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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농부에게 씨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속 심령에서 열매가 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사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핵심적이 이유고 목적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목적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안에 받아서 그 말씀의 열매를 내는 것에 관한 것이고, 그 취지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 가짐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첫 포스팅에서 사람들이 이 말씀과 관련하여 <공평함>을 이야기하기도 한다는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왜 누구는 가시밭이고, 누구는 돌밭이며, 누구는 길과 같은 마음 밭을 가졌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냥 씨를 뿌리는 하나님께서 좋은 밭에 씨를 뿌리면 되는데 농부답지 않게 아무렇게나 씨를 뿌리니 돌밭이나 길가에 떨어진 것 아니냐는 시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앞선 몇 개의 포스팅을 통해서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이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나 사람들의 마음 밭에 따라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이 말씀은 정말로 공평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길과 같은 마음, 돌밭과 같은 마음, 가시떨기가 있는 밭과 같이, 자기 정체성이 불분명한 마음, 자기 의의 법이 마음에 많은 사람, 세상의 근심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열매를 잘 맺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 세 가지 밭은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씨를 받아 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씨를 받아 들이려면 그 정체성이 밭이라는 분명한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길’과 같은 마음은 정처가 없고, 돌과 가시떨기가 있는 곳은 하나님의 말씀인 씨가 들어가기 전에 이미 자기 안에 뭔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농부가 뿌리는 씨를 받아 들여 그 씨의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넘쳐납니다. 이 블로그도 물론 그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을 풀어내는 관점이나 가치관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아주 많은 성경에 대한 해석들이 있고, 설교도 넘쳐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설교 그 어떤 해석도 이미 자기 안에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 것이 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고 있다면 일단 그 말씀을 들을 때에는 그것을 수용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럴 값이 아니면 발의 먼지를 털고 나오면 됩니다. 그렇지 않고 그 마음에 자기의 생각을 두고, 읽고 듣는 말씀으로부터 자기 생각의 정당성을 찾는다거나, 아니면 옵션처럼 자기 말씀에 더하기를 한다거나 하는 마음으로는 온전한 열매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밭에 가시나 돌이 있는데 뒤에 뿌려지는 씨가 아무리 온전해도 온전한 열매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미 자기 마음에 어떤 것을 가지고서 새로운 것을 수용하려면 필연적으로 혼합되므로 어느 하나도 온전하게 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반인반수’와 같은 것을 온전하게 보지 않습니다. 다곤과 같이 머리는 물고기고 몸통은 사람인 것과 같은 신은 모두 이방신으로 나옵니다. 물론 그것 이전에 형상을 조각했다는 것만으로 우상이지만 하나님의 생명의 법은 온전히 하나의 생명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차든지 덥든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미리 그린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설교를 듣고, 또 성경을 풀어내는 책을 봅니다. 그리고는 자기 기준에 맞거나 또 자신이 잘 모르고 이해되지 않아도 그럴듯한 것을 수용합니다. 그것도 전부가 아닌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수용합니다. 그렇게 혼합이 되고, 또 혼합이 되어 모든 것이 엉망이 됩니다. 세상의 가치관도 그렇게 섞이는 것입니다.


