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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또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 분명하게 그 말씀을 하시는 대상을 정해놓으신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은 ‘나는 너를 애굽에서 건져낸 여호와’라고 선언하신 다음에 <너는> 이라고 십계명을 지키는 대상을 명시해 두었습니다. 그와 같이 빛과 소금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이 말씀에도 <너희는>이라는 대상이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대할 때 자신이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대상에 속하는지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단지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당연히 그 대상에 해당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대상에 속한다면 그 말씀이 자기 삶이 되거나 자신이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신 것은 다 이루어진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어떤 대상에게 <너는 이것이다.>라든가, <너는 이렇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면 아무런 저항 없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셨으니 그렇게 되기 위하여 신앙생활 열심히 해야겠다.’라는 식의 접근법은 착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조금만 양심적이면 그 말씀대로 자신이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설사 노력이 끝을 본다고 해도 개가 노력해서 고양이가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 빛과 소금에 대한 말씀은 어떤 사람이 어떻게 하면 빛과 소금이 된다거나, 누구는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분명히 빛과 소금과 같은 이들에게 너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하면 빛과 소금이라는 이야기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빛과 소금인 사람들을 <너희>라고 부르시고 그 너희가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건 성경 해석의 문제 이전에 문맥 자체가 그렇습니다. 


사소한 것 같으나 성경을 볼 때 이런 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이것을 놓친다는 것은 성경을 기록한 하나님의 의도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맘대로 보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도 분명하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그리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되어 있는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으니 빛과 소금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설교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정말로 자의적인 관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빛과 소금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이해하고 듣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너희>에 우리가 속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알면 되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이 되려할 것이 아니라 <너희>가 되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 <너희>가 되는 것이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나 다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다릅니다. 이유가 갖추어지면 결과가 나오는 것인데 누구인지는 상관 않고 빛과 소금이 되려는 것은 양의 문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십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었는데 자신을 구해준 분이 여호와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너>입니다. 그 <너>, 하나님을 애굽에서 자신을 건져내신 존재의 신 여호와로 보지 않는 이가 십계명을 지킨다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예수님께서 ‘주여, 주여’한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You)>는 독립된 정체성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너’는 ‘나’와 이인칭의 관계에 있는 대상에 대한 호칭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너>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 부르는 이와 불리는 이가 <너와 나>의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서로 어떤 관계가 형성되었는데, 그 관계는 둘이 동일하게 그 관계를 인정할 때 성립되는 것입니다. ‘너’ 없는 ‘나’가 있을 수 없고, ‘나’ 없는 ‘너’가 있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것은 서로가 같은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무엇보다 예수님과 이인칭의 관계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의와 정체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의가 다르면 원수가 되지 <너와 나>가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행위로 하나님의 아들이나 빛이 되신 분이 아니라, 성령으로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셨는데 그 정체성이 빛이신 분입니다. 어떤 노력으로 빛이 되신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빛의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났다(born)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너와 나>의 관계, 예수님께서 <너희(You)>라고 부르시는 관계는 행위로 빛과 소금이 되려는 사람이 아니라, 처음부터 빛과 소금으로 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인 것입니다. 존재로서 빛과 소금이 된 사람을 부르시는 호칭이라는 것입니다. 행위로 또 소유의 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한 이들은 하나님의 정체성에도 예수님의 정체성에도 맞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과 하나님께 ‘너(You)’가 아닌 것입니다.



(Translation by Google)


(Mt 5) Light and Salt - You,


In the Bible, most of the time God has set a clear target for His Word when He speaks. For example, the Ten Commandments declared "I am the Lord who delivered you out of Egypt," and then I have specified an object to keep the Ten Commandments, "You." In this same saying, which speaks of light and salt, the object of "you are" is clearly defined.


However, when many people treat the Bible, they do not worry about whether they belong to the object God and Jesus say. I think that if I just go to church, it will be the object of course. But it is mistaken. Because if you belong to the object, it will not be difficult for you to live your life or to keep your word. Jesus' words do not fall on the earth. This is because everything you said is done.


Therefore, if Jesus said to an object, "This is this," or "You will be like this," then it should be without any resistance. But it is not an illusion, but the fruit of anything else can not be obtained. This will acknowledge that if a person is a little conscientious, he can not do what he says. Because it is not working yet, and even if the effort is over, the dog does not become a cat by endeavoring.


