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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고) 새치기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8. 7. 3. 10:19 Writer : 김홍덕

운전을 하다 보면 도로가 복잡해서나, 길이 익숙치 않아서 끼어들기를 해야 할 때가 있다. 다행이 내가 들어가려는 차선에 차들이 없고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 약간 급하게 차선을 변경해도 무리가 없지만, 그런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들어가려는 차선이 복잡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경우 먼저 새치기를 생각한다. 그리고 도시에서 운전을 많이 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 그게 가능하다. 철없는 남자들은 그렇게 잘 끼어드는 것을 운전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운전이야 잘 한다고 할 수 있지만 말 그대로 철없고 인격이 부족함을 자랑하는 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새치기를 하는 이유는 사실 단 하나다. 멀리 가서 유턴을 하기 싫기 때문이다. 지금 있는 교차로에서 좌회전 차선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다음 교차로에 가서 유턴을 해야 하는데, 도심 도로가 모든 교차로에서 유턴을 허용하는 것도 아니고, 다음 교차로에 갔을 때 또 얼마나 밀릴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소소한 상황에 십자가를 지는 삶의 모습이 나올 수 있다. 바로 무리하지 않고 멀리 가서 불편을 감수하고 유턴을 해 오는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불편하고, 모든 것을 빨리하는 것이 효율적이며,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반대로 운전 못하는 비아냥을 들을 수도 있지만 남들의 기분이 나쁘지 않고 또 안전하게 멀리 가서 유턴해 오는 것이 바로 육신을 수고하는 것에 내어주는 십자가의 삶이라는 것이다.


새치기를 시도하려고 하면 이미 차선에 있는 사람들은 넣어 주지 않으려고 차를 바짝 붙이곤 한다. 그들이 그러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을 좇기 때문이다. 빨리 가고 또 세상이 정한 법률이나 규칙안에서 선점한 것은 침해당하지 않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정의롭다. 그러나 그것은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갈 때 의로워지는 세상의 가치관 안에서의 정의이다.


반면에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자기 육신을 좀 더 수고하게 하는 것이다. 좌회전을 놓칠 상황에 새치기를 할 것이 아니라 좀 더 멀리 돌아 가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육신도, 육신에게 주어진 시간도 좀 더 소비하는 것이다. 다들 세상이 추구하는 ‘더 빠르게’라는 정의에 동참하지 못하는 패자 혹은 죄인이 되는 것에 스스로를 내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것이다.


이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정체성만 있으면 도둑질 해도 되냐?’고 물어 온다. 그 중에는 대학교수와 같은 학식 있는 사람도 있고, 목회자도 있었다. 난 그들은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바보요 사기꾼이라 생각한다. 십자가의 도를 알고, 그것이 자기 본성이 된 사람의 삶은 앞서 이야기했듯 세상이 추구하는 것에 반해도 조금 더 자기 육신의 수고를 감당하는 것이다. 


그런 삶이 본성에서 비롯된다는데, 그 본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라는데, 그리고 본성이라는 것이 있으면 그 본성에 맞는 행위가 나오는 것은 당연지사인데 이 중 그 어느 하나도 알지도 믿지도 못하는 주제에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일 뿐인 것이다.


돌아보면 우리의 삶에는 이렇듯 작은 순간, 일상처럼 흔한 그 순간에도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이면 할 수 있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 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말 그대로 일상이기에 자기 안에 본성이 그렇지 않다면, 그러니까 거듭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항상 그렇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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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고) 설탕과 소금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8. 7. 2. 22:52 Writer : 김홍덕

젊은 부부가 삶은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는 것이 맞는지, 소금에 찍어 먹는 것이 맞는지를 다투다가 다툼이 커져서 결국 이혼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건이 실재 사건이라고 하니 나도 그런가 보다 생각하다. 물론 많은 글이나 대화 속에서 인용한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기에 사람들은 ‘그런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나?’고 조롱하듯 반문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자를 찍어 먹는 것은 설탕이냐 소금이냐 다툰 사람들과 똑 같은 행동을 매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그것을 다들 알고 있다면 그곳은 분명히 천국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웃기는 사건은 성경이 말하는 선악과를 먹은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낸다. 선악과라는 것은 결국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가치관을 가졌다는 것이다. 한 사람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고,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것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기준은 바로 자신의 의로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면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주장에 나를 맡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세상에서 더 이상의 의로움이나 선함이 없는데, 오히려 존재의 하나님을 행위로 믿는 유대인들이 가진(먹은) 선악의 기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다. 옳지 않은 의로움이지만 <너>가 주장하는 의에 몸을 맡긴 것이 십자가인 것이다.


