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2

요한복음 2장에는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적에 대하여 요한사도는 예수님의 첫 기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하여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얼마까지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자기 기준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는 예수님이 첫 기적을 일으키시므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보는 시각에 따라선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을 본 제자들이 예수님은 자기들이 바라는 것을 해결해 주실 분으로 믿었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즈음, 야고보의 어미가 두 아들이 세상 나라 이스라엘의 임금이 된 예수님의 좌우에 앉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 것이나, 예수님 잡히시는 날까지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로마에서 독립시키고 또 백성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실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던 베드로가 가졌던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본다면, 그렇게 민족의 독립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칼을 품고 다니고 세상 나라 이스라엘의 높은 신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었던 것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범주 안에 있는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물론 그런 믿음만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자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믿는 것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그 온전한 믿음으로의 여정에 속한 것이라는 말씀이기는 한 것입니다.


즉 신앙이라는 것은 큰물을 건너는 것이긴 하나 연결된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목적을 이루어줄 도깨비 방망이로 여기는 믿음은 온전하고 하나님이 뜻하신 목적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여정의 시작일 수 있고, 또 같은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순례자는 마치 서울행 기차가 달리는 경부선이라는 믿음의 여정에 놓인 열차와 같아서 부산이나 대구를 지나는 열차는 서울이라는 온전함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경부선 위에 있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경부선 위를 달리면 서울에 도착하게 되는 것처럼, 예수님의 신비한 기적을 보고 그 기적을 의지하려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온전한 믿음은 아니지만 그 믿음도 온전한 믿음으로 가는 여정 위에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자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믿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가나의 혼인잔치라는 사건 안에는 그런 뜻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이 그것입니다. 항아리에 채워지는 물은 아귀에 차기 전 까지는 포도주가 아닙니다. 그러나 포도주가 되지 않았다고, 아직 그 믿음이 온전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고 그것이 포도주가 아니라고 또 믿음이 아니라고 말하긴 어렵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큰 범주에서 보면 그것도 포도주고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어떤 목적, 어떤 시각이라도 예수를 믿는다고만 하면 포도주 곧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는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절대적인 조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가나 혼인잔치의 사건 안에서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순종한 종의 순종이 없었다면 포도주는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믿기 시작할 때는 다 자기 목적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그것은 온전한 믿음은 아니지만 가능성이란 측면에서는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믿음, 곧 그리스도의 정체성(포도주)을 표현해 낼 수 있기까지 말씀에 순종하므로 말씀을 항아리 곧 자기 자신에게 채우는 순종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포도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a christ)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고도 엠마오로 도망가듯 하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의 눈에는 처음 예수님의 기적,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그 기적을 보고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었던 마음, 오순절까지는 순전하지 않았던 그 믿음이지만 그 마음과 믿음의 여정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듯 한 과정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먼저는 예수님을 믿어 그 삶이 포도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삶이되기까지 말씀을 채우는 순종의 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그날까지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과, 사람은 누구나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므로 말씀을 전하는 사람,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은 그날까지 기다리고 그 믿음의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예수님의 첫 기적 가나 혼인잔치의 첫머리에 스치듯이 있는 말씀인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더라>는 말씀을 이야기 해 봤습니다. 다음 시간에 가나 혼인잔치에 대하여 더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Translation by Google)


(John 2) The wedding in Cana of Galilee - Faith in Jesus


John 2 tells the miracle that Jesus made wine with water. And about this miracle, the apostle John said that it was Jesus' first miracle. And because of this, the disciples wrote that they believed in Jesus. But until the time Jesus was crucified and resurrected, his disciples did not believe in Jesus entirely. I believed on my own standards. However, the apostle John says that his disciples believed in Jesus because he raised his first miracle.


This may be interpreted as the disciples who saw miracles of the Ghana and the marriage feast believe that Jesus was the one who would solve their wishes. By the time Jesus was crucified, the mother of James desired that the two sons be seated on the left and right side of Jesus, who became king of the world kingdom of Israel. But until Jesus was captured, Jesus politically separated Israel from Rome, It may be telling the faith that Peter had hoped to solve the problem of eating and living.