The word about light and salt does not mean that someone should be light and salt, and some must be light and salt. This is clearly what you say to those like light and salt. It is not how someone talked about light and salt. Those who are already light and salt are called "you," and they say that you are light and salt. This is the context itself before the problem of Bible interpretation.


It may seem trivial, but you should not miss it when you look at the Bible. Missing this is because you are looking at your own will, not according to God's intentions of Scripture. It is indeed self-evident to say or understand that this word must also be clear, saying, 'You are the salt of the world' and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nd 'You must believe in Jesus and be like light and salt' It is a perspective only.


Therefore, to best understand and hear Jesus' words about this light and salt is to know who Jesus is speaking of. If we know it, then we need to know whether we can belong to the <Jesus> Jesus said. It is not to be light and salt, but to be.


Is this not to be these things, to be light and salt, or to be all efforts? You can talk. That's what it is. But this is different. The reason is that the result comes out, but it does not matter who you are and what you want to be light and salt is like the one that has not come in through the door of Yang.


The same is true of the Ten Commandments. He is slain in Egypt, but the one who acknowledges that the one who rescued himself is Jehovah is the one God says. That is not to keep the commandment of God that the one who does not see God as God, the God of all who has rescued himself from Egypt, keeps the Ten Commandments. Jesus said to them, "Lord, Lord," you are not saved.


You do not have an independent identity. 'You' is the title of the object in the relationship of 'I' with the person. So when someone calls you, it means that the relationship between you and me has been formed. That is, a relationship is formed when the two recognize the relationship equally. It is a relationship that can not have 'I' without 'you', and 'you' without 'I'. This means that they have the same identity.


And most of all, being a relationship of Jesus with Jesus is a being with the same righteousness and identity as Jesus. If the righteousness is different, it will not become the enemy. Jesus is not the Son or the Light of God in action, but the Holy Spirit, and the Word became flesh, whose identity is the Light. It is not born in the light of some efforts, but born from the beginning as a person with a light identity.


Therefore, the relationship between Jesus and "you and me", the relationship that Jesus calls You, is not a person who wants to be light and salt, but a name that calls people from the beginning who are made of light and salt. It is the title that calls the person who became light and salt as being. Those who seek to come to God by the act and by the dream of possession are not "You" to Jesus and God because they do not fit either God's identity or Jesus'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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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빛과 소금인가?


우리가 익히 산상수훈이라고 알고 있는 마태복음 5장 13,14절에는 산상수훈보다 더 유명한 <빛과 소금>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 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빛과 소금의 특성을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는지 말씀하시고 그와 같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대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이 빛과 소금은 소위 ‘교회에 다니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무수히 교회에서 듣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성경과 다르게,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을 간과하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하여 열심히 해야 합니다.”라는 아주 그럴듯한 설교 속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되기 위하여 열심이어야 한다는데 그것을 누가 ‘그게 아니다.’라고 하겠습니까만 그것은 정말로 교묘한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으로 잘못된 시각, 이 <빛과 소금>의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이 가진 결정적인 오류는 바로 동사(Verb)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단순하게 “너희는 소금<이다(be)>”라고 하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되어야 한다.’,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설교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선언적으로 Be라고 하신 것을 사람이 will be 혹은 may be와 같이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라고 하셨는데, 이 시대의 사람들은 그렇게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선언하시듯 하셨는데 사람들은 제자라면 빛과 소금과 같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빛과 소금으로서 역할을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빛과 소금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빛이면 그 빛이 무엇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그 빛을 높은 곳에 둔다는 것입니다. 제자로서 어떤 역할을 하려하지 않아도 그냥 사람들이 빛임을 알고 빛에 맞는 대우를 한다는 것입니다. 소금도 그 맛만 있다면 사람들이 소금으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믿으니 빛과 같이 소금과 같이 여김 받아야겠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정체성에 대한 안목이 다르면 예수님의 말씀은 당연히 왜곡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빛, 너희는 소금이라고 Be동사로서 그 정체성을 말씀하시고, 그렇다면 사람들은 빛을 대하듯 소금을 대하듯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Do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빛다운 무엇을 해야 한다거나 소금다운 뭔가를 해야 한다거나 심지어 빛이 되려고 또 소금이 되려고 무엇인가를 행하여야 한다 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에 따라 억지스럽게 보일 수 있고 또 별다른 차이가 아닌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보는 관점에 있어 아주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다(Be)’라고 하신 것을 사람들이 Do, to DO, have to ~, will be, may be와 같이 다양하게 각색하는 것은 이치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으로는 부족하니 뭔가 더해야 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그 차이가 더 분명해집니다. 생명은 태어나는 순간 그 생명의 정체성을 온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가 나서 1살이 되면 다리가 생겨서 걷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난 다음에 사람이라는 생물학적 존재로서 부족한 것이 더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반인반수도 없습니다. 날 때 이미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은 그 자체로 빛이고 소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났다면 사람들이 빛으로 대하고 소금으로 대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자신을 빛과 소금으로 대하지 않으니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려 하거나 심지어 빛과 소금이 되자고 합니다. 


