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9

(베드로전서 4:12-19) 하나님의 뜻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6. 3. 10:08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름 성경이라는 눈에 보이는 실존이 있어 그나마 뭐라고 답이라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모호합니다. 문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킨다는 것이 마치 심청전을 읽고서 효도란 부모를 위해 바다에 몸을 던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면 당연히 성경대로 사는 것도 성경에 나오는 문자대로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율법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신약은 문자대로 지키면 복음이고, 구약을 문자대로 지키면 율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기록한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지키려 하는 것이 바로 율법적인 것입니다. 그것대로 하면 성경을 지킨 것이고, 아니면 성경을 어긴 것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기도하러 산에 가는 것은 그나마 선한 측에 듭니다. 남에게 묻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할 때 그 하나님의 뜻을 자기 밖에서 찾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 것 같은 존재를 가늠하는 기준은 ‘신학을 했는가?’, ‘기도 많이 하는가?’, ‘신비한 능력이 있는가?’와 같은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알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의 정체입니다. 나의 일과 무관하게 하나님이 어떤 생각을 가지셨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알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뜻을 묻는 대상조차 교회에 다니는 사람으로서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찾는 것입니다. 목사를 찾는다면 더 큰 교회의 목사를 선호하고, 목사가 아니라면 세상에서 더 성공한 장로나 지위를 가진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다른 것 볼 것 없습니다. 사경회나, 부흥회 혹은 간증 집회 할 때 어떤 사람을 부르는지 보면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뜻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근원적인 생각과 뜻이 아니라, 자기가 하려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가 궁금한 것입니다. 대학원을 가는 것과 취업 중에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을 지켜 행하는 것도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하여 자신이 기대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거래를 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자기 마음에는 이미 정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뜻대로 될 것인지 하나님의 보증을 얻고자 하는 것이고, 그것을 담보하기 위하여 성경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심청전의 예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어겨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심청전이 말하는 효심이 있으면 상황에 따라 부모를 위하여 목숨도 바칠 수 있는 것이듯,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를 알고 그것을 자신의 의와 생명으로 삼으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오히려 어기려고 해도 어길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 밖에 있는 존재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을 이유가 없습니다. ‘어느 대학을 갈까요?’와 같은 심지어 교회 목사에게 ‘신혼여행 어디로 갈까요?’와 같은 것을 물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사람 안에 잉태되듯 내재하는 것이고, 그 생명이 자기 안에 있으면 생수가 배에서 흘러넘친다고 하심과 같이 자기 안에 늘 충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생을 향한 근원적인 뜻이 무엇인지만 들으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계획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물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생이란 존재에게 가진 뜻만 들으려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들어 자기 생명이 되면 그 삶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고난>은 어떤 면에서 보면 다분히 육신을 가진 삶 전반을 이야기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인생들은 기본적으로 육신을 가진 삶을 <곤고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육신이라는 한계 안에 수용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다 이루지 못하는 그 괴리가 바로 인생이 가진 곤고함의 근원입니다.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다 되면 인생을 고난으로 여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은 이 육신이 가졌기에 겪는 곤고함을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곤고함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맘대로 되지 않는 이 육신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뜻하신 바가 있기에 우리의 뜻이 아닌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있는 것으로 알아 이 육신을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존재가 될 것인지를 사람이 선택하므로 그 선택에 따라 그리스도의 삶이 될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자기가 뜻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도울지 그 뜻을 알고자 하는 인생이 될 것인지 극명하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앞선 글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고난>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과 인생의 난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육신의 수고로움 전부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이야기하는 고난의 이야기이도 합니다. 도둑질이나 악행으로 고난을 받지 말라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우리 육신이 바라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어떤 뜻을 가졌는지 궁금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성경의 행간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 안에 우리가 육신을 가진 이유가 있습니다. 