노아의 때에 홍수가 날 때에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합하여 홍수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물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물은 말씀, 곧 사람이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는 것인데, 사람이 먹어서 해갈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궁창 아래 곧 세상의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취하자 하나님께서 홍수를 일으키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형식을 혼합하니 멸망당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어느 시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가치관을 섞으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한다면 일단 자기 의를 버리고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신이 듣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지를 고민합니다. 그래서 의심하느라 아무 것도 듣지 않고 이전에 자기가 해 오던 것만 유지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듣다 보면 사람에게 맞는 말씀인지 아닌지는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니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면 당연히 사람인 자신이 알알 들을 수 있다는 믿음 정도는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그 정도도 생각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자기가 근본으로 삼던 고향을 떠나지 않는데 무엇을 얻을 수 있겠으며, 그 의심 가운데 어떤 믿음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누군가 하나님의 말씀이라 선포하는 이가 있으면 일단 들어야 합니다. 자기가 가진 ‘이래야 한다.’는 돌과 같은 법도 버리고, ‘세상의 근심과 걱정’도 버리고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좋은 밭입니다. 그렇게 듣다보면 그것이 생명이 있는 말씀인지 아닌지를 알게 됩니다. 아니다 싶으면 조용히 떠나면 됩니다. 마냥 의심만 하고 걱정만 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가시밭과 같은 마음이기도 하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땅과 같은 사람, 밭과 같은 사람은 씨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 씨가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가 신뢰해야 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씨를 뿌리는 이가 농부라는 것, 그것입니다. 그것을 불신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자기가 이미 돌과 같은 법을 마음에 가지고 있거나, 가시넝쿨과 같이 ‘이 씨는 온전한가?’ 같은 걱정이나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는 마음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면 씨가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정하지 못한 길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나서서 어떤 말씀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그 길을 나설 때는 성인이고 우리 안에 많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또 그렇게 하나님을 찾아 나서는 상황은 뭔지 모르는 두려움과 걱정을 가진 상태이기에 돌도 가시도 많은 마음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오랫동안 나그네 길을 거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보낸 것과 같이 자기가 가진 돌 같은 자기가 옳게 여기는 법과 세상과 하나님 일에 대한 걱정을 다 버릴 때까지 경륜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듣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 밭’을 경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여정입니다. 그 여정을 거칠 때까지 우리는 좋은 열매 맺는 밭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께서 온전히 자신을 이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길을 나서고, 만나는 이들 앞에서는 ‘이건 아니다’ 싶을 때까지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듣고자 한다면, 그 세월이 우리 마음에 있는 돌과 가시를 다 제거하고 온전한 밭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열매를 맺는 정체성 분명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Translation by Google)


(Matthew 13, Mark 4, Luke 8) a fruitless land


Jesus wants to speak through the 'seeded parable' to say to the farmer that the word of God, like seed, is the fruit of man's heart. It is in fact the central reason and purpose of Jesus' coming to earth. This parable is about God's purposeful man's acceptance of the word of God in him and the fruit of his word, and in that effect he speaks of the hearts of those who accept God's Word.


In the first posting of this parable, I told people that they talked about "fairness" in connection with this statement. 'Why is it a thorny field, who is a stone field, and who has a field of mind like a road?' Just because the seeder is sowing seeds in a good field, there is a view that the seeds are scattered in a way that is not like a farmer.


But as I said through some of the previous postings, the key to this parable is the question of how people accept God's Word. God gives the word of God to all life, but according to the heart field of people, the same word of God brings different results. So, rather, it is a fair word. Those who have a mind like a road, a heart like a stone field, a field with a thorn bush, a mind whose identity is unclear, a person whose law is right in his heart, and who has a great deal of grief in the world, You are saying that you can not.


These three fields are common. You are not ready to accept Mr. To accept the seed, the identity must be a clear field, not a field. There is no spirit in the mind like the way, and there is something in it before the word of God, which is the word of God, enters where there are stones and thorns. Everyone is not ready to accept the seed that the farmer is rooting for and bear the seed's fruit.


In fact, the world is full of God's Word. This blog is one of them, of course. There are many interpretations of the Bible, and the sermons are overflowing, though the viewpoints and values ​​of releasing the Bible may be slightly different. But any interpretation of any sermon is not his own if he already has certain standards in himself.


If someone is telling you that it is the Word of God, you must listen to it when you hear it. If it is not worth it, dust off your feet. In other words, it is not a perfect fruit to find the justification of self-thought from the words of reading and listening, or to add to its own words as options. There are stones already in the field, but the seeds scattered behind do not become perfect fruits no matter how perfect they are.