그것은 참 가상한 노력인 것 같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자신의 믿음 중에 자신의 믿음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자신이 생각할 때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더 방점을 두고 그것이 온전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데 왜 안 되지?, 뭐가 부족해서 안 되지?’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 아니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된다고 했는데 아니네? 그럼 내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상태가 아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된다고 하신 것, 예수님께서 거듭나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에 사람들이 등경 위에 두고 또 맛을 내듯 삶의 의미로 받을 것인데 그 누구도 그렇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듭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자신이 일주일 한 번씩 혹은 그 이상 교회에 가니 자신이 거듭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빛과 소금>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상고하려면 상고하는 사람 자신이 먼저 빛과 소금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사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가지고 빛이 되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빛으로 여김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한다(Do)와 같은 설교를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거듭나지도 않은 삯군 목자요 늑대와 이리일 뿐인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것,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생명으로 나는 것과 같아서 나는 순간 그 모든 것이 다 온전한 것입니다. 이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 가르치시니 제자들이 나아왔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마 5:1)


즉 제자로 나온 사람은 팔복과 같은 사람이고 그 사람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너희가 바로 빛이고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 앞에 제자로 나온 사람이면 그 존재가 바로 빛이고 소금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가지고 빛이 되려면 어떠해야 하고, 소금 같은 삶은 어떻게 사는 것이라면 일장 연설을 한다면 당연히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아닌 것입니다. 즉 삯군이요 늑대요 이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빛과 소금에 대한 말씀은 우리가 빛과 소금이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떤 삶을 살 것인지가 본질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너희”인가 아닌가 하는 것만 분명하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선 그것이 되어야 빛에 대하여 소금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Translation by Google)


(Matthew 5) light and salt


Who is light and salt?


In Matthew 5:13, 14, which we know to be the Sermon on the Mount, there is a word about Light and Salt, which is more famous than the Sermon on the Mount. That is, "You are the salt of the world" and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nd that's how they talk about how people treat light and salt, and they say that people will treat the sons of God.


This light and salt is a word that is heard in the church in my so-called 'church attendant'. However, unlike the Bible, Jesus is ignoring what he intended to hear. It is a very plausible preaching that "we must work hard to be like light and salt as the words of Jesus". It must be zealous to be like the words of Jesus, who says "it is not" but it is really tricky. That is not it.


The crucial mistaken view, the crucial error of those who deal with this word of light and salt, is in the verb. Jesus simply said, "You are salt <be>", but people understand it as "must be" and "must strive to be." Of course, preachers are such representative people. What Jesus declares Be to be understood as a person will be or may be.


This is a very crucial difference. Jesus, the Son of God and the body of the Word, said to his disciples, "You are the light and the salt of the world." People in this age think they should try to be. Jesus said, "I am the light and salt of the world," as if the disciples were trying to be like light and salt, and that they would act as light and salt.


Jesus said of this light and of the salt, that if light is not what the light does, they will place it at a high altitude. Even if you do not have any role as a disciples, you just know that people are light and treat them according to the light. If the taste of salt is enough, people use it as salt. I do not even think that I should believe in Jesus and be treated like salt like light.


If this discernment of identity is different, then the Word of Jesus is, of course, distorted. Jesus says that you are the light, you are the salt, the Be verb, and then the people will treat the salt like a light. It is not about Do. It is not something you should do what you should do or you should do something like a salt down or even do something to be a salt to be a light.