But, paradoxically, it was also a word of faith that believed in Jesus with the desire for independence of the nations, with a sword, and with the hope of becoming a high priest of the kingdom of the world, is in the category of faith in Jesus. Of course, that belief alone will not mean that Jesus came to this earth and believed in the perfect will of God toward man, but that it belongs to the journey of that whole faith.


In other words, faith is a long process of crossing a big thing, but a connected process. The belief that Jesus is the assailant for his purpose is not the whole purpose of God, but it can be the beginning and the process of the journey of fully believing in God.


A pilgrim of faith is like a train on a journey of faith that it is the Gyungbu-line where the train to Seoul runs, so that the train passing through Pusan ​​or Daegu is like being on the Gyeongbu-line although it does not reach the integrity of Seoul. As you arrive in Seoul when you run on the Gyeongbu-line, it is not perfect faith to see Jesus' mysterious miracle and to trust in the miracle, but faith in Jesus is on the way to perfect faith, Jesus Is to come to this earth and to believe in God's will for man.


The fact that this is the case of Ghana's marriage feast includes many such meanings. It is filling the jar with water. The water that is filled in the jar is not wine until it reaches the mouth. But it is not wine, it is not yet faithful, it is difficult to say that it is not wine and it is not faith. Rather, in a large category, it can also be called grape and faith.


However, it is not a one-sided belief that can express wine, the identity of Christ, for any purpose, any sight, if we believe in Jesus. There is an absolute condition, which is not different, but obeying the very Word. Even in the case of the Ghana marriage feast, the wine would not have been able to be found without the obedience of the servant who believed and obeyed Jesus.


Therefore, when everyone begins to meet and believe in Jesus, everything begins with his purpose. It is not perfect faith, but it is a complete faith in terms of possibility. And if it is true obedience to the Word until it can express faith, that is, the identity of Christ (wine), there is a obedience to fill the jar, even to yourself. That is when it becomes wine. To become a Christ.


There are many people who believe in Jesus. But even Jesus' disciples could say that they did not know about Jesus before Pentecost. It was the disciples who ran to Emmaus even after meeting the resurrected Jesus.


Nevertheless, in the eyes of the Apostle John who recorded the gospel of John, it was the miracle of Jesus first, the miracle of making wine with water, the disciples believed in Jesus, the faith that was not pure until Pentecost, but the journey of heart and faith filled the jar It was a process that seemed like a process. So I say that I believed in Jesus.


This is a big deal for us today. First, we need to know that there is a process of obedience that believes in Jesus and fulfills the Word until life becomes a life resembling wine, the character of Jesus Christ. Those who hear say that they must have obedience to that day, As we begin to believe in Jesus, we must think that the person who preaches the word, the person with the character of Christ, must wait until that day and acknowledge the possibility of that faith.



This time, I spoke to you about the words of Jesus, "The disciples believed in Jesus," the word that is at the beginning of the first miracle or marriage feast. Next time, let's take a closer look at the Ghanaian wedding banquet.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여사사 드보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사기 Date : 2017. 5. 9. 12:26 Writer : 김홍덕

