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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은 미래가 많은 사람입니다. 많은 시간을 가졌고,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역량은 어떤 주권 아래에 있느냐에 따라서 크게 달라집니다. 시간과 힘을 자기 주원 아래에 두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자기 옳을 대로 행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그 시간과 힘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두면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자신들이 본 장로와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시간과 힘을 자기 주권 아래에 두면 교만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두면 겸손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자기 존재 정체성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 맡긴다는 것은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고 하는 것을 잘 보면, 계획과 시작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서 하나님께 맡긴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기대하는 결과를 하나님께서 책임을 질 것이라고 협박하는 것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맡긴다는 것은 인생이 그렇듯 시작에서부터 결과까지 다 맡기는 것입니다.


염려라는 것은 원래 기획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존재가 할 일 자체가 아닙니다. 염려하고 걱정한다는 것은 어떤 결과에 대한 기대가 있기에 그 기대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망과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는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염려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어떤 일에 자기가 옳을 대로 계획을 세웠거나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염려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겸손하다는 것은 곧 염려가 없는 상태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인생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기획도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자기 길을 계획해도 그 일을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하심이 그것입니다. 형식이라는 것은 내용이나 의가 가진 범주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순종만하면 되는 존재가 염려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 안에 염려가 있다면 그것이 이미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옳다고 여기는 바가 있어 그것이 이루어질지 아닐지 걱정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이라고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염려는 하나님의 의에서 비롯된 염려입니다. 그것은 겸손한 자, 곧 내용이신 하나님과 형식인 육신의 삶이 하나가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으로 표현하는 것에 관한 것이지, 자신이 세운 계획을 하나님께서 맡아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 주실 것임을 믿는 것이 맡기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러한 권면을 젊은 이들에게 하고 있는 것은 젊은 이들은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시간과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불확실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라는 것도 자기가 주권을 가지고 있을 때는 불확실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뜻에 순종하는 것이 본성이 된 사람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불확실한 것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무엇이라도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데 불확실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인생의 걱정과 근심도 같은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근신이라는 것은 자기 뜻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도 어떤 것에 대비하고 반응하기 위한 것입니다.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덫을 놓듯 우리 인생을 시험하시는 것이나, 마귀가 유혹하는 것에 대한 대비가 아닙니다. 어차피 그런 것을 이기는 것도 하나님의 힘이 있어야지 사람이 깨어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은 그런 것을 대비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행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마귀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우리의 의와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스스로 옳다고 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근신할 이유도 깨어 있을 이유도 없습니다. 계획이 우리 안에 있는데 깨어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근신해야 하는 이유와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일을 계획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며, 그것은 뜻을 세우신 이에게 순종하기 위하여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 한 육신의 정욕을 생각해보면 사람이 자기 육신의 평안을 바라고 추구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 가운데 있다면 깨어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깨지 않는 것이 육신이 더 평안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하여 다가올 영광을 위하여 지금 육신을 수고하는 것이라고도 하나, 그것도 목표는 장래의 육신의 평안이 목적이지, 육신을 소비하여 애매히 고난을 받기 위함은 아닌 것입니다.


이로 볼 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것은 하나님이 인생에게 주신 뜻에 순종함이요, 그 순종함은 고난을 받는 것이며, 그 고난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삶이며, 그것은 또한 우리가 지고 갈 우리의 십자가요, 그 십자가는 우리 육신이니, 우리의 육신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수고하는 형식과 소비재와 도구로서 창조의 목적을 좋아 예수님과 같이 낮아져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우리의 모든 것인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이고, 순종이며, 근신하고 깨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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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5:1-11) 젊은 자의 겸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6. 15. 10:09 Writer : 김홍덕