This may seem inevitable, depending on people's values, and may not seem to be a significant difference. But this is a very crucial difference in terms of viewing the Bible. The fact that Jesus said "Be" means that people do various things like Do, to DO, have to ~, will be, and may be. This is because it is proving that you have a perspective that you need to do something more.


The difference becomes clearer from the point of view of life. Life is full of the identity of life when it is born. When a child is 1 year old, it does not mean that the person is walking with a leg. After being born, the lack of human being as a biological being is not filled more. There is also no half-life. You are already a person when you fly.


Therefore, the person who is born again is light and salt in and of itself. Therefore, if you are born again, it is Jesus' words that people treat you with light and with salt. People think that they believe in Jesus, but because they do not treat themselves with light and salt, they try to play the role of light and salt, or even light and salt.


It seems to be a virtual effort, but to believe in your own belief in Jesus' words and your own beliefs. When I think of myself more than Jesus, I think it is more perfect than the fact that I am a person who believes in Jesus. 'I believe in Jesus, why not?'


But if you believe in Jesus, or you believe in Jesus, you say, 'Jesus said,' No? Then I am not in the same state as Jesus said! ' Jesus said, "When Jesus is regenerated, he will be the light and salt of the world. He will be put on the stand and taste as if it were a taste of life. It is merely to mistake the person who is born again once a week or more to go to church.


Therefore, to appeal to Jesus about this light and salt, he must first be light and salt. No, that's all. So, if you are preaching such things as Do to get a light from this people and a light from the world people, that person is a werewolf, a wolf and a wolf, who are not yet born again.


Being born again, being a disciples of Jesus is like life-giving, and I am all in all. This Sermon on the Mount begins with Jesus telling the disciples that they came to the mountain.

And seeing the multitudes, He went up on a mountain, and when He was seated His disciples came to Him (Matthew 5: 1)


That is to say, the one who came out as a disciple is a person like a patriarch, and Jesus said to you, "You are." He said that you are light and salt. That is, if a person is a disciple before what Jesus teaches, Jesus said that the being is light and salt.


But if you want to be a light with this statement, and if you live a salt-like life, if you make a speech, that person is not "you" Jesus said. It is a wage band and a wolf.


Therefore, this Word of Light and Salt is not the essence of what we should do to be light and salt, what kind of life we ​​should live, but only if we can make it clear that we are the "you" I will. First, it is that you can think about salt against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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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알려면(5)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7. 6. 12. 23:11 Writer : 김홍덕

<성경을 알려면>이라는 이 글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어떻게 확신할 것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다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자 합니다. 물론 그 이유부터 하나님의 계획에 합당해야 합니다만 그것은 다른 글들에서 많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오늘 내 모습으로 바로 할 수 있느냐?>로 가늠하는 것이라고 가이드를 제시하긴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언제나 이야기하듯이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 그 의가 육신의 삶으로 나타나게 되면 그 나타난 자신의 삶을 보면 부인할 수 없게 됩니다. 아쉽게도 이것은 간증적인 측면이 큽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성경 대부분의 말씀이 간증적인 기록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책이라는 것이 그것인데, 자신이 확증하고 경험한 것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자신의 이야기와 사건으로 느끼고 확신하고 싶다면 자신 안에서 자신을 성경대로 살게 하는 이끌림을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연습이나 노력이나 신념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나는 것이고, 생명이 있으면 부인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노력하므로 생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소나무를 뽑을 정도의 간절함으로 “믿습니다!”를 반복적으로 외친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을 수밖에 없고, 스스로 부인하려고 온 힘을 다해 부인해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자기 안에서 나올 때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안에 그렇게 확신하는 삶을 이끌어내는 본성이 들어올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내 안에 모실 것인가가 핵심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다섯 번째 글은 그것을 간략하게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주제 ‘성경을 알려면’을 마칠 것입니다.


사람은 질그릇과 같고 항아리와 같아서 항상 무엇을 담으려고 합니다. 그러한 본성으로 인하여 사람은 자기 속사람을 어떤 것으로도 채우고 있는 상태입니다. 간혹 사람들은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다시 넣을 것이 정해지지 않았는데 비워봤자 귀신이 나갔다가 친구들까지 데리고 들어간다는 말씀과 같이 될 뿐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무엇을 자기 마음에 담을 것인지가 정해지면 그 이전에 가지고 있던 것은 버리자 말라고 해도 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진주장수의 비유입니다.


