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9

최근 개봉했던 <어밴저스 인피니트 워>라는 영화에는 타노스라는 악당이 나오는데, 그 악당의 주장은 온 우주에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문제가 심각하니 무작위로 우주 인구의 반을 죽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손가락만 튕겨도 우주의 반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려고 6개의 인피니트 스톤이라는 것을 모으고 실행에 옮깁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정말로 어이없는 모순이 있습니다. 우주의 반을 손가락만 튕겨서 죽일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 능력으로 식량문제를 해결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잠깐 서서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어이없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대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에도 이런 것이 비일비재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고 제대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시며 실수도 않으시는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바로 잡아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해프닝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고난에도 동일하게 녹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마지막 부분인 10절에서 고난을 잠깐 받으면(견디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고 견고하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고난에 대하여 이 세상 살 동안 고난을 잘 견디면 하나님께서 그 보상으로 천국의 복락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너무 상식적인 개념이 되어서 누구 하나 그것을 의심해 보지 않지만, 이것은 앞서 이야기 한 역설적인 면과 궤를 같이 합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그 육신에 각종 욕망을 주시고, 또 자기 생각을 다 구현할 수 없는 연약한 육신을 주신 다음에 그 욕망을 어떻게 이겨내는지, 또 연약한 육신을 어떻게 강하게 단련하고 수련을 하는지를 평가하신 다음에 그에 상응하는 보응을 이 땅에서도 주시고 더 나아가서 죽은 다음에 그 수고의 등급을 기준으로 크게는 고래 등과 같은 기와집을 상급으로 주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힘든 과정을 겪을 때에 하나님께 얼마나 의지하는지를 보시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지에 스스로 자긍심을 느끼시는 하나님으로 여깁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면 도와주신다는 것을 앞서 이야기한 욕망의 억제와 연약함의 극복을 도우시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타로스의 모순과 같습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욕망을 다스려야 온전해지고, 연약함을 기도와 수련으로 더 강해지고 온전해지며, 성경도 지식적으로 공부해야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인간은 처음 만들 때 불량품이거나 완성되지 않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재공품 상태로 태어나게 해서 살면서 완성품이 되어야 온전해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며, 사람을 만들고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이 뭐가 좋았는지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고를 정말로 하나님의 섭리라고 본다면 하나님은 쥐를 잡아 놓고 죽이지 않고 가지고 놀고 있는 고양이와 같은 분일뿐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라는 것을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극복하기 힘든 인생살이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어떻게 이겨내는지를 보시고 그 이겨내는 행위와 공로를 기준으로 그 인생의 믿음을 평가하시고 또 죽어서까지 상과 벌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볼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겪는 삶을 잠깐의 고난으로 보고서 이생에서의 고난을 잘 이기면 하나님께서 영원히 영광된 삶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른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을 넘어 정말로 하나님을 알고 나면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인지 놀랄 정도의 어두운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가치관은 결국 <행위로 의로워지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또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런 고난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각종 시험을 주신다거나, 인생으로서 성경대로 삶을 살기에 힘든 조건들, 육신 안에 있는 욕망이나 연약함과 같은 조건들로 인하여 곤고한 삶을 살게 하고 그것을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여 극복하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으로 이겨내고 영광을 얻으려면 행위의 공로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고난을 이겨내서 얻는 것이 육신의 평안이나 세상에서의 성취라면 그것은 고난을 이겨내는 것은 투자일 뿐 믿음은 아닌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에 대하여 성경이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나 금욕적인 수련이나 또 손해를 억지로 감수하거나 신념으로 견디는 행위로 이겨내거나 맞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수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몸을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욕망을 극복하고 자기 이익을 구하는 유혹을 이겨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 인생의 정체성을 아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 같이 이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수고하고 섬기는 것을 위하여 주심을 아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 순종은 세상이 추구하는 위로 올라가셔 의로운 것과 반대이며, 몸이 평안할수록 복을 받았다는 가치관과는 반대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고, 또 고난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고난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예수를 믿기 때문에, 아니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일(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회사의 동료들이 일하는 일요일에 교회에 가느라 받게 되는 불이익이나 비난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과는 다른 삶이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관을 자기의 의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그 삶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다른 삶을 사는 이유가 성경을 지키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을 인함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큰 차이는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하는 큰 교회(덩치가 큰 것이 아니라 큰 것이 좋고 영광이라 여기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성경을 지키지 않고 게으르고 즐거움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것을 억제하거나, 아니면 그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시키는 대로 했다는 <선택>을 이야기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므로 그런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은 늘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늘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듯 성공률 100%가 아닙니다. 또한 선택이라는 것 자체가 시간이 지나면서 틀린 것이 되기도 하고, 어떤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는 악한 일이 되기도 하는 등 온전하지 않습니다. 이런 구멍이 숭숭 뚫린 신학적 관점이다 보니 ‘사람은 연약해서…’라는 절대적인 면피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동시에 그 조건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수고하게 합니다. 그래서 신앙이 학문이 되고, 또 성경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선 글들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고난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서울역 광장에서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다 듣게 되는 비난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고난은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이 옳다고 여기는 높이 올라가고, 많이 가지게 되는 것과 반대로 낮아지고, 섬기는 자리로 가며, 세상의 사람들이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주장(하나님을 주장하는 것 역시 같은 것)하나 오히려 자가가 가진 그 옳은 의가 옳지 않은 세상의 의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인 것입니다.