‘에훗’이 왼손잡이 사사였다면 ‘드보라’는 여자 사사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서 이것을 보면 ‘그 시대에 여자가 사사가 되다니 놀랍군!’ 정도의 말들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그 시대는 여자는 사람 수로 계수도 하지 않을 때라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감각으로 짐작하는 것 보다는 훨씬 대단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왼손이나 여자나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에 사용하지 않는 표현들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을 부르실 때에 그 사람의 성정체성이 무엇이든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여자가 사사가 되었다는 것은 참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육신으로 여자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행위규범으로 보고,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안목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봅니다. ‘여자가 강대상에 올라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대부분의 종교에서 여자가 종교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하지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부르실 때에 아들이라고 부르셨다는 것은 육신으로 남자만 하나님의 의에 속할 수 있따는 것이 아니라, 남자든 여자든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다 아들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종교적인 문제도 아닙니다. 논리와 국어의 문제입니다. 또한 남자로 난 것이 무슨 특권인양 생각하는 것도 우습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남자나 혹은 여자가 된 것은 자신의 선택으로 된 것이 아닌데 그것을 권리처럼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남자로 태어나는데 자신이 한 게 뭐 있다고 그것을 가지고 차별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으로 남자만 의로운 것이 아니라, 남자든 여자든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부를 때에 아들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에훗’이라는 왼손 사사가 나오고 또 ‘드보라’라는 여자 사사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형식, 하나님의 의를 내용이라고 할 때 그것이 나타난 형식을 대변하는 정체성을 가진 여자 그리고 왼손(잡이)이 사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의가 형식으로 나타날 때 이방민족과 같은 마음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점도 분명하게 포함된 것입니다.


이 드보라는 ‘랍비돗’이라는 사람의 아내로 결혼한 사람입니다. 그 남편 이름인 랍비돗은 ‘번개’, ‘횃불’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함께 싸운 ‘바락’이라는 이름의 의미 역시 드보라의 남편인 랍비돗과 같은 혹은 비슷한 의미인 ‘번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니 ‘둘이 부부인가?’ 싶은 생각을 자아내게도 합니다만 성경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어쨌든 드보라는 결혼한 여자, 곧 남편의 의를 표현하는 짝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므로 가나안 족속 야빈이라는 왕이 쳐들어왔습니다. 그에게는 ‘시스라’라고 하는 군대 장관과 구백승의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이방족속이 쳐들어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지 않는 악함 가운데 있으면 강력한 이방인의 본성이 자신에게 들어오고 그것과 갈등하며 곤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것이지만 이는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므로 그 의와 생명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언제나 세상의 가치관을 좇게 되고(세상의 가치관을 좇는 것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그렇게 사는 삶은 늘 ‘좀 더, 좀 더’라는 욕심과 간절함으로 우리를 곤고하게 하고,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일과 씨름(이방족속과의 전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스스로는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기려면 사사, 곧 하나님의 의와 신이 임하는 사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와 뜻이 사람에게 임하면 그것이 사람의 삶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이방인의 본성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기려고 합니다. 마음을 먹고, 다짐을 하며, 잠을 참고, 먹을 것을 참으며, 자기 안에 있는 욕심을 억눌러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려 노력합니다. 즉 스스로의 힘으로 이방신을 이기려 하지만 절대로 그렇게는 이길 수 없습니다.