It is inevitably mixed to accommodate something new with something already in your mind, so neither one is perfect. The Bible does not fully see things like 'half-human'. All the gods, like Dagon, whose heads are fish, and whose body is man, are all gods. Of course, it is idol by just carving the figure before it, but the law of God's life must be a whole life. It is to be done by car or damp.


However, people see the book in which God preaches the image of God and hears God's Word and preaching, and also releases the Bible. And he accepts what is plausible even if he does not meet his own standards or understand himself or herself. It accepts not only everything but self-tastes. It mixes and mixes, and everything is messed up. The world's values ​​are also mixed.


When the flood occurred in Noah's day, it was said that the water of heaven and the water of the earth were combined and became a flood. On the other hand, when God created the heavens and earth, He said He had divided the water above the expanse and the water below the expanse. This means that man divided the water to eat and the inedible. Water is the Word, that is, a person is thirsty for his identity, that is, there is a Word of God to eat and drink, and a Word of the world, under the expanse.


But when those who believed in God saw the beauty of man's daughters and took them as wives, God caused a flood. In other words, it was destroyed by mixing the Word of God and the form of the world. It is impossible for any age to blend the Word of God with the values ​​of the world. Therefore, if you want to hear the word of God, you must let go of your own righteousness.


People then worry about how they can tell if what they hear is the true word of God. So I do not hear anything because I doubt, but I keep what I was doing before. But when people listen, they know if it is right for the person or not. It is God's Maker, and if God speaks to man, there must be a degree of belief that the person himself can hear them. If you can not think about God that much, you can not do anything. Like Abraham, what can you get if you do not leave your original home and what is your belief in that doubt?


Therefore, if there is a person who declares that someone is the Word of God, we must listen. You have to have the same thing as the stone. You have to abandon the worries and worries of the world. That is a good field. When you listen to it, you will know whether it is a word with life or not. If you do not want to leave quietly. If you are skeptical and worried, it is like a thorny field and a person who has received a talent.


People like land, such as fields, can not choose seed. I do not know whether he has life or not. There is only one thing he has to trust. That is, the seeder is the farmer. If you distrust it, you can not get anything. If you already have a stone-like law in mind, or you have something like a vine, such as worrying about the seed is perfect, or worrying about God's work, Mr. can not be life. There is no way to determine the identity of self-existence.


It is not easy for a man to seek out the word of God and to acknowledge and obey a word as God's Word to himself. We are already adults when we go out that way, we have many values ​​in us, and we are in a state of fear and anxiety that we do not know what the situation is so we started with God.


But once Abraham has gone through a process of dispensation until he has gone through a strange path for a long time and the people of Israel have spent 400 years in the wilderness, You will hear God's Word fully. That is the cultivation of the 'heart field'.


That is the journey of our faith. Until we go through that journey, we are not good fruit fields. But in the economy of God, if we are to go out with the belief that God is leading us fully and to listen in obedience until we want to 'not' in front of those we meet, It will be a clear identity and a fruit of the image of God as a whole 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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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지옥가야지 뭐…

Category : 김집사의 뜰/덕이의 신앙 이야기 Date : 2017. 6. 4. 12:51 Writer : 김홍덕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 신앙을 가진 이런 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따지고 들면 단 하나 죽어서 천국 가겠다는 목적이 핵심이다. 아니다고 우기겠지만, “너 그래 봐야 죽어서 지옥 갈 거야!”라고 증명한다면 아무도 교회에 다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다들 성경을 몸으로 지켜내려고 열심이다. 성경에 ‘분 내지 말라’하니 화 내지 않고 살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나 너나 나나 다 알다시피 우리가 화를 참는다고 참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적어도 인두껍을 쓰고 있으면 다 아는 사실이다. 단지 남 앞에서 얼마나 그 마음에 있는 것을 들키지 않는지에 대하 능력과 기술이 그 사람의 고상하게 만들거나 별종으로 만든다.


