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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알려면(4)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7. 6. 12. 10:39 Writer : 김홍덕

모든 것이 그렇지만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끝임 없이 나오려면, 일단 무엇이라도 나오려면 들어간 것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 것도 들어간 것이 없는데 무엇인가를 나오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봐도 신앙의 여정은 일단 출발하고 봐야 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비판과 걱정만 하고 있는데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기기를 바라는 것은 이루어지 않습니다.


성경의 많은 말씀들은 ‘들으라’,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들으라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려는 열정보다 하나님께서 사람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들어온 것이 있으면 그것은 어떻게든 표현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에 나오는 씨 뿌리는 말씀, 하나님은 농부라는 말씀, 예수님을 포도나무라는 말씀도 같습니다. 땅 곧 사람 안에 심긴 것이 온전하면 그것이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땅에 아무 것도 심기지 않았는데 열매를 기대할 수 없듯이, 사람 안에 심긴 것이 밖으로 표현되고 나타나는 것을 믿어야 한다면, 그것으로부터 믿음의 확신을 얻고자 한다면 그 심령에 믿을 수 있는 것이 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것이나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 안에 사람을 지으신 이가 정해 놓은 본성과 정체성에 맞지 않는 것을 넣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 심령에 하나님의 의를 담기 원하셨는데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넣으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어긋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는 시계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자기 심령에 넣지 않고 다른 것을 넣은 것이 죽은 것이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로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그 안에 품기 원하셨던 것을 품으면 그것이 표현되는 것을 볼 때 스스로 안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능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이 임하시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난다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잉태된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이 된다는 것이기에 사람의 속 심령에 심긴 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라면 그것은 사람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심겼다는 것이 곧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니 성령이 계신 것이고, 그 성령은 심령에 심긴 것이 온전함을 알게 하실 것이며, 그것이 자기 삶으로 표현되는 것을 볼 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확신하는 생명의 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려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온전하게 심겨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긴 것이 없는데 자신이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고 있다는 확신을 할 법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법인 것입니다. 본성이 있으면 그 본성이 나오게 된다는 것, 그 법인 것입니다.


사람은 그 마음과 생각이 정말로 빈 그릇과 같아서 무엇을 그 속에 계속 채우려 합니다. 그것을 갈증이라고도 하고 배고픔이라고 합니다. 먹는 음식이 아니라 자아 정체성에 만족과 안식을 주는 무엇을 찾아 헤매고 그것을 채우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이것저것 채워봅니다. 그러나 만족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뭔가를 채워 가는데 그 채워 가는 것을 쉬지 않는다는 것, 아직도 갈증이 있다는 것은 온전한 것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정체성에 맞는 것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나그네라고 또 남편 없는 과부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안식이 없는 것입니다. 나그네도 집을 찾으면 안식할 것이고, 과부도 그 남편을 찾으면 그 안에서 안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가성 여인에게 하신 남편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외로 간단한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기준으로 그 정체성이 만족하는 것이 사람 안에 채워지면 더 이상 무엇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돈을 좇지도 않을 것이고, 명예를 좇지도 않을 것이며, 이 세상이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 경제적으로 만족하게 되기를 열망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러고 있다면 아직 하나님의 의가 그 사람 안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온전하게 자리하게 되면 그 온전함이 표현되고 발산되는 것을 자신도 볼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본다.’고 표현한 것처럼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 자아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볼 때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뜻하신 것이구나!’라고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지 못했다면 제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행하고 있다고 해도 미안하지만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안식하지 못하고 있는데 무슨 구원이 있겠습니까?


사람도 작동하는 어떤 기계를 만들면 그것이 원하는 대로 작동하는지 여부를 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안정적으로 작동을 하면 그 기계에 대한 의와 기대와 목적이 완성된 것이므로 더 이상 조치하지 않습니다. 행여 기술자의 조수가 만지려 하면 ‘괜히 손대서 고장 내지 말고 그냥 두라’고 말합니다. 그와 같이 의도한 것이 그 속에 있어 의도한 행동을 보이면 그것은 더 이상 갈망할 필요 없는 안식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정체성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그 속 심령에 들어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 속에 있는 것이 육신으로 사는 것(삶)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 나타난 것이 온전하면 어 이상 심령에 무엇을 채우지 않아도 되는 안식을 얻게 되고, 그것을 자신이 보고 알므로 자신의 삶을 보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온전함을 보게 되므로 믿음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부인하려 해도 그럴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의 모습인 것입니다.



PS....


이 <성경을 알려면>이란 글은 다음편으로 일단락 됩니다. 이 글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믿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시작해야 한다는 것과, 그 시작에 있어 우리의 지금 이 모습 이대로 따라 갈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과 우리의 믿음이 온전한 것인지를 아는 것은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을 볼 때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과 끝으로 우리 안에 어떻게 하나님의 의가 들어가는 것인지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앞선 네 가지는 이번 글까지 설명을 했고, 다음 마지막 글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우리 심령에 넣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포스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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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7일 강화도에서 모임을 가집니다.

Category : 알리는 말씀 Date : 2017. 6. 11. 13:03 Writer : 김홍덕

6월에 강화도에서 모임(성경공부)을 가집니다.


모임 시간 : 2017년 6월 17일 토요일 16:00 시작 - 18일 오전까지

               (개인별로 시간이 되시는 만큼만 참석하시면 됩니다.)

모임 장소 : 강화도 강화읍 국화리 188-2 재테크 부동산(강화도 강화산성 앞)




이번 모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7일 토요일 

16:00 ~ 18:00   말씀 나눔 1(빌레몬서)

18:00 ~ 19:00   석식

19:00 ~ 20:00   말씀 나눔 2(빌레문서)


18일 주일

10:00 ~ 12:00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오전 예배까지 하고 마칩니다.