쳐들어오는 이방신, 이방인의 본성과 세상의 가치관을 이겨내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드보라는 바락에게 납달리와 스블론 지파 일만 명을 데리고 싸울 것을 명할 때에 ‘여호와가 야빈과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침략한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민족을 물리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우리 마음을 유혹하는 것은 여호와의 도우심이 있어야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여호와가 도우셔야 이긴다는 것은 아는데, 여호와의 도우심을 여호와의 방법으로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자신이 세상의 가치관을 이기기 위하여 노력하는 그 수고를 하나님께서 보시고 하나님께서 도우신다고 여기는가 하면, 자신이 신념을 북돋우는데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자신이 신념으로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호와의 하나님께 하나님을 위하여 공로를 쌓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자신의 행함을 도우시기 원하고 또 소유를 드리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위나 소유를 의로움으로 여기시는 분이 아닌데, 공로를 쌓고 소유를 드리는 마음을 부추기는 도움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행동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있으면 그 의가 그 사람의 삶으로 나타나도록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 알지 못하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정하신 그 존재의 의미를 사람에게 알게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인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다고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사가 이방인을 물리쳤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사사 드보라는 여자로서 이방의 침략을 이겨냈습니다. 원래 여자는 전쟁에 나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사사로 세우고 또 시스라라는 가나안 군대장관도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후손인 겐족속 헤벨의 아내 야헬의 손에 죽습니다. 드보라의 전쟁은 다 여자가 이긴 전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자가 이겼다는 것은 표현된 형식, 곧 사람의 행동이 이겼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서 바른 행실과 좋은 행동 양식을 가지기 원합니다. 몸이 기도하는 것을 잘 견디기 원하고, 잠을 참으며 기도하기 원하며, 육신이 죄를 범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위하여 마음을 그렇게 다잡아도 잘 되지 않기에 더더욱 그것을 원합니다. 그렇게 원하는 그 행함, 여자로 표현된 그 행함이 그렇게 되지 않던 이방의 본성을 이겨내었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이방인의 침략을 이겼다는 것은 사람의 행함이 세상적이지 않고 하나님의 법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김이 어떤 이김이냐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사가 된 여자의 이김이라는 것입니다. 여자 사사,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형식으로 행동으로 나타난 존재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 행동이 세상을 이긴 행동이기를 바라며 엄청난 신념과 노력으로 자기 행동을 제어하려고 하지만 늘 모자라고 실패하는데,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그 하나님의 신이 사람이 가진 육신의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바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여자 사사의 승리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지켜내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방식이 매우 이방인의 법을 좇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노력해서 자기 행동을 단속하려는 것이 바로 이방인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면 그것이 행동이라는 표현양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왼손잡이와 여자 사사를 세워서 승리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사는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듯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이고, 여자와 왼손은 의가 표현된 형식을 뜻하기에 하나님의 의가 행동으로 표현으로 나오는 것이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자기 행동을 단속하고 관리하여 성경을 지켜내는 것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자기 노력으로 자기 행동을 주관하여 성경을 지키는 것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악함이고,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족속의 본성이기 깨문입니다.



(Translation by Google)


Female judge Deborah


If 'Ehud' was a left-handed judge, Deborah is a female judge. Now, in this age, I see a lot of words like, 'Surprised that a woman becomes a judge in that age!' But in that era, it can be a lot worse than guessing in the present sense, considering that women are not counting as the number of people.


And the Bible is a phrase that does not use the left hand or the woman to do God's work or express God's righteousness. He is always saying, 'With my righteous right hand,' and when he calls a man with the life of God, he is saying, 'My son,' whatever his gender identity is. But it is amazing that a woman has become a judge.


But do not misunderstand this. In the flesh, a woman should not assume that she can not do God's work. Those who see the Bible as a code of conduct and have an eye to seeing what they see are like that. It is extremely rare for a woman to participate in religious rituals in most religions, even if she thinks that 'it is impossible for a woman to go up on the pulpit.'


But there is something to think about. When God called the people, he called them sons, not in the flesh but in the righteousness of God, but in the righteousness of God, both men and women, they all call the Son. This is not really a religious matter. It is a matter of logic and language. It is also funny to think what privilege you have as a man. It is not our own choice that our bodies become men or women, but we can not use them as rights. If you are born as a man, what you have done is to discriminate against it. In other words, man is not just right in the flesh, but man and woman, if he has the righteousness of God, he is the Son of God, and God calls His Son when He calls His people.


Interestingly, as mentioned above, there is a left hand judge named Ehud and a female judge named Deborah. In general, it is the form in which the righteousness of God appears in the Bible, the woman with the identity representing the form in which God's righteousness is expressed, and the left-handedness. It is also clear that it basically says that when you appear in the form of the righteousness of God, you can win the same mind as a foreign nation.


This Deborah was married to the wife of a man named Rabbi Doth. The name Rabbi Doth has the same meaning as 'lightning' and 'torch', but the unique meaning of 'Barak' means 'lightning' which is the same as Deborah's husband Rabbi Dod I do not have a direct reference to the Bible. Anyway, Deborah is a married woman, a pair that expresses her husband's righteousness.