또한 성경이 말씀하시는, 지금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고난은 억지로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명의 본성에 의한 것입니다. 즉 어떤 선택을 앞에 두고서 성경이 말씀한 대로 선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심한 듯 살아도 성경을 지킬 수밖에 없는 생명의 본성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낮아지고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는 것이 본성을 인함이라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바로 예수님이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본성인 것입니다.


여기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크게 착각을 하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세상에 알리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에 있어서 자신이 하나님을 옳다고 여기는 그 의는 예외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의 의를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요일에 교회 가는 것, 제사 지내지 않는 것, 밥 먹을 때 기도하는 것과 같이 기독교인으로서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것에는 절대로 양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은 어떻게 보면 좋은 신앙인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 닥칠 손해나 위험이나 벌을 감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이나 힘이나 권력 앞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신념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는 버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끌려가신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신의 의일 뿐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며 모든 술자리를 피하여 자기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 이들은 십자가를 질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잡으러 온 군사들을 이길 힘이 없어서 잡혀 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끌려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정체성, 하나님에 대하여 누구보다 더 온전히 알고 있는 그 모든 것까지 버릴 수 있을 때, 그것을 버림으로 육신의 수고와 고난이 있음에도 본성에 이끌려서 그 자리로 가는 그것이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정리해보면 이 고난은 본성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각성한 상태에서 믿음이라 왜곡된 신념으로 선택한 어떤 선택으로 인한 손해나 곤고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본성을 좇아 살다보니 낮아지고, 하나님의 의조차 버려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해내는 삶을 사는 그것이 베드로 사도가 또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인 것입니다.


이 고난은 육신으로 사는 동안 고난을 당하고 죽어서 천국에서 보상 받는 그런 시험이나 테스트가 아닙니다. 이 고난은 그 자체가 감사함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바보 같고 어리석고 괜히 힘들게 사는데 그것을 감사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으로 낮아지는 것을 영광으로 알 수 있는 생명의 안목이 있기에 그것을 감사하고 즐기는 것입니다.


고난은 영광을 얻기 위한 시험이나 테스나 자격 검증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육신을 가진 인생의 삶 그 자체입니다. 그러면 인생은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냐?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좇아서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보면 고난과 같은 것입니다. 육신을 수고하고 십자가에 드리기까지 하니 분명한 고난이기는 하나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그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평안이요 영광인 것입니다. 


이것을 평안과 영광으로 아는 것도 그것을 평안과 영광으로 보는 안목을 가진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썩은 고기가 늑대라는 생명에게는 양식으로 보이지만 양은 피하는 것이 되는 것은 생명이 다르기 때문임과 같습니다. 육신의 평안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음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영광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을 받고 그 삶을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강함이며 영광이며 온전함인 것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로마서 09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로마서 Date : 2018. 6. 17. 07:08 Writer : 김홍덕


'미디어 말씀 파일 > 로마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08  (0) 2018.06.03
로마서 07  (0) 2018.06.03
로마서 05  (0) 2018.06.01
로마서 04  (0) 2018.06.01
로마서 03  (0) 2018.05.30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