을 만나던지 아니면 최소한 자신은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신학을 열심히 공부해서 외칩니다. 국내도 모자라서 미국이나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했다는 사람들이 풀어주는 성경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듣고 하나님을 그들과 같이 발견하려면 그 정도 공부는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그 또한 우리가 따라 나설 길은 아닌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따라나설 이유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그냥 배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한 것 보다 더한 것도 할 것’이라고 하셨고,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에게 배워서 그렇게 될 수 있다면 그 길도 옳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그 또한 얼마 따라가지 못할 것입니다.


가르치는 내용도 같은 관점으로 봐야 합니다. 새벽기도회까지 모든 예배와 모임에 열심이어야 온전히 알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곳에 가려면 자신의 생활패턴이나 마음이 그것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역시 가 봤자 한계만 느낄 것입니다. 


헌금해야 복을 받는다고 하는 곳이 있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 형편이라면 헌금은 그림의 떡입니다. 그런 곳도 역시 내가 따라갈 수 있느냐를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오늘> <나에게> 적합한 곳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가르침이나 해석이 아무리 난무해도 구분할 수 있는 아주 쉬운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을 가진 나 자신이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과 같이 될 수 있느냐는 것과 그 가르치는 것을 해 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그 길을 나서야 합니다. 그런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다면 그것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면,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과 같이 되기도 어렵고, 가르치는 내용대로 살 수도 없다면 갈 이유가 없습니다. 괜스레 인생을 드려서 시험에 들 뿐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도 구분을 할 수 없지는 않습니다. 그 상식으로 성경에 대한 해석의 소리를 듣고서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도 저거라면 할 수 있다!’고 느끼거나 아니거나 정도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만드신 이가 그 피조물의 능력을 아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사람이 할 수 없는 것,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해 내어야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도록 말씀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 정도는 믿어야 뭔가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역시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을 믿으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것,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을 우리가 할 수 없다면 그것도 믿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인정해야 성경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성경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따라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신 기적을 따라 할 수 없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것 중에서 기적을 일으키는 눈에 보이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한 본질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이해하는 첫 번째 관문, 수많은 성경에 대한 해석과 접근법과 외침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하는지에 대한 해답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이 육신을 가진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육신으로 또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나의 삶의 역량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라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호리라도 남김  없이 다 갚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갚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하신 목적의 빚을 다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다 이루어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알고자 하는 사람, 그래서 성경을 이해하고 묵상하고 성경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외침, 어떤 해석을 따라 가야할 것인지 불확실성 앞에 놓여 있다면 그 답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내가 가진 이 육신과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내 삶의 형편으로 따라 가서 나도 그 이상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그것입니다. 그 질문의 답이 가리키는 곳, 그곳이 바로 따라가야 할 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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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가끔 TV나 영화에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망이나 정글 때로 우주를 향해 가는 탐험가와 같은 사람들의 장면을 볼 때 그 용기에 찬사를 보내기도 하는데 하나님을 믿는 것 역시 그런 일입니다. 세상에 ‘이것이 하나님의 의’라며 외치는 소리가 넘쳐나는데 그 중에 어느 것을 ‘참 하나님’으로 구분하여 ‘나의 하나님’으로 섬길 것인가 하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것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미 구축된 기반 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냥 큰 교회에 다니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왠지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대할 때 마다 “좁은 문으로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머리를 지킵니다.