And the children of Israel did evil before God, and the king of Jabin, the Canaanite, came in. He had the army secretary called "Sisera" and the iron bugger of the nine hundred pilgrims. It is that a pagan with a mighty military power has come into being. If the people who believe in God do not believe in God and are in the wickedness of God's God, the strong gentile nature will come in and conflict with them.


Repeated, but this is because if we do not live with the righteousness and life because God is in us, we will always follow the values ​​of the world (God does not follow the values ​​of the world) "We are made to suffer with our greed and eagerness, and to do worldly things and wrestle (war against the Gentiles) that are not our will. And it is something that you can never win by yourself. To win it, there must be a trial of Juda, the righteousness of God and the god.


It is the law of God that when the righteousness and the will of God come upon man, it is manifested in man's life. People try to overcome the nature of the Gentiles within themselves by their own efforts. I try to eat heart, to make a commitment, to sleep, to endure to eat, to suppress the greed in me, to live on the surface as if it is nothing. I try to beat the gods with my own strength, but I can never win it.


God's help is necessary to overcome the strange gods, the nature of the Gentiles and the values ​​of the world. Deborah says that Jehovah will give Jabin and Sisera to your hand when he commands Barak to fight with Naphtali and the Soblon tribes of ten thousand. The Lord God will defeat the foreign nations who serve the pagan gods who have invaded Israel. The value of the world tempts our hearts to win with Jehovah's help.


The problem is that people know that Jehovah helps him to win, but that he does not obey Jehovah's help in the way of Jehovah. It is God's help to see that he is trying to overcome the values ​​of the world, and that God is helping, and that he is helping God to help him to overcome his beliefs in helping his beliefs. I think.


I believe that it is in order to help Jehovah God in his efforts to earn good for God and to pray to Jehovah to pray for his own possession. But unfortunately it does not fit the identity of God. God is not one who takes action or possession as righteousness, but a person who builds merit and does not help to encourage ownership,


God's help does not help us do good in our service to God. God created man so that if the righteousness of God is in man, his righteousness will appear in his life. It means that God knows the meaning of self existence that man does not know for himself. Therefore, it is God's help to make people know the meaning of God's existence. In other words, it is said that the god of God has come. It is that the judge of the god of God defeated the Gentiles.


Sasa Deborah, as a woman, overcame the invasion of the Gentiles. The original woman does not go to war. And God made a woman a judge, and the captain of the army of Canaan, Sisera, died in the hand of Jair the wife of Heber, the descendant of Jethro, the captain of Moses. Deborah's war is a war that women have won.


A woman's victory is that the form of expression, human behavior, has won. Many people want to believe in God and have good behavior and good behavior. I want my body to withstand prayer, to sleep and pray, and not to sin. I want it even more because it does not work well when I hold my mind to it. The way that I want to do that, the act expressed as a woman, has overcome the nature of the Gentiles.


A woman's victory over the invasion of the Gentiles is that the deeds of man are not worldly, but are made to act in the law of God. What is the victory of this victory? It is the victory of a woman who has become the judge of the god of God. A woman's judge, it is a manifestation of God's righteous act.


Many people try to control their behavior with great conviction and effort, but they are always failing to do so, hoping that their actions are the actions of the world, and that the God of God will manifest itself as the act of the flesh This is explained by the victory of the woman who came to the god.


When we think about it, we do not know how many people are trying to protect God's Word. But unfortunately the method is very much in pursuit of the Gentiles. It is the way of the Gentiles to regulate their actions by working their minds and trying their best. It is not God's way.