삶은 감자를 어릴 적부터 설탕에 찍어 먹었던 사람에게 삶은 감자를 소금에 찍어 먹는 것은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수용하려면 육신이 괴로울 것이다. 입에 맞지도 않고, 먹은 것 같지도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입에 맞지 않는 소금에 찍은 감자를 먹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지 않는 것을 자기 육신으로 수용할 본성이 없었던 것이다.


그 부부가 기독교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확률적으로 20% 이상의 확률을 가지고 있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다.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다. 오늘 하루를 돌아볼 때 누군가와 다투었고, 어떤 일에 짜증나고 화를 내었던 것이 있다면 그 사건을 생각해보자. 다투고 짜증나고 화를 내었던 이유가 ‘내 맘대로 되지 않았서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아마 100% 그랬을 것이다. 


그게 바로 선악과를 먹은 모습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것은 십자가를 버린 모습이다. 십자가는 남의 의에 나를 맡기는 것이고, 그로 인하여 내 육신을 수고로움에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투었던 것, 짜증 냈던 것, 그 일에서 내가 육신으로 한 번 더 수고하기만 했다면 아마 그럴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게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그러므로 삶은 감자를 소금에 찍어 먹는 것이 옳은지, 설탕에 찍어 먹는 것이 옳은지를 다투다가 이혼한 사람들이 별난 것이 아니다. 오늘을 살면서 내 몸을 상대가 옳다는 것대로 한 번 더 수고하기 싫어서 다투고 짜증내고 화내고 있다면 그 이혼한 부부와 같은 사람이다. 선악과는 먹었고, 십자가는 버려 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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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교회의 변질 8 – 타락의 본 모습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8. 7. 2. 22:17 Writer : 김홍덕

기독교 신앙 세계 안에서 ‘타락’은 기본적으로 선악과의 사건을 이야기한다. 이는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이 교회가 행위 규범의 신앙을 지양하다가 그 행위에서 이탈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세상이 가진 기준을 신앙으로 충족시키는 것이 신앙이라 여기고 그것을 설교하고 노력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과 교회가 그 노력의 결실을 맺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지탄이 대상이 되는 자리로 떨어진 것을 타락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자리 이동일 뿐이다. 드러날 것이 드러난 것일 뿐이다.


근원적으로 <타락>은 신앙의 행위가 변질되거나, 신앙의 이론이나 신학 혹은 교리가 변질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행위는 결국 그 신앙의 교리나 신학에서 비롯된다.) 근원적인 타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 타락이다. 따라서 세상이 옳게 여기는 예의, 도덕, 정당한 노력에 의한 성공, 여유를 기부하는 삶과 같은 것을 앙망하면서 하나님의 믿어 그런 자리에 오르는 것이 좋은 신앙이고, 또한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에 부합되는지를 돌아보았을 때, 그것이 아니라면 그런 신앙 안에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타락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신앙은 하나님의 의와 뜻에 맞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 왜냐하면 그것은 행위의 신앙이기 때문이다.반면에 하나님은 행위의 어떠함을 의롭게 여기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다.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의 문제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게 판단하시는 기준인 것이다. 행위는 결국 존재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행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의 타락을 이야기할 때 교회가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를 일으켰는지, 교회의 목사나 장로가 어떤 불법이나 문제되는 행동을 하였는지를 가지고 이야기할 것이 아니다. 그것을 타락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결국 행위를 의로 여기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과 다른 기준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그런 가치관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성경이 말씀하시는 <타락>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독교 신앙 혹은 교회의 타락을 말할 때에 그 행위나 행사가 법적,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 기준을 이탈한 것을 기준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다. 신앙이 타락했는지 아닌지는 그 신앙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신앙과 교회가 무엇을 의롭게 여기는지, 무엇을 본질로 여기는지를 보고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교회는 이미 다 타락한 교회이고 신앙이다. 그것은 신앙의 본질이 우리 인생이 무엇인지, 우리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하나님 앞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사람들과 가치가 옳다고 여기는 자리에 이르기 위하여 하나님의 힘을 빌리는 것이 신앙의 뿌리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는 것,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적는 신분으로서 큰 상을 수상할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 세상의 성공을 위하여 반칙하고 싶을 때 성경을 떠 올리면서 억제하고 참는 것을 경건한 것이라고 여기는 이 모든 것이 바로 그 뿌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상이 옳다는 자리에 하나님의 의를 빌리려 하는 것일 뿐이다. 성경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담보한다고 성경을 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본질적이고 진정한 타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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