연락처 

곽근태 010-3466-3650

김홍덕 010-3396-5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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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알려면(3)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7. 6. 11. 13:00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엄청난 모험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살아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살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태신앙’이라고 해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면서부터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모태신앙도 철이 들면서 자신이 가진 신앙에 대하여 검증을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시작하는 것이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과 같은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인생과 세상과 신앙을 자신의 안목과 가치관으로 보기 때문에 성경과 하나님이 생소해 보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것은 조건입니다. 


그래서 이 시작을 두고 성경은 “땅(인간)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생소함과 무지)은 깊음 위에 있고(무지함은 깊으며), 하나님의 신은 수면(모든 이론과 철학과 생각) 위에 운행하시니라(하나님의 말씀은 그 모든 물-철학과 이론-과 다르게 그 위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믿고 떠났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자신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을 자신의 삶의 본질로 삼았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가치관이 아닌 하나님의 안목을 자신의 안목으로 삼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으려는 마음, 성경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어디라도 떠나야 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설교를 비판하고 여러 외침들을 분석하면 그 설교와 외침들 중 어느 하나가 자신을 부지불식중에 하나님의 모든 것을 믿고 있는 상태로 옮겨 주기를 바라고 있다면 단언하건데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과 같은 부류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어디라도 따라가려 할 때 어떤 것을 따를 것인가에 대하여 앞선 두 개의 포스트에서 단서를 제시해 보았습니다. 이 글을 읽고 또 하나님을 믿고자하는 당신은 분명 사람일 것이기에 사람으로서, 또 당신이 가진 육신으로 살아가는 삶을 가진 이로서 지금 당장 가치관만 바꾸면 할 수 있는 것을 좇으라는 단서를 제시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저의 제안이지 모든 사람이 바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어느 것이라도 해 본다면 어느 것도 하지 않은 사람보다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 것입니다. 자신이 따라 나선 말씀의 진위 여부는 알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그것을 수용하고 따라 갈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그 하나는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처음 글에서 제시한 두 번째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어렵게 어떤 설교나 말씀을 따라 나섰는데 그것이 진리인지 어떻게 검증할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처음보다 더 어려울 것 같지만 만약 어떤 말씀을 따라 나설지에 대한 기준을 ‘사람인 자신이 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했다면 처음보다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했더라도 인내는 필요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몇 가지 믿음의 확신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변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면 네 안에서 생수가 넘쳐날 것”이라고 하셨고, 제자들에게 성령을 말씀하시면서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이 생각나고 깨달아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단순한 말씀이 아닙니다. 단순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에게와 또 제자들에게 깨달음을 주신 말씀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른다는 것이고, 성령이 자신에게 없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공부해야 아는 사람,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 사람, 매주 가서 성경에 대한 말씀을 들어야 되는 사람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성령이 없다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뿐 아니라 성경 대부분을 사람들은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합니다. 지킬 수 있겠다 싶으면 그대로 지키고 지키기 어렵거나 그렇게 하면 손해가 난다 싶으면 의미만 받습니다. 이런 관점은 여러 문제를 낳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누구는 할 수 있고 누구는 할 수 없는 것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목사, 신부, 수녀와 같은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의 생업을 교회나 성당이 책임지는 명분 중에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라는 것이 있을 정도면 틀리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수가성 여인에게 하신 말씀을 본다면,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너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군지 안다면’ 네 속에서 생수가 넘쳐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속에서 생수가 넘쳐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매주 설교를 준비해야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함에 있어 공부해야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잠시 준비해서 넣어 뒀다가 꺼내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보는데 자기 이야기 같지 않다면 이는 그 속에 성령이 거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이 계신다면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예수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다 알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성령도 예수님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들을 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증거>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서 그 증거가 나올 때 비로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믿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내 안에 믿음의 증거가 있고, 내가 그것을 인지할 수 있으며, 그 인지한 것이 분명한 것이라고 믿어지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고 확신할 수 있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믿음의 증거를 자아 밖에서 찾습니다. 이는 우선 출발이 잘못되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여정을 떠날 때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하여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할 수 없는 길을 시작하면 당연히 그 길에 대한 믿음 역시 남에게 의지해야 합니다. ‘어떤 유명한 목사님이 그러더라’는 식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하여 나선 사람은 얼마의 시간이 걸리긴 해도 언제나 믿음을 분별함이 자기 안에 있습니다. 결국 그런 분별이 자기 안에서 확신하는 바를 낳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어 그 나타나는 바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심긴 것이 있다는 것인데, 심겼다는 것은 나와 그 심긴 것의 정체성이 연결되고 일치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믿는 것을 확신하기 위하여 자기 밖의 증거를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자아 밖의 증거는 분명하고 공통되며 변치 않는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나의 자아 밖에 있는 증거는 어느 한 구석 분명히 나로선 할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믿음은 언젠가는 금이 가기 마련입니다.


유명한 목사님이 그렇게 말했기에 믿는다고 한다면, 일단 나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목사님이 유명해지는 과정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유명해지는 과정을 거쳐서 나온 말인데 그 과정이 없는 사람이 그 말만 듣고 그것을 믿으려 하면 언젠가는 한계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적을 믿으려 한다면 그것도 같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분명하게 나와 다른 믿을만한 능력이 있는 것 같지만 결국 나는 그렇게 할 수 없기에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시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기적을 행한다면야 이전에 그럴 수 없었는데 그렇게 된 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주장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무엇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이 내 안에 없는 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믿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믿어서도 안 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믿어야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면 내가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이 아니거나,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복음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그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이 아닙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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