이 육신을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으로 소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의와 뜻과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흔히들 이야기 하는 하나님의 뜻, 곧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묻고 궁금해 하는 것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시고 조성하셔서 이 세상에 보내신 뜻이 없기 때문에 궁금한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나님의 뜻일까 궁리하는 것도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기본적인 뜻과 의가 없기 때문에 하는 궁리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하나님의 뜻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 누구에게 물어서 그 뜻을 얻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구하고 궁금해 한 하나님의 뜻이 목숨을 건 선교에 관한 것이어도 아무 소용이 없고, 하나님 앞에 뜻을 구하는 것이 아주 겸손해서 어린아이에게서 그 뜻을 발견했다고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며, 천 없는 신학자나 유명한 목사나 신비한 능력자에게 듣고 순종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기본은 자기 안에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유일하고 기본이며 전부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신앙과 교회의 변질 4 – 생명의 교회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8. 6. 2. 13:49 Writer : 김홍덕

지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부분의 교회의 예배시간에 듣는 설교는 행위의 도덕성에 대한 모범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라는 설교거나, 크고 높고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초인간적 능력이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목적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육신의 평안과 성공에 있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센티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된 것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이나 좋은 신앙의 열매라고 이야기하지 않는 교회도 분명히 있다. 물론 많지 않고, 어떤 부분에서는 기존의 교단으로부터 이단이라는 의심을 받을 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기에 대중적 보편성을 신앙의 정통성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다소 불안감을 주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인생을 걸어야 하는 일임을 아는 이들에게는 한 번은 검토해볼 수 있는 교회들도 있다. 이런 교회들은 진정한 생명의 세계를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생명의 세계를 누리는 교회는 거대하기 어렵다. 거대해질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 어렵다. 신천지나 순복음교회와 같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교회나 절에 가서 비는 모든 것은 결국 세상에서의 성공과, 원치 않는 일을 당치 않는 것인데, 그런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 생명의 세계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앞서 몇 편의 글에서 이야기한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아는 교회들의 타락은 타락이라기보다 그냥 하나님을 빙자하여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노력을 하는 노릇과 시늉을 하다가 변질된 것이기에 그런 것을 타락이나 변질이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런 교회나 신앙은 타락이 아니라 원래부터 타락의 상태와 죄와 사망의 상태에 있었을 뿐이다. 단지 바리새인들과 같이 성경을 행위로 지켜보려고 종교적 계율을 자신들의 윤리규범으로 지키려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다 지치거나 버린 것뿐이다. 예수님께서 노릇이라고 한 것과 같이.


그러나 생명의 세계에는 타락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성경에서도 양심에 화인을 맞은 자, 성령을 훼방하는 자와 같이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로 나온다. 양심에 화인을 맞았다면 양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성령을 훼방하려면 성령의 정체를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양심과 성령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서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용서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것을 알고도 버렸는데 다른 대안은 없는 것이다.


생명을 알고서 타락하는 자들은 앞선 글에서 비유한 것으로 보면 결혼을 한 사람이다. 결혼한 상태에서의 불륜이나 부정이기에 이는 결혼에 대한 타락을 이야기한다. 반면에 결혼하지 않은 상태의 문란함은 성적인 문란이기는 하지만 간통이나 불륜은 해당되지 않는 것과 같다. 생명을 알지 못한 세계에서 율법을 지키는 노릇을 하는 자들이나 교회는 양심이나 성령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을 버리고 훼방하고자 해도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생명을 알고 난 다음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그러나 생명을 알고 그것을 나누는 교회는 일반적인 윤리 기준을 신앙의 근간으로 삼지 않는다. 이것은 영지주의처럼 외면하거나 포기하거나 무시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행위에 대한 윤리 기준이나 사회적 규범의 준수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아는 이들에게는 생명으로 잉태된 사람이면 그 생명을 본성대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자연스레 지키게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생명의 본성이 그리스도의 본성이니, 그리스도의 본성이 속에 있고, 그 본성으로 인한 행위가 나온다면 그것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 본성이기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악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하나님의 생명에 의한 본성으로 사는데 그것이 악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때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이의 삶을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은 단지 그들이 하나님과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심령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 곧 온전한 교회요 하나님 나라는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윤리적 문제에 대하여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본성만 있으면 그것에서 비롯된 모든 삶의 모습을 용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용납의 모습은 생명의 장성함에 따라 다르다. 어린 아이는 똥오줌을 가리지 못한다. 