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9

옷을 찢고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8. 6. 26. 09:57 Writer : 김홍덕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니 정확하게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교회에 다니는 것은 엄연히 예수를 믿는 것과는 다르다. 또한 예수님은 한 분이시기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 있어서 믿음의 온전성은 변수지만 믿음의 대상은 상수다. 자신이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든 예수님의 정체성은 온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도 상수라고 하기 어렵고, 다니는 목적 역시 상수는 아니다.


교회를 다니는 목적이나 예수를 믿는 목적은 사실 상수가 아니다. 다들 자기들 만의 목적이 있다. 구원을 포함하여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준다는 것을 믿는 것에서부터 정치적인 목적까지 다양하다. 물론 자기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수용하는 것임을 믿는 사람도 있다. 그런 믿음은 수동적인 믿음이다. 구원과 천국을 포함하여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이나 구원을 비롯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거래다. 하나님께서 천국과 구원을 약속하신 것은 그 약속이 본질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계획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육신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그 삶 자체가 천국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이것을 느낄 수 없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이 인생을 고난으로 여기는 괴로움에서의 구원이고, 그 삶이 사후까지 연장되는 것이 천국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 동안은 곤고하고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한다. 웃기는 것은 죽음은 흔히들 착하게 살면 천국이나 극락에 간다고 생각하듯 이 세상 삶의 연장이지 전환, 그것도 세상에서는 고생하면 죽어서는 평안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는 생각과 같이 이 세상과 사후의 삶이 연장선 상에 있다고 여기려면 모든 방면에서 그러해야 하는 것이지, 착한 행실로 착한 행실을 한 사람에 대한 보상이 있는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면서, 이 세상을 고난으로 여긴 삶이 죽어서는 기쁨이 된다는 전환은 서로 다른 개념인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단 한 가지 근거는 이 세상의 고생이 천국의 보상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백한 거래기도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이것이 바로 <행위로 의로워지는 신앙>의 본질적 모습인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메커니즘은 어이없게도 부족한 신앙에 대한 문제 의식을 희석시킨다. 행위로 온전할 수 없다는 것을 노력의 부족함을 용납하는 변명으로 용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성경을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육신이 연약해서 그것을 다 지킬 수 없고, 이것은 인간으로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신앙을 정의하고 있기에 때로 부족한 것을 앞으로 잘 할 것이라는 고백과 전제만 있다면 용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가지고 온 더 큰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에 삶을 올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을 성경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라는 개념 아래에 있으면 노력은 지속적인 것이기에 지금 좀 부족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노력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족하기에 하는 행위인데 지금 이 시간 예수 믿는 것에 올인할 동기부여가 매우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항상 부족한 상태와 동행한다는 것은 문제를 전부로 보지 않는 것이고, 그런 관점에서 신앙은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옵션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지금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선 행위 규범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인생의 옵션이 아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문제도 아니며,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다 이루지 않아도 괜찮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하심을 잊으면 안 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에 기본적이고 절대적으로 내가 누구인지의 문제이며, 그것은 인생 전체의 문제이다. 즉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문제이다.


하나님을 믿기에 성경을 지키려고 하는 노력들이 온전하지 못하고 인생이 연약하다는 핑계로 늘 노력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신앙이기에 신앙을 삶의 일부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누가 좀 더 노력하는지, 그래서 목사나 장로가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따지는 것이 존재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 신앙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는 없다. 천국? 못 간다. 구원? 없다. 생명? 그게 뭔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을 것이면 바로 믿고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그럴 값이 아니라면 그냥 세상을 즐기면서 사는게 낫다. 어차피 구원도 못 받는데 삶을 경건이란 이름의 구속을 하나 더 당하면서 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렇게 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어 구원을 얻고 천국가야 할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 사는 이유와 의미를 알고 삶이 감사하고 만족과 안식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신앙을 하나의 옵션처럼 여겨서는 곤란하다.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이 선명해지지 않고, 삶이 만족스럽고 감사하지 않다면, 단지 닥치는 문제와 고난을 예수의 이름으로 이겨내려 투쟁하는 것이 지금의 삶이라면 모든 것을 버리고 먼저 자기 삶의 의미 곧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여야 한다. 옷을 찢고, 또 옷을 버려 두고서 예수님이 보이신 길을 좇아야 한다. 삶의 모든 형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버림과 올인은 삶의 모양과 형식에 관한 것이 아니다. 형식을 버리는 것, 삶의 형식을 버리라고 하는데 삶의 모양인 직업이나 생업이나 사회를 버리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바보다. 버릴 것이 삶의 형식이라고 여기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행위로 믿는 것이고, 형식을 본질로 보는 것이다.