이렇듯 어떤 씨, 어떤 말씀이 참 생명이 있는 것인지를 알고 우리의 마음 밭에 받아들일지를 결정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성경에는 이 여정, 인생의 의미를 찾는 여정에 대하여 많은 사건이 있습니다. 그 시작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의 여정이 어떠했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그 말씀 하나에 의지하여 떠났습니다. 그 ‘내가 지시할 땅’이 어딘지는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지시할 땅, 사람이 흙으로 지음 받았기에 지시할 땅이란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 곧 인생의 운명과 의미인 자리를 말하는 것인데 그 자리가 어디인지 알지 못한 상태로 순종했기에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 땅이 어떤지 알지 못하는 광야나 정글로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여정을 그냥 떠났습니다. 어떤 땅으로 간다고 하는 것은 어떤 지명, 어떤 주소, 어떤 좌표와 같이 눈에 보이고 형식이 분명한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이 보이지 않는데 떠났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자기 육신의 안목으로는 이해되지 않고 믿을 수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으로 보니 별일 아닌 것 같지만, 우리가 세상에 넘쳐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외침들 속에서 분별해내는 것이 이것이라는 것을 알고 보면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형편이 이 ‘씨 뿌리는 비유‘에도 녹아 있습니다. 무엇이 생명이 있는 씨인지 어떻게 분별하여 알고 우리 마음 밭에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이 블로그를 보시는 분들의 마음도 그럴 것이라 생각됩니다. 컴퓨터를 또 스마트폰을 켜서 성경에 대한 의문을 찾다가 여기에 들리신 분들이 대부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이 비유는 좋은 밭에 뿌려진 씨가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누구라도 좋은 열매 맺는 좋은 밭이 되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좋은 밭인지를 따지기 보다는 무엇이 좋은 씨인지를 구분하는 것에 신경을 더 씁니다. ‘이것이 복음’이라는 수많은 외침 속에 어느 것이 좋은 씨인지를 알려고 하는데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마음, 그렇게 자신이 나서서 어느 것이 좋은 씨앗인지를 분별하려는 마음이 바로 길과 같은 땅이고, 돌밭이며, 가시밭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씨를 분별하느라 자기 정체성을 정하지 못하기도 하고, 돌과 같이 ‘이래야 복음이지’라는 자신 만의 법을 가지고 있기도 하며, 또 ‘어느 것이 복음인가?’를 따지는 염려로 세월을 다 보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기 정체성을 정하지도 않고, 자신 만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서 분별하려고 하고, 또 자기 자신이 망할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조심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 볼 것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런 것이 있었을까요? 그게 아니기에 믿음이고, 그 믿음을 보였기에 믿음의 조상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들 자기 기준과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좋은 씨를 분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 좋은 씨인지가 아니라, 자신 안에 하나님의 주권과 믿는 믿음이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하나님, 기드온에게 찾아온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 것인가 하는 문제로 수렴됩니다. 이는 누구나에게 어려운 문제이고, 이 포스트에서 배경으로 깔고 있는 좋은 씨를 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문제가 맴도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기준과 나를 사랑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에 있어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자신이 가진 의, 자신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기준입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선택하고 조성하지도 않은 자기 삶에 대한 애착입니다. 이 두 가지가 결국 사람으로 하여금 길에 있는 나그네와 같이 자기 정체성을 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좋은 밭은 길도 아니고 돌도 없고 가시넝쿨도 없는 밭입니다. 자기 기준도 없고, 자신을 사랑하므로 가진 염려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한 정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는 기준으로 조각한 우상이 아닌 온전한 하나님을 만난다면 그 마음은 당연히 좋은 밭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기준이나 자기 염려가 없는 밭이 좋은 밭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가진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의 정체성과 너무 다릅니다. 돌과 씨가 다른 만큼이나 다릅니다. 밭에는 돌이나 가시가 있든지 아니면 좋은 씨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하나님의 기준으로 바로 아는 것이 바로 좋은 밭과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람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을 알면 좋은 밭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기준이 가장 완전하게 나타난 존재가 있는데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바로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마음이 바로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밭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좋은 씨를 받아 들여야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돌짝밭이나 기시떨기가 있는 곳에는 씨가 떨어져도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마음에 한해서 좋은 열매를 맺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도 다 알지?”라고 하겠지만 그렇게 아는 것이 바로 돌밭에 뿌려진, 가시넝쿨에 떨어진 씨 정도로 아는 것입니다. 아는 것 같지만 그것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기준이 아주 엄격합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에 대한 기준이 아주 엄격합니다. 좋은 신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양이 있고 가난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닐 것 같지만 역설적으로 부자가 되고, 높은 공직에 오르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찮은 사람들이 전하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모르는 어두움 속에서 의지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목사라는 신분과 교회의 규모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시계추처럼 교회에 갔다 오는 자신의 습관과 관습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다 밭에 있는 돌과 가시나무일 뿐입니다. 그리스도가 그 속에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복음 곧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간단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인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가?”입니다. 예를 들어 부자가 되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하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내가 부자가 될 수 있느냐? 그리고 그렇게 될 때 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 넘쳐나는 생수가 나오느냐? 그것이면 됩니다. 이 두 가지만 만족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신학이나 교회 규모나 저명한 사람 같은 똥 같은 기준은 필요 없습니다. 그것이면 됩니다. 아무리 대단해본들 내가 못하는데 무슨 복음입니까? 그것을 이룬 사람에게는 복음이겠지만 나에게는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곳이 좋은 밭입니까? 나와 같은 사람, 세상의 기준에 의하여 승리자가 되어 부자가 되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또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지 않아도, 사람이 날 때 가지지 않은 기준 중에서 하나를 자신의 기준으로 돌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그렇게 되지 못해서 행여 못할까 염려하는 가시를 가진 마음이 좋은 밭이겠습니까? 


답은 간단한 것입니다. 그런 기준 없어도 우리 자신이 들을 때에 ‘나도 저것이라면 할 수 있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따라 나서고, 그렇게 나서서 가다보니 자기 안에서 그 말씀이 생명이 되어 생수가 넘쳐나는 것을 보게 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런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멸시받아 싫어 버리운 자” 같다고 했습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과 같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아무 가치 없어 보인다고 했습니다. 지금의 말로 바꾸면 신학자도 아니요, 목사도 아니요, 그렇다고 세상적으로 볼 때 경쟁력도 흠모할 만한 것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좋은 밭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있는 교회, 또 크게 지어지고 수천 명씩 모이는 교회에 다녀야 하고,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아야 하고, 또 사회적으로도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을 수 있거나, 다수의 여론에 합당한 사람이어야 하는 사람이 하는 성경 이야기라야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좋은 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살펴보면 돌밭의 돌과 같이 사람이 가진 자기 기준이라는 것이 모두 앞서 열거한 것 중의 어느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고, 가시와 같이 사람이 가진 염려라는 것이 또한 앞서 열거한 중에서 자신이 꿈꾸는데 되지 않을까 염려하거나, 아니면 그런 기준 앞에서 패배자와 죄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복음을 온전히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블로그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누누이 밝힌 바와 같이 목사도 장로도 쥐뿔도 아닙니다. 신학교는 소풍이나 놀러나 갔지 수업이라곤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또 교회에도 잘 가지 않고 오히려 신학도 하지 않는 주제에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예전엔 학업도 생업도 뒤로 하고 다녔지만)


그러나 이런 꼴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자기 잘난 맛에 글 쓰는 것과 같이 보이는 이 블로그의 글들은 사람이기만 하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세상의 기준에 위로 올라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지만 내려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사람들이 위로 가려는 마음과 눈을 가지고 있어서 가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블로그에서는 내려가면 보일 것이라고 늘 말합니다. 돌아서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낮은 방향으로 가셔서 그리스도가 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위로 가서, 또 세상의 기준을 만족해야 복음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런 생각으로는 좋은 밭이 될 수 없는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좋은 열매 맺는 좋은 밭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세상의 기준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나설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 그것으로 시작하고 그 시작 이후에 자신 안에서 확신하게 되는 것, 그것을 따라 나서야 좋은 밭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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