이는 길이나 방이나 어디서나 용변을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부모가 일일이 수고하여 그것을 치우고 씻기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도 그 생명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수용하는 수고를 감당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교회에 안에서 봉사고 섬기는 것이고, 더 장성한 자가 어린 자를 인하여 육신을 수고하는 십자가를 진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이 있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런 생명의 모습을 가진 교회는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교회와는 전혀 다르다. 우선 교회의 생성부터 다르다. 위가 흔히 교회라고 하는 교회들은 교회의 설립 요건을 갖춘 다음에 건물을 빌리거나 건축하고서 사람들을 모은다. 그 설립 요건이라는 것이 신앙을 공부한 목사라는 라이센스가 중심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진정 생명이 있는 교회는 목사라는 라이센스 중심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서 만나고, 그리고 모이면서부터 교회가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이면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름은 정체성이니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모이면 그곳이 바로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생명은 자연 발생적이고, 속에 있는 본성에 이끌려서 사는 존재다. 기계는 밖에서 주는 명령에 의하여 움직인다. 방향이 반대다. 만들고 성장하는 것도 반대다. 생명은 먹기만 하면 속에서 밖으로 자란다. 반대로 기계나 제조물을 크게 하려면 밖에 덧붙이거나 새로 만들어야 한다. 이 중에서 가장 핵심적은 것은 인위적이지 않고 그 본성을 좇아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이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그 본성에 이끌려서 동일한 생명을 찾는 것 이외에 모이는 목적이 있을 수 없다. 사람도 그렇고 군집을 이루어 생활하는 모든 생명체가 혼자가 되면 자기와 동일한 생명을 찾는 것을 가장 먼저 한다. 그리고 동일한 생명을 찾는 목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동일한 생명을 찾아서 만나고 그 다음에 무리가 또 사회가 생기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 있는 교회의 모습이다. 타락을 논하려면 먼저 이런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교회는 이렇지 않다. 먼저 목사나 전도사와 같이 신앙을 학문으로 공부하고 그 세계에서 경쟁을 해서 잘 구축된 교회에 선출되어 가거나, 아니면 자기의 역량과 자격을 바탕으로 교회를 먼저 세운다. 그리고 사람을 모은다. 앞서 생명과 기계를 비교했을 때 기계의 모습과 같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우리가 아는 교회의 상당수는 생명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렇듯 먼저 교회를 세우고 사람을 모으면 오는 사람들은 다 그 교회를 세운 사람의 정체성과 궤를 같이하는 목적을 가지고 온다. 교회를 세운 이들이 경쟁에서 이겨 높은 곳에 올라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자, 곧 목사다. 물론 그들이 경쟁하는 분야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세계다. 그래서 경건할 것 같지만, 이미 정체성이 온전하지 않다.


그렇게 교회를 세우고서 사람을 모으니 사람들도 다들 세상의 경쟁에서 하나님을 빌어 이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다. 그들의 말로 타락했다하기 전에 세상을 이기고자 하는 분야가 윤리와 도덕 그리고 청렴과 같은 것이라서 경건한 줄로 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모두 간첩의 선행과 같다. 존재가 하나님께 적합하지 않은데, 그 존재의 정체성과 목적이 세상에서의 경쟁에서 이겨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가고자 하는 존재들인데 그 행위가 성경을 다 지킨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다 자기들의 행위가 기준과 처음에서 점점 멀어져 보이면 타락했다고 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의지로 자기 행위를 단속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나, 그런 타락은 반복적으로 이야기했듯 정체가 드러났고, 결혼도 한 적이 없는 이와 같이 타락을 논할 존재가 된 적도 없는 자들이기에 불륜이라 할 수 있는 타락을 논하는 것 마저 건방지고 교만한 것이다. 


타락을 논하려면 먼저 생명이 있어야 한다. 불륜을 논하려면 결혼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이. 결혼하지 않고 난잡한 성생활을 하는 것은 문란한 사생활일 뿐 불륜은 아니듯, 생명의 교회가 되어본 적도 없는 교회와 신앙은 세상이 지탄하는 짓거리를 한다고 타락이 아니라, 그냥 그들의 죄가 더 문란해진 것뿐인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사람들은 참 열심히들 삽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삶은 죽지 못해서 사는 것입니다. 삶이 긍정적일 수 있으려면 삶의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다들 목적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게 알고 보면 아주 흐릿한 것들뿐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나, 권력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 그것이 삶의 목적인 것으로 아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추구하는 것이 어느 정도가 되어야 자기 목적을 달성했는지 모릅니다. 그걸 모르니 부자는 계속 돈을 더 모으고, 권력자는 영구적인 지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은 다들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신이 평안해지는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돈과 권력은 자기 육신을 덜 움직여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취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아주 유명하고 그럴듯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인즉슨 힘 있는 젊을 때 육신을 수고해야 나이 들어서는 육신이 평안해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육신의 상태 = 인생의 가치>라고 여기는 까닭입니다. 즉 육신을 삶의 본질로 보는 것입니다. 육신을 근간으로 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적인 가치, 정치적 이념이나 논리나 정책과 같은 것은 우선은 육신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지만 그런 것이 추구하는 바가 결국 <육신을 가진 인생>에게 뭔가 더해지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지 육신을 가진 인생을 어디에 쓸 것인지가 아닌 것입니다. 다 젊어서 고생해서 늙어서 평안해지고자 하는 것과 같이 철학적, 정치적 가치를 통해서 결국은 육신을 가진 인생을 평안하게 하고 그 가치를 더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들거나 사용하는 모든 것을 존재 자체가 아닌 그것의 존재 목적을 본질로 여깁니다. 그 존재의 목적이 상실된 것은 가치 없는 것으로, 목적을 소진한 것은 쓰레기라고 해서 버립니다. 인생이 사용하고 인지하는 모든 것 중에서 존재 자체를 본질로 여기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삶, 그 자체뿐입니다. 