하지만 내면은 어차피 같다. 껍데기가 다르다고, 그것도 정확히는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른 척 하는 그것으로 좀 달라지긴 하지만 모두 화를 참는 것이 힘들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평온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기 원한다. 행여 화를 내다 죽음을 맞이하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할까 해서 말이다. 사람들의 그런 생각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행위로 지은 죄가 남아 있다면 천국 가는데 지장이 있을 것이라는 것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신학이란 괴변으로 그것을 어떻게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 사람들이 그 신학에 의존해서 죽음 직전에 어떤 불의한 행위로 인하여 천국 가는데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근심을 지워버리지는 않는다. 그냥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정도지 그 신학의 이론에 자기 운명을 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걸 뭘로 증명할 거냐?’는 것이다.


어쨌든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자기 사후의 어떤 신에게든 심판의 빌미를 제공한다는 것을 믿는 것은 틀림없다. 그건 아마 모든 종교와 신앙의 공통된 관점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천주교의 고해성사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의 회개기도도 그렇다. 일단 기도한다 치면 회개부터 해야 하는 것이 그것이다. 행위에는 늘 자신이 없다. 다만 남에게 얼마나 들키지 않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믿는 것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신앙의 매커니즘이 다른 신앙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위와 그것에 대한 회개, 즉 죄의 관점이 행위에 있다는 것과 그 회개의 루틴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방법과 색깔이 다르긴 하지만 골격이 같다. 이것은 정말로 의심해야 할 부분이다. 정말로 성경을 학문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것을 공부해야 할 것이다.


이쯤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한 번 이야기 해 봐야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그렇게 우리가 행동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제시한 회개의 행위를 하므로 용서를 받는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천국가야 하니까?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 신앙에서 제시된 것은 다른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신은 다른데 요구하는 패턴은 비슷하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하나님이 가장 뛰어 나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비슷한 패턴으로 행위를 인간 죄의 본질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세상의 학문이 하나님의 말씀과 결합된 탓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았다는 노아 홍수 원인에 대한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성경 속의 하나님은 행위를 본질로 보시는 문이 아니다. 행위는 어디까지나 그 존재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존재론적 신앙이고, 하나님의 이름이 ‘스스로 있다’는 여호와라고 하신 의미인 것이다.


존재론적 신앙이라는 것은 행위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행위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질은 어디까지나 존재라는 것이다. 내가 누구냐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늘 물으신다. ‘네가 어디(정체성의 자리)에 있느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정체성과 그에 따른 관계가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위를 본질로, 또 심판의 기준으로 보는 이들의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행위를 본질로 보고, 행위가 심판의 기준이 된다고 여기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훔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이면 그 신앙의 결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렇게 열심히 평생을 수고해도 천국에 갈 수 없다. 천국은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다. 하나님과 관점이 같아야 한다. 하나님은 정체성과 존재를 기준으로 보시는데 행위를 본질로 보는 이가 그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행위가 온전치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떼를 쓰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설사 그들의 주장이 옳다고 치자.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희 말을 듣지 않으면 나와서 신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네 갈 길을 가라.’고 그런데 행위의 신앙에 매몰된 사람들은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의 집에 불을 지르려 한다. 


남의 삶과 의견에 침입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려고 한다. 침략하는 자들이다. 자신들의 주장이 있다면 그것을 자기의 장을 만들어 설명하면 된다. 그것에 대한 평가는 듣는 이의 몫이다. 그럴 자신이나 용기가 없으면 닥치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적어도 십자가를 안다면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순종의 십자가를 믿으면서 능동적인 도전을 한다? 그게 바로 천국에 가지 못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행위와 형식을 본질로 보는 이들 중에는 그런 몰지각함을 무릎 쓰고서 존재의 신앙을 심판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신앙은 잘 못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행위는 맘대로 하면 되느냐고 묻는다. 자기 안에서 본성이 나와서 행동을 지배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당연한 마련함이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투덜댄다. 지옥에 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 할 수 없다. 존재의 신앙을 가진 나로선 그렇게 주장한다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난 행위로는 아무리 해도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죄를 자백까지 했으니 여지가 없다. 난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화를 낸다. 변명이 있다면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하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훼손당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 그래서 이 글도 쓰고 있다. 성경을 보니 다윗도 그랬었다. 예수님? 말할 것도 없다.