God's way is that when the righteousness of God is life in man, it appears as an expression of action. You are saying that you have triumphed it with your left-handed and female judges. As the righteousness of God in man is the life of God, the righteousness of God is in the person, and the righteousness of woman and lefteousness is the expression of righteousness. It is to win over protecting the Bible. It is evil before God and the nature of the pagan god serving the pagan god.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성경과 민주주의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7. 5. 8. 10:38 Writer : 김홍덕

민주주의 국가에서 의사결정의 최종적인 방법은 <다수결>이라 할 수 있다. 다수결이란 말 그대로 하나의 일에 연관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의사 결정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수결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제도적으로 과반 혹은 2/3 이상의 의사를 선택하는 방식을 택한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많은 이들이 원하는 것을 전체의 뜻으로 수용하자는 것에 동의하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결정적인 단서가 있다. 다수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다수의 의견을 자신의 의견처럼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요원하고 힘의 논리에 의하여 달라질 수 있다. 군부의 쿠데타와 같은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볼까? 안타깝게도 성경은 민주주의 방식이 아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뜻’ 그것이 전부이다. 사람의 뜻이 무엇이든, 다수의 뜻이 무엇이든 아무런 가지치 조자 없다. 성경은 단지 하나님의 뜻이 전부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의 의사가 민족이나 나라나 교회나 모든 의사 결정을 한다. 그것이 성경의 관점이고, 성경의 정치라면 정치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이상하게도 민주주의 국가일수록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왕성하다는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가 국가 이념인 국가들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먼저 문명이 발달한 서방 국가들이 역사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국가의 종교로 삼았던 탓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정치적인 관점은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물론 아무 문제를 삼지 않아도 무관하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 가장 핵심적인 정치적 이슈는 절대군주 아니 절대 신권을 바탕으로 말씀하시는 성경을 신앙하는 사람에게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태도다. 민주주의라는 절대 이념에 의하여 결정된 의사나 제도가 자기가 가진 신앙과 맞지 않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어쩌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는지에 대한 것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절대자로서 믿으며, 하나님의 모든 행사에 대하여 순종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램프의 요정 지니와 같이 여기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순종하는 마음이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 민주주의나 성경에 나오는 절대 신권주의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요소가 하나 있는데, 결정된 것에 대한 사람의 태도이다. 민주주의 방식이 채택하고 있는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것은 이해관계자 전원이 동의한 것이 아닌 결정사항을 모든 이해관계자가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이 인정되려면 결정된 사항에 동의한 사람의 태도보다 동의하지 않았던 사람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 동의하지 않았던 사람이 어떤 부류이건 결정된 사항이 자기의 뜻인 양 살아가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시위가 일어나고 심지어 동의하지 않은 계층이 가진 힘의 정도가 크면 결정사항이 뒤집히거나 쿠데타와 같은 험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순종>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와 동일한 자세를 요구한다. 즉 민주주의 국가나 사회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공통적으로 순종이라는 자세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다시 말해본다면 순종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그 사회가 어떤 체제이든 갈등 없이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순종을 아는 사람은 민주주의 사회든 사회주의 사회든 군주 전제주의 사회든 무관한 삶을 살 수 있지만, 하나님께 순종되지 않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민주주의든, 사회주의든 무관하게 항상 불만을 가진 사람으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때로 자기가 속한 사회가 자기가 기대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기뻐하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이 가진 신앙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하나님께 자기 뜻을 받아주실 것을 기도하고 요구하고 또 사회적으로도 그런 뜻을 피력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회가 막무가내로 가고 있는데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니 방치해야 그것이 올바른 자세인가?’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나는 이런 질문들을 받을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순종하는 사람은 사회가 어떻게 되어도 방치하듯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야 말로 세상을 가징 온전하게 이끌어가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에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마음인 순종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보다 더 온전히 세상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하나님을 자신의 신으로 믿는다면 이 보다 더 나은 설명은 없는 것이다.


딴 이야기 같은 이야기를 해 보자. 정치 공약 중에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라는 것이 있다. 나는 그 문구를 볼 때마다 ‘정말로 차별 없는 세상이 될 수 있다고 저런 소리를 하는가?’라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차별이 없어지려면 사람이 자기 욕심을 버려야 한다. 욕심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차별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런 공약을 하는 사람 역시 자기 욕심을 분리하고서 정치판에 뛰어 든 것이 아닌데 그런 사람에 의해서 차별 없는 세상이 올 수는 없는 것이다. 