그런 본성을 가진 사람은 그 속에 무엇을 채웠느냐에 따라 정체성이 정해집니다. 그릇도 그 안에 담긴 것에 따라 이름 곧 정체성이 정해집니다. 간장이 담기면 간장 그릇이 되고, 소주가 담겨 있으면 소주병이었다가 참기름이 담기면 참기름병이 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즉 사람은 겉모양이 본질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것이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은 그 속에 하나님의 의를 담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몸이 거룩한 성전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이 있는 삶에서 그 심령에 하나님의 의를 담고 있으면 그 삶이 심령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어 그 본성대로 살게 되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의를 담을 것인가 하는 것만 알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보고 들을 때에 그 영상 곧 이미지(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그 형상도 이미지임)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의 상식처럼 들리겠지만 핵심은 사람에게 들어가는 이미지는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보는 강아지의 영상은 사람 안에서 이미지가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을 자신이 보고 들은 것으로 살게 하는 생명의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고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본 것대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하는 유일한 것은 바로 사람이 보인 모습, 그것 하나인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천사로 오셨다면 우리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는 그와 같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만난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위를 쪼개고 돌을 불사르는 능력과 모습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하나님을 만나기도 전에 우리는 다 가루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능력으로 인지할 수 있는 모습으로 오시는 하나님 외에는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때에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가는 하나님의 사자가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는데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다른 모습으로 와 봤자 사람이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만나겠습니까? 그게 가능하다고 믿거나 심지어 그렇게 신비하게 만나야 하나님을 만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장담하건데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모르니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교회조차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주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육신을 가진 인생의 정체성을 보이신 것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이 어떤 이유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금식한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단서와 같이 돌을 먹을 수 있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죽지 않는 우리와 다른 육신을 가질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보이신 우리 육신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가 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성경의 모든 말씀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 안에 성경과 또 말씀으로 들어오면 그것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잉태되고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이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 그 의가 삶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볼 때 그 이미지와 같은 하나님의 의가 우리 심령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어 우리가 거듭나므로 그 생명, 곧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게 되는 것이고, 그 삶이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의 모든 것을 믿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며,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삶과 생명의 본성이 된 사람의 말과 삶을 듣고 보는 것에 있습니다. 그 시작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와 뜻이 그 육신을 가진 삶으로 또 말씀으로 나타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본 제자들이 처음에는 예수님을 자신과 다른 존재로 보았지만 나중에 성령의 감동을 받고서는 예수님의 모든 것이 자신들과 같은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보이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육신으로 오셔서 자신들과 같은 성정을 가지고 말씀하시고 사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육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이신 예수님의 이미지가 제자들의 심령에 심겨졌고 그 심겨진 것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이 강림하시므로 그들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성경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확신에 가질 수 있는 것이 속에서부터 나오도록 사람인 제자들의 속사람에게 들어가고 심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반복되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의 말과 삶을 보아야 성경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확신에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 것이 없다면 속사람에 심긴 것이 없는 것이니 성령으로 잉태될 것도 거듭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와 같을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알려면, 부인하려해도 부인할 수 없는 삶의 모습을 이끌어내는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정하신 의의 본성이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거하려면 그 의로 사는 사람의 말을 듣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을 듣고 봐야 그것이 우리 안에 심기는 것입니다.


목사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나,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교양이 있어야지?’와 같은 겉모습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면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봤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있어 그것을 말하는 것을 들으니 그 말하는 것이 지금 나의 모습으로도 충분히 따라 갈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함을 알았다면 그 말에 순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의가 자기 안에 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그것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성경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 살아가는 모습을 서로 나누고 서로를 보면서 믿음의 확신을 가지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사람들이 모이면 그 생명이 같으므로 형제입니다. 그 형제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서로의 아버지가 같음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동체고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는 것을 보고 들는 것이 우리의 양식이 되어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면 사는 삶으로 이끌고 그 삶을 볼 때 하나님을 믿는 자신의 믿음을 부인하려해도 부인할 수 없는 확신을 가진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성경을 알기 위하여 걸어야 하는 최종적인 모습이고 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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