육신을 가진 인생, 육신에 기인한 혈연과 각종 이념과 가치는 모두 어떤 것을 위하여 있는 것인데, 그것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삶을 본질로 여기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자기 육신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평안해지는 것을 바라고, 그것을 위하여 유용하다고 검증된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육신은 유한합니다. 유한하다는 것은 소비가 된다는 것이고, 소비한다는 것은 어떤 목적을 위하여 소비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 그 자체라고 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고 몸부림치고 있지만, 인생은 자기가 뜻하여 살게 된 것이 아니라는 그 하나의 의미만 제대로 알아도 자기가 인지한 것을 바탕으로 자신이 부여한 모든 것이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을 주셨다(롬 1:19)고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적어도 인생이 자신이 뜻한 대로 육신의 삶을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 하나만 바로 인식하고 인정해도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를 인정하지 않으니 자기 뜻으로 나지 않은 삶이 금수저니, 또 남자니 여자니 하면 자기 뜻으로 나지 않은 실존을 인식하면서부터 그것이 마치 자기의 의로움 인양 자기 존재를 기반으로 모든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인생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자기 좋을 대로 행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모습이 선악과 사건이 전개되는 시점에서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다는 것의 단초이기도 한 것입니다. 자기가 만들지도 조성하지도 않은 인생을 자기 것이라고, 존엄하다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서 존재하게 된 자아를 바탕으로 그 자아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주장합니다. 금수저가 부자 노릇하는 것이나, 여자는 여권신장을, 동성애자(사실 동성애는 우울증과 같은 정신병의 일종)는 성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분명히 주신이가 있습니다. 진화론이 있기는 하지만 인생 자신도 존재 목적을 모르는데, 미개한 생명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진화했는지 목적 없는 진화에서 자기 존재의 근원을 찾고 싶은 미개함을 신봉하거나, 아니면 자신과 같이 자기 인생을 선택하여 난 것이 아닌 인생의 수도나 깨달음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자기 존재의 정체성과 가치를 부여하려고 하는 초등적 사고가 아니라면 적어도 자기 존재를 조성하신 이가 있음을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 하나님을 믿느냐 아니냐의 믿음의 기본적 근간이 조성되는 것입니다. 사람도 목적 없이는 이쑤시개 하나도 만들지 않는데 하물며 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생일까 생각할 정도는 되어야 그나마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믿음에 따라 이해가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을 도구로 여기는 사람 등으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에 대한 목적을 가지신 분으로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삶의 주(主)이심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도구로 여긴다는 것은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세상의 모든 가치관과 같이 육신의 평안이 하나님의 복이요, 세상의 성공이요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인데 역으로 하나님을 도구로 아니 이 또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은 우리가 가진 이 육신 가진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는 것인 우리 육신의 용도와 목적은 하나님이 뜻하신 목적을 위하여 소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육신을 평안케 하고 보전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고, 육신의 삶이 영광을 얻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야 했다면 예수님은 세상 부러울 것 없는 권세와 부와 영화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렇게 오시지 않았던 우리의 인생도 평안해져서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돈을 벌고 권력을 얻어서 몸이 평안해지면 교회에 잘 나갈 수 있게 된다고 하는 것도 어리석음입니다. 오늘 생명을 취하시면 어떻게 할 것인지도 문제지만, 권력과 돈을 좇던 이들은 멈추지 않고, 때로 멈춘 듯 교회로 오면 교회에서 또 지시하는 자리에 가기 마련입니다. 오히려 이 육신이 더 수고하고 쇠잔할수록 하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손때 묻은 것에 상당한 가치를 부여합니다. 손때가 묻었다고 할 정도로 애착을 가지고 사용한 것은 그 물건의 목적대로 잘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의도한 목적을 이행하기에 너무 적합하다보니 자주 사용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그 모습은 낡고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지만 그럴수록 더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이 평안해지고 말끔하고 좋은 지위와 많은 부로서 육신을 덜 사용하는 것에 인생의 본질이나 행복이나 만족이나 성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하나님께서 조성하실 때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image)을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즉 목적을 위한 도구요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위하여 육신을 소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육신의 소비가 육신을 가진 존재에게는 고난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려고 하면 예수님과 같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럴 이유가 세상 가치관 안에서는 전혀 없는데 이상하게 의를 가진 이가 의를 가지지 않은 존재를 위하여 육신을 소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 하나를 알지 못하면 고난도 거저 참고 견디면 육신이 바라는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담보하는 과정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것은 그런 관점이 아닙니다. 우리 육신을 어떻게 소비할 것인지, 육신을 가진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바로 알고 있는 이들에게 고난을 이야기하고 있는 베드로 사도의 권면은 바로 십자가의 삶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을 감당하는 것, 곧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들의 삶은 육신을 소비하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나타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의 진정한 의미도 하나님의 영광도 이것 하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 분이면 모르겠지만.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