행여 자신은 원치 않는데 옹립된 지도자라면 또 모른다. 사람들이 한 사람을 옹립하는 것이라면 적어도 그 사람을 옹립하는 마음은 그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을 때 자신이 감수해야 할 손해도 감수하겠다는 의미니까. 하지만 지금 이 시대의 풍조와 같이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기생해서 자기 이익을 채우려는 사람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데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 방법은 없는 것이다.


왜 난데없이 차별 없는 세상을 이야기 했는가 하면, 순종하는 사람은 세상이 좀 더 나아지기 위하여 감수할 손해에 대해서도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종이 아니라 혁명과 혁신을 꿈꾸는 사람들은 손해 없이,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 없이 모두 차별이 없을 것이라는 허언을 한다. 그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다. 세상은 낮아져서 평등하게 될 수는 있어도 모두 높여서 평등하게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서로 너를 이겨 높은 곳으로 가는 것이 선함이고 의로움인 세상에서 모두를 높게 한다? 그런 꿈같은 소리는 말 그대로 공약(空約)이다.


순종하는 사람의 가치관이 민주주의에서 유용한 측면은 또 있다. 순종하는 사람은 자신이 다수의 의견과 같지 않을 때, 자신과 다른 다수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을 믿는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은 그것이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른 것이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른 정치가 이루어졌을 때 자신이 당하는 원치 않음에 순종할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이 없다면 민주주의에서 다수의 의견에 따라 결정된 의사는 때로는 한 부류의 이익과 기쁨을 주고, 또 때로는 그 반대 진영의 이익과 기쁨이 되는 것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순종의 가치를 모른다면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정치 풍조가 어떤 형태라도 자신이 그것에 순종하면서 살 마음이 없다면,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 부인하는 것이기에 민주주의 자격을 넘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 세상의 사람들의 주장 앞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것을 수용하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인데, 하나님의 의도 아닌 세상의 의가 자신과 다르다고 순종할 마음이 없고 신앙의 이름으로 항거하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세상은 절대로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에 의하여 바뀌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세상은 할아버지가 어렵게 모은 돈을 정신병을 앓고 있는 손자가 길에 뿌렸을 때 그 돈이 다 돌아오지 않자 그 돈이라 생각하라며 기탁한 사람, 노인이 파란 신호등이 켜져 있을 동안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자 위험을 무릎 쓰고 다시 가서 도운 교복 입은 학생, 아이 맡길 곳이 없어 동동거리는 이웃집 아이를 그냥 맡아주는 사람들에 의하여 바뀌는 것이지 정치가들에 의하여 바뀌지 않는 것이다.


자고로 세상은 “이렇게 되어야 온전한 세상이다.”라고 외치는 사람들로 인하여 시끄럽고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희생하지!’라는 사람으로 인해서 세상은 절대로 시끄럽게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보인 감동이 다른 사람을 움직인다. 스스로 감동해서 마음이 움직여서 행동하게 한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바람과 태양의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리를 아는 사람들이 바꾼다. 그들은 자기 세상이 바뀐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바뀌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속한 세상이 바뀌는 법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라고 하심 아닌가? 각 사람이 순종의 덕을 가지고 사는 것이 있을 때 비로소 신앙도 민주주의도 성경도 지켜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종을 알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도 논하지 말고 성경도 논하지 말며 정치도 논할 것이 아니다. 오늘 내 앞에 있는 귀찮은 일이 나의 일로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성경이나 민주주의나 정치는 다 간음과 도적질과 같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앞에 있는 귀찮은 일을 하는 것, 그게 쉬울 것 같은가? 세상에서 그게 가장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아무렇지 않게 외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집사의 뜰 > 복음 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을 알려면(2)  (0) 2017.06.10
성경을 알려면(1)  (0) 2017.06.09
사람을 믿는 것이 믿음  (0) 2017.05.04
성경이 어려운 이유  (0) 2017.05.02
세상을 바꾸려면  (0) 2017.04.04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