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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사도가 자신과 같이 장로로서 양 무리를 칠 것을 권하면서 당부한 모습의 결국은 본이 되는 것입니다. 본이 된다는 것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하는 것입니다. 위인전을 읽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본이 되는 것은 위인전을 읽는 것과는 좀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위인전은 그것을 읽고 그렇게 되려고 한다고 모두 되는 것은 아니지만,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본이 되는 것은 사람이기만 하면 누구나 될 수 있는 모습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목자가 ‘양을 먹이고 치는 자’라고 하니 목자는 말만 하고 양은 그저 목자가 시키는 것이나 하는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의 전부가 아닙니다. 목자가 양을 칠 때에 지팡이로 저리 가라고 가리키기만 하거나 말로서 이리가라 저리 간다고 양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가 앞서서 가되, 양이 따라 가고자만 한다면 얼마든지 따라 갈 수 있는 길을 앞서서 가는 것이 진정한 목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목자라, 또 따라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칭 목자라고 하는 사람들을 따라 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다 목사가 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신앙을 고백이 아닌 공부를 해야 하는 것도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목자라는 사람들의 가르침이야 성경에 있는 것을 이야기 하니 상당부분 맞는 말일 수 있지만, 문제는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그것을 따라 갈 수 있느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니 단지 노력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면 이미 따라가기 힘든 것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믿음’이니 무조건 순종하는 것도 따라가기 힘든 것입니다. 사람이란 마음이 동하고 가는 길이 이해가 되어야 잘 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의 말씀은 일관성 있게 본을 보이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사람이 베드로와 같이 장로요 양을 치는 사람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따로 공부하거나 어떤 자격이나 재물이나 신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인생이기만 하면 누구나 다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따라가고자 하려만하면. 예수님께서 쉽다고 하셨고, 누구든지 믿고자 하면 된다고 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신들은 잘 모를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 뭔가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티를 내는 것이 그렇고,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천국이 예약되어 있으니 자신들의 말을 들어야 듣는 너희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하는 그 상황 속에는 뭔가 창고에 있는 것을 꺼내서 적선하듯 내어 주는듯한 묘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기독교인들을 보는 이들이 기독교인들 보고서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아! 나도 저렇게 되어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거나 아니면 ‘저 말을 들으니 내가 자유를 얻는구나!’와 같은 감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목자로서 양 무리를 치는 자가 되라고 한 말씀들을 보는 이, 듣는 이가 감동과 자유를 줄 수 있는 본이 됨이 없이, 단지 성경에서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 양을 치려고 나서는 것은 사람들이 원치 않는 압박을 받게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현재의 대한민국과 같이 종교의 자유가 있고,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사회에서 교회나 종교를 가졌다가 떠나는 것이 힘들거나 아주 어려운 것이 된다면 그게 양을 치는 것입니까? 공갈 협박이지.


생명이란 아무리 뭔가를 억지로 하게 하려 만들려고 해도 기본적으로 세포가, 또 유전자가 가진 것을 넘을 수 없습니다. 양이라고 해서 목자가 시키는 대로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양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도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이 생명입니다. 자신들이 목자로서 양을 치고 먹이고자 한다면 적어도 자신들이 먹이고 치는 양이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동하도록 하는 본을 보이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좋은 말로 양을 먹인다고 해도 그것은 그냥 소리 나는 꽹과리일 뿐인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그 창조물 중의 하나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을 것인지에 대하여 그 마음에 선택을 할 수 있게 하셨는데, 자신이 창조하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 예수 믿는 것을 강요할 수 없고, 양을 먹이고 친다는 목적으로 사람에게 또한 주장할 근거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 아들을 보내서 보이시고 그 본 바가 자기 마음 안에 심겨서 생명이 되어 고백하게 하신 하나님의 법과 같이 자신 역시 그 육신으로 다른 사람의 심령에 스스로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도록 본을 보이는 것 외에는 양을 치는 것도, 목자가 되는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는 목자가 양을 치는 것에 있어 여러 방법이 있는 중에 주장하듯 하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또 부득이하게 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자신과 같이 장로가 된 자,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사람들이 양을 친다고 하면 본이 되는 그 방법 하나 밖에 없기에 양을 치라고, 목자가 되라고 말하는 것은 곧 본을 보이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양을 치고 목자가 되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고, 그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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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37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8. 6. 11. 14:06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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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세계는 생명의 세계입니다. 그 생명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육신으로 생명을 가졌다는 생명의 세계를 보면 그 생명이 장성하여 혼자서 세상을 살기에 그 능력이 넘치는 성인들이 있고, 혼자서는 살기 힘든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도 있습니다. 육신의 생명의 세계가 그렇게 장성함의 차이가 있는 것은 영적인 세계에도 그런 차이가 있음을 설명하시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현상계에서 보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적 세계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세계에도 그런 일이 있끼 때문에 현상계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에서는 장성한 사람은 늘 노약자를 보호하려 합니다. 