또 나는 돈에 대하여 그렇게 청렴할 수 없다. 십일조도 정확하게 계산하기 어렵고, 돈 없을 때는 사람 만나서 밥값을 내는 것에 눈치도 본다. 이런 비겁함은 어쩔 수 없다. 없는데 어쩌라고? 그래서 지옥 가야한다면 어쩔 수 없다. 내가 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가야지. 달리 방법이 없다.


그래도 난 이 존재의 신앙에 목 맬 것이다. 내 안에 있는 화내는 본성은 하나님이 주셨다. 내가 나를 만들지 않았고, 적어도 난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다고 믿는다. 그러니 내가 화 내는 본성을 가진 것은 하나님의 소관이다. 다만 나는 내 의를 주장하기 위하여 화를 내는 것을 자제한다. 때론 실패하기도 하나 내 삶의 골격은 그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훼손당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몸의 피가 끊어 오른다. 때론 생명을 얻기 위해 참기도 하나,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당하는 것을 보고 분개한 소년 다윗의 마음 정도는 나도 있다.


그래서, 그렇게 화를 내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본능으로 인하여 지옥에 가야한다면 가야지. 잘 차려 입고 갈란다. 난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이시고, 그것을 알지 못하고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30년간 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예수 믿었다. 그런데 해도 해도 안 되더라. 그래서 그게 아니라고 결정했고, 그 결정으로 인해서 지옥 간다면 갈 각오로 나섰다. 존재의 하나님을 좇아서. 


그런데 이 길을 가면 갈수록 이것이 참 지리임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멈출 수 없다. 이 모양으로 사는 것은 행위를 심판의 기준으로 보는 이들에겐 가관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예수님을 보는 바리새인도 그랬다. 그래서 그런지 나 역시 너무 많은 바리새인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난 지옥 갈지 모르겠다. 그래서 가야한다면 가야겠지. 그런데 그게 잘 될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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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열매 맺지 못하는 땅이 있는데 그것은 가시떨기가 많은 땅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가시는 다름이 아니라 세상의 염려와 재물에 대한 이익과 욕심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는데, 이는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함을 보이심인데, 그때 하는 사람들의 생각 즉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생각이 바로 가시로 상징되는 것입니다. 염려와 욕심, 그것이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아주 단순해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의 염려와 욕심이 많으니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염려와 욕심이 무엇인지를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염려와 욕심은 단순히 ‘오늘 뭐 먹을까?’하는 것과 부자가 되고 싶은 욕심과 같은 것에서부터 ‘죽고 난 다음의 세계’에 대한 염려와 ‘죽어서도 부자’이기를 바라는 욕심에 이르기까지 끝도 없는 것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이 염려하는 모든 주제와 대상, 그리고 욕심을 내어보는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고, 누구의 경영 아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근심하고 염려하는 모든 일들이 누구의 주관이고 누구의 소관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욕심내는 모든 것 역시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실수 없이 경영하시고, 또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드셨기에 모든 것이 그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근심과 욕심이라는 것은 단순하게 세상걱정과 욕망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월권과 불신>에 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뿌려진 씨를 자기 속 심령에 받아 순종해야 하는 피조물인 인생이 씨를 뿌리시는 하나님의 경영에 대한 염려를 하고,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인 양 생각하면서 취하려 하는 것이 욕심이기 때문입니다. 씨를 순종으로 받아야 하는 인생이 씨 뿌리는 분의 일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씨가 그 마음에서 열매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염려와 욕심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무능하니 자신이 걱정하겠다는 것’과 ‘하나님이 만드시 세상의 어떤 것도 자신이 만들지 않았는데 자기 것인 양 생각하는 도적질과 탐심’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스스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변수와 같은 일은 다 계획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내가 내 발로 들어오지 않은 인생의 일이 어찌 나의 소관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하나님께서 내 마음 밭에 뿌리신 씨를 받아 생명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모든 경영에 순종하겠다는 것인데, 하나님의 일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는 일을 염려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단지 그것이 나와 연관된 일이라고 해서 내가 염려한다고 하나님의 일을 염려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인데 말입니다.