장로들에 이은 젊은 자들을 향한 베드로 사도의 권면은 순종에서 겸손으로 그리고 염려를 버리는 것으로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나 겸손한 자는 그 때가 되면 높이시니 장로들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그 능하신 손으로 높이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겸손이라는 것을 자기 자세를 낮추는 것이라고 일반화하여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마냥 자신을 낮추기만 한다고 겸손하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겸손이나 교만을 판단할 때 우리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 사람의 정체성이 있는데, 그것 이상으로 자신을 부풀려 이야기하면 교만이라 생각하고, 자기 정체성보다 필요 이상으로 낮추면 그것을 또한 겸손이라고 하지 않는 것에서 서로가 인식하는 그 사람의 수준이나 정체성을 기준으로 그 사람의 모습을 겸손이나 교만이라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겸손과 교만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겸손은 어디에 가서 마냥 자신을 낮게 표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장 겸손한 모습은 자기 정체성에 맞는 모습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속과 겉이 같은 사람이며, 겉과 속이 같다는 것은 속에 생명이 있어 그 생명의 본성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편으로 속에 있는 생명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본성이 있다면 그것이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유일한 것, 곧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것이 육신의 모든 행위로 나타나게 될 때에 그것이 가장 순종적인 것이고 또한 겸손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겸손이라고 한다면 교만은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성경에서 본다면 외식하는 자, 예수님께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이 바로 교만한 자들인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것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 생명으로 인하여 모든 행위가 비롯되므로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사람, 곧 그 안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 안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겸손이라는 것이 자기 정체성에 맞는 모습이기에 사람이란 존재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본성대로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셨기에 사람이 그리스도의 본성을 그 속에 가지고 있고, 그 본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일 때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온전한 겸손인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교만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든 목적대로 살지 않고 자기 옳은대로 사는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설사 그것이 일반적인 사회 관념상 아주 겸손하고 또 선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여겨 그렇게 산다면 그것은 보기에는 아주 겸손하고 선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자기가 옳다고 여겨서 그런 것이기에 교만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예수님께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한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삶의 모습은 지금 이 시대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경건하고 도덕적인 삶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순종과 겸손은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에 순종하는 사람은 그 목적, 곧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되어 그 본성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기에 그 모습은 자기 정체성에 가장 온전한 삶이 되니 그것이 바로 온전한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산다면 그것은 순종도 아닐뿐더러 그 모습이 아주 선하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 교만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겸손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겸손을 특별히 젊은 자들에게 당부하는 것은 우선은 젊은이들은 그 육신의 능력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실현하기에 충분할 뿐 아니라 성과도 나기 때문에 그것이 의로운 것이고 제대로 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젊다는 것은 시간적이 많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많다는 것은 가능성이 많기도 하지만 반대로 많은 시간이 남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젊은이들에게 겸손을 당부하면서 그 겸손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때가 되었을 때에 높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먼저 장로들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로들이 하는 것과 같이 순종하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장로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것과 같이 젊은이들도 그렇게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곧 그 젊음을 자기 옳은 대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젊음이 주는 능력을 장로들이 본을 보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에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장로들이 보여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여 증인이 되고 영광에 참여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에 순종하고,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이 바로 겸손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높이신다는 것입니다. 이 높이심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으니 하는 일이 잘 되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과 같이 그 삶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이는 자리에 간다는 것이며, 또한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심과 같이 그 정체성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성경이 말씀하시는 순종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에 순종함이요, 겸손은 그 자리에 적합한 삶을 사는 것이며, 높이심은 그리스도의 세계 안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아들의 모습을 보이는 자리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알고 보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낮아지는 것이고 죄인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권면하는 겸손에 관한 말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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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사도는 자신과 함께 고난의 증인이며 영광에 참여한 장로들에게 양을 먹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보통은 장로가 되어서, 혹은 장로가 되어야 양을 먹이는 것이라고 여긴다거나 장로로 여김을 받는 사람들은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훈계하고 가르치고 인도하라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말씀들, 부득이하게 하지 않고, 이익을 위하거나 또 주장하듯이 하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은 양을 먹이는 방법, 장로로서의 자세 정도로 여깁니다.


그러나 장로로서 양을 먹이는 가장 본질적인 모습은 바로 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이 된다는 것은 곧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앞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신 애매히 고난을 받는 것이 바로 본이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본이 된다는 것은 더 가진 사람이 가지지 않은 자를 위하여 몸소 수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교가 시범을 보이는 상황을 가지고 본다면, 시범을 보이는 조교는 이미 그 자세를 취할 수 있는 자인데 아직 그것을 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하여 육신이 수고하는 것입니다. 이미 할 수 있는 자가 아직 하지 못하는 자를 위하여 괜히(애매히) 육신을 소비하는 것이 바로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 사도와 함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장로가 되는 것과 양을 먹이는 것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장로여야 양을 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애매히 고난을 받는 자리에 참여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바로 장로요 그것이 곧 양을 먹이는 것이 되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애매한 고난을 받는다는 것, 그것이 바로 본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러한 장로들의 본을 젊은 자들도 본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젊은 자들에게 장로들에게 순복(종)하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장로들이 한 것과 같이 젊은이들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것을 장유유서의 개념과 비슷하게 여기면서 교회에서 장로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순종이라고 우기기도 하는데, 그것은 정말로 말 그대로 우기는 것일 뿐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말씀하시기를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먼저 장로들에게 본을 보이라고 한 다음의 말씀이기에 장로들이 본을 보인 것과 같이 젊은이들도 그렇게 애매한 고난을 순종함으로 받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은 베드로 사도가 베드로전서 1장에서부터 줄곧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의 본질적 기반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고 있는 이 법, 장로와 양을 먹이는 것과 젊은이들에게 순종하라는 이 모든 말씀은 바로 예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특별히 ‘양을 먹이라’고 하신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봤던 예수님의 모습과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었기에 그것을 표현하는 것일 뿐입니다. 자신이 예수님과 같이 살게 된 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삶에 자신이 순종하고 있는 것을 인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삶을 본 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께서 보이신 본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행위로 지은 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대신 벌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육신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모르는 죄에 대하여 몸소 그것을 보이심으로 그 모습을 본받는 이들이 육신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지 못하는 죄에서 해방되게 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사용법이라고 하니 좀 천해보일지 모르지만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바로 인생의 목적입니다. 인생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알면 분명히 육신을 가진 삶은 그것을 순종하고 자신도 그와 같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은 스스로 다른 사람들의 의 앞에 죄인이 되어 순종하고 수고하는 삶이므로 애매히 고난을 받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따라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곧 십자가요, 그 육신으로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 같이 의롭지만 죄인들의 주장 앞에 자신의 육신을 드려서 수고하고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 곧 육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예수님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장로들에게 고난의 증인이라고 하고, 본을 보이라고 하며 양을 먹일 것을 권면했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앞서 이야기 한 하나님을 믿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이들도 자기의 옳은 대로 행할 것이 아니라 장로들이 보이는 본을 자기 삶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고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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