기본적으로 군대가 그렇습니다. 장성한 남자가 가진 역량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넘어 다른 사람을 보호할 정도의 역량을 가졌기에 나라를 지키고, 일반 사회에서도 노약자는 늘 보호를 받습니다. 그와 같이 영적인 세계에서도 그 영이 장성한 사람은 어린 생명들을 보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양을 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관점일 수 있는데 그 당연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지금 이 시대의 현상을 미리 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양을 치는 일에 있어 주장하듯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장하듯 하지 말라는 것은 자기가 가진 것을 기준으로 사람을 대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 대하여 더 밝은 사람이 그 밝음을 기준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셨지만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제자들을 기준으로,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신앙과 안목과 가치관에 자신을 맡기는 모습을 대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복음을 가진 분이시니 상하면 안 된다는 베드로의 주장과 같은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런 것이 거의 희석되었습니다. 목사가 설교 준비를 해야 하니 토요일에 결혼식을 피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주장하듯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진 자신을 기준으로 말씀을 전하는 시간과 방법을 정하는 것이 바로 주장하듯이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것이 중요한 것이니 돈을 모아서 그 생계를 보장한다면서 사례비를 주는 것은 엄연히 이(돈, 이익)를 위하여 양 무리를 치는 것이지만 이제 그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생명의 세계이기에 우리가 육신으로 가진 생명으로 장성한 생명을 가진 이가 연약한 자를 돌보고 희생하듯 하나님의 복음과 말씀 역시 그와 같은 것입니다. 갓난아기가 집에 있으면 모든 것을 아이 기준으로 맞추듯 영적 세계도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양 무리와 같은 어린 생명이 있으면 모든 것을 그 생명의 기준에 맞추어서 대하는 것이 베드로 사도가 주장하듯 하지 말고서 양 무리를 치라고 하신 말씀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지금 이 시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가 설령 자기들의 주장대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종이요 목자라고 해도 직업으로 자리한 것은 이제 더 이상의 논쟁의 가치도 없습니다. 그 보다 더 심각한 것은 말씀을 가졌다는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행하는 것,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가지고 장성했기에 그 주장대로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것, 그 마음으로 양 무리를 대하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세상의 모든 세계는 부자와 가난한 자와 같은 차이가 존재합니다. 학문의 세계에는 박사가 있는 반면 막 배우기 시작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하여 세상의 가치관은 더 가진 자의 가진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더 가질수록 더 많은 가치를 부여 받아 더 높은 연봉을 받습니다. 그러나 복음 곧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그와 전혀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을 선택해서 하늘로 들어 올린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이 오히려 땅으로 내려왔다는 것이 이미 반대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서 더 가지고, 먼저 알게 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로 되는 세계에서 자기 공로가 있어서 그렇게 될 리는 없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더 가지고 먼저 알게 되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가지지 못한 자를 위하여, 아직 알지 못하는 자를 위하여 종과 같이, 죄인과 같이 자기 육신의 모든 수고를 통하여 가진 것, 아는 것을 나누는 것을 위함일 뿐입니다. 그 하나 이외에 더 가지고, 먼저 알게 하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양을 치는 목자가 된다는 것 역시 이 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날 자칭 목자라는 목사들처럼 사례비를 받고, 교회에서 높은 곳에서 설교하며, 사람들의 신앙이 어떻다고 판단하면서 훈계나 하는 그런 것은 양을 치는 것이 아닙니다. 양을 친다는 것은 양과 같이 연약한 사람들이 보고서 스스로 돌이킬 수 있는 삶을 살고, 말씀을 전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더 수고하고, 육신을 드려서 섬기는 것이 바로 양을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목사와 같은 신분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모습인지를 십자가에서 보이신 대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보다 영혼이 연약하고, 아직 생명이 부족하거나 없는 이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과 같이 자기 육신의 삶으로 보이는 모든 삶의 모습이 바로 양 무리를 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삶의 모습, 곧 생명이 심령에 있어 그 심령의 본성을 살아가는 것은 말 그대로 생명의 법이고, 생명의 세계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양 무리를 먹이고 치는 것은 생명의 법에 의한 것이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본성을 인하여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부득이하게 하지 말라고 했고, 이익을 바라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 유전자로 살아가는데 부득이하게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유전자를 가지고 사람으로 사는 것을 위하여 이익을 추구하지도 않고 그렇지도 않듯,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 역시 같은 법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 그리스도의 생명이요, 양들에게 공급하는 생명은 그 자체가 낮아지는 세계며, 그 생명의 본성 자체가 이익을 취하거나 부득이하게 할 수 없는 생명입니다. 더욱이 생명이 생명다워지는데 어떻게 부득이하게, 아니면 억지로 하겠습니까? 사람이 사람 유전자로 사는 것이 억지거나 부득이한 일이 된다고 한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생명의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이 그렇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을 먹이고 친다는 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살면 자기보다 연약한 생명을 만날 때에 육신으로 그 어린 생명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본을 보이며 사는 것, 그 자체입니다. 양 무리라고 하는 것은 그런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때의 상황일 뿐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때에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본을 보이며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또한 장로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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