사람들의 염려는 한이 없습니다. 작게는 자신의 먹거리나 건강에서부터 나라와 세계를 위한 걱정까지 다 합니다. 아니,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또 실수도 없으신 분으로 믿는다면서 세상을 걱정하는 것은 어디서 그 정당성을 찾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세상일을 염려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무능해서 걱정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그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자기 마음 밭에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생을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도구와 형식으로 주신 것인데,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뜻은 버리고 인생 자체의 영위가 인생의 목적인양 살아갑니다. 자기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발로 들어온 인생도 아닌데 어떻게 이 삶이 자기 것입니까? 그런데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욕심입니다. 자기 것이 아닌데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 자기 것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욕심이고 탐심이며 도적질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밭의 주인이 밭을 일군 것은 당연히 농부의 뜻이 있어서 인데, 밭이 그 주인이 밭의 존재 목적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 주인이 뿌리는 씨가 그 밭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밭의 주인이 자기 밭에 가시 떨기가 넘쳐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밭에 가시가 넘쳐나니 그 땅에서 열매가 맺히지 못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별의 별 걱정을 다합니다. 늘 죽을까 염려합니다. 아니 인생이 죽지 안 죽습니까?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죽게 다 만들어 놓았는데 그렇게 죽는 일 걱정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다 죽게 해 놓으셨으니 염려할 것 없습니다. 나라와 세상이 개판일 것 같습니까? 단언컨데 나라와 세상이 잘못되었다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 않은 분입니다. 늘 실수가 많은 분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으로 믿고 싶으면 그렇게 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왜 우리가 그것을 걱정합니까? 


우리가 걱정할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을 내어 놓을지 그 성령의 근심 그것 하나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하나님이 만들고 주신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자신과 세상의 일을 걱정하고 있으니 언제 어디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그 삶으로 나타나겠습니까? 그러니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먹을 것 마실 것 염려하지 마라고 하셨겠습니까? 풀 한 포기도 다 하나님이 기르시고 먹이신다고 하셨는데 사람들의 하나님 걱정을 끊이질 않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께 제사를 제때 드리지 못할까 하나님의 일을 염려했더니 돌아온 것이 바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 보다 낫다’는 사무엘의 책망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그렇게 뇌까리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자기 육신의 일을, 또 나라와 세상일을 걱정합니다. 그러니 좋은 말씀, 생명의 말씀을 접해도 그 걱정하느라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욕심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인생 자체가 자신의 것이 아닌데, 자기 힘으로 태어나거나 존재하게 된 것도 아닌데 인생이 자기 것이라고, 그 주권과 존엄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인생에게 존엄성이 있을 이유와 경우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 인생의 본성이 하나님의 의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인생을 만드신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되었을 때, 그 하나의 경우를 제외하면 그 어떤 인생도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존엄할 수 없고 주권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인생이 자기 것이라는 세상의 가치관 아래서라면 몰라도. 그런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서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시밭과 같은 마음인 것입니다.



(Translation by Google)


seed fell among thorns


There is another land that can not bear fruit, and it is a land with many thorns. It is not the difference, but the interests and greed of the world's anxieties and wealth. When Jesus was crucified, he wrote a crown of thorn on his head, which shows that a man can not save himself by his own thoughts, is. It is also anxiety and greed.


This may seem quite simple. It is not the word of God, but the concern and greed of the world that the word of God can not bear fruit. That is correct. But we need to think more about that concern and greed. Anxiety and greed are endless, from simple things such as 'what to eat today' and 'greed that wants to be rich' to 'the world after death' and the desire to be 'rich even when dead'.


But there is one very important fact that we have to think about here. It's all about the subjects and objects that people care about, who's in charge of what they are, and who they are under. Who is responsible for who is responsible for all the worries and concerns? It is not God, but God. And everything that people desire is also God's. That is because God created the world to run mistakes and to express God, everything is his.


Thus, anxiety and greed are not merely concerns about world worries and desires. This is a matter of "mystery and disbelief". It is because it is greed that the life which is the creature to obey the seed which is scattered in the heart of oneself is concerned about the management of the sowing of the seed, Life that needs to receive the seed in obedience is to worry about the work of the seeder. So the seed can not be fruit in his heart.


To have anxiety and greed is to say that God is ineffectual and that he will worry about himself, and that God does not make any of the world what he is, but to steal and steal a sheep that he thinks he is. Life is not something that has begun on its own. So there are people who plan and manage all the things that happen in that life. How will I be in charge of my life when I have not entered my feet?


To listen to the word of God, to receive God's seed in the field of my heart and to be life, is to obey all the management of God. I am doubting God's work and concerned about what is under God's control. Can the Word bear fruit in itself? It can not be. It is not justifiable to worry about God's work that I am concerned that it is my work.


There is no concern for people. We do everything from our own food and health to our worries about the country and the world. No, I believe God as almighty and without mistakes. Where can I find justification to worry about the world? So, being concerned about world affairs is either God's incompetent or worried, or one of them. Can such a person receive in the field of his heart by obeying the word of God? It is impossible to do that.


Also, God gave life in the form and means of expressing God's character. People abandon the will of God and live the purpose of life itself. It is self-life. It is not the life that came on its own feet. How is this life self? But it is greed that it is self. It is greed, greed, and stealing that desires to be self, not self, but self.


Such a person can not, of course, be the life of God's Word. The owner of the field is the worker of the farmer, of course, because he has the will of the farmer, but the farmer does not recognize that the owner is the owner of the field, the owner of the field, Can you do that? Does a master of a field like to overflow a thorn in his field? But the thorns are overflowing in the field, so it is natural that no fruit can be produced in the land.


People are worried about stars. I worry that I will always die. Is not life dead or dead? God made you all to die someday, and you do not have to worry about not letting God die, even if you do not worry about it. Do you think the country and the world will be open? I assert that God is not omnipotent if Nara and the world are wrong. He is always mistaken. If God wants to believe in him, he will, but if not, why do we worry about it?


What we worry about is how we will give God's life, and the grief of the Holy Spirit. However, I am worried about God's own business and the world's work by living the life that God has made, and when and where will God's life appear? Therefore, they can not bear good fruit. Would you say that Jesus did not worry about eating? God has given us everything we give and feeds, but we do not stop worrying about people's God.


It was Samuel's rebuke that "the obedience is better than the sacrifice, and the hearing is better than the fattening of the flesh," because the king of Saul could not offer the sacrifice to God in time. Those who believe in God in such a way as to be brave, worry about their own physical work, and about the country and the world. Therefore, even though we have a good word and a word of life, we are worried about it, and the Word of God is not becoming fruit.


There is no need to say greed. I argue that life itself is not my own, and that I should not be born or existed on my own, but acknowledge its sovereignty and dignity as life itself. It is a funny story. There is only one reason and a case for the dignity of life in God's world. When the nature of the life became the righteousness of God, and the purpose God made for life became the purpose of his life, no life except God can be dignified or sovereign in the world God created . Maybe under the value of life that life is its own. Such a person can not, of course, be the life of God's Word. It is a mind like a thorny 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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