삶의 모든 형식,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직업을 버릴 것이 아니라, 직업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할 것인지를 간구해야 한다. 성경을 의문스런 부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의 이야기가 되기를 간구하여야 한다. 이런 간절함 없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오히려 예수를 조롱하는 것이다. 육신을 십자가에 버린 주님을 따라간다면서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욕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구약시대에는 회개를 할 때 옷을 찢고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 섰다고 했다.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겉 옷(형식과 삶의 지위를 상징)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았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입고 있는 옷, 곧 하고 있는 사업과 영위하는 삶의 풍요와 안정을 기도하고 간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사망과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여기를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진심으로…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교회나 신앙의 타락은 기본적으로 그 정체성의 변질이 논제가 되어야 하지만 보통은 그 행위의 변질이 척도가 되고 있다. 이것은 잘못된 것, 아니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 행위가 척도가 된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정체성을 떠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변질이나 타락을 논하기 어렵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회에서 종교의 타락과 변질을 이야기할 때 이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이젠 사전적 의미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타락이나 신앙의 변질은 행위의 변질이나 타락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행위로서 의로워지려고 나아가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타락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사람들이 자기 옳을 대로 행하는 것이며, 간음한 것이며, 타락한 것이며 여호와의 신이 떠난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비유된 불륜의 예로 본다면 하나님과 혼인(하나님의 의가 내용이 되고 자기 삶이 형식이 되는 하나됨)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가는 모든 인생이 바로 문란한 자들이며 그런 모든 사람의 삶이 다 타락한 것이고 범죄한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말하는 <큰 교회>가 사회적인 기준이나 심지어 법적인 기준을 넘어서는 타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온전한 곳에 있다가 타락한 것이 아니라 원래 타락한 자리에서 타락한 자리로 옮겨간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한 마디로 회 칠한 무덤의 회 칠이 벗겨진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타락의 관점으로 본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형식으로 살도록 지으신 것을 떠난 그 자체가 타락인 것이다.


바로 앞선 포스트에서 칼의 비유에서도 그렇다. 칼을 만들기 위하 철이 칼이 되지 않고 다른 것이 되었을 때 그것은 존재의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그 상태에서는 제 아무리 대단한 것이 되어도 칼로 만들기로 한 주인의 의와 뜻으로 볼 때 타락이고 죄악인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타락이라는 개념을 재 정립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타락은 목적을 이탈한 것이지 행위가 나빠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무거운 짐이고,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개념을 수용하기에 큰 교회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명시해 둔 것이다. 그들에게 타락은 오직 행위의 변질에 입각한 것으로만 여겨질 것이기에 목적에서 떠난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이므로 이러한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장님이 색(color)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생명은 그 생명으로 나고 난 다음에는 다시 다른 생명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생명의 아버지고, 하나님의 의로 거듭난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생명으로 난 사람을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다고 하신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다는 것이 생명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거나 아니거나 하는 것이지, 반만 그리스도인이라 하거나, 아직 부족하니 노력할 뿐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생명의 법을 모르는 소리다.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큰 교회에서 말하듯 사람은 부족하니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할 뿐이라고 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생명이 아니라는 자백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타락과 변질은 근원적인 문제로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을 본질로 알고 그것을 세상과 자기 삶의 내용으로 순종하고 채워서 그 본성으로 사는 것에서 떠나서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고서 성경을 행위로 지켜내려고 하는 신앙을 가졌다는 그 자체가 근원적인 타락이다. 교회나 종교인이 세상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거나 법을 어기는 것과 같이 행동의 변질을 타락이나 변질로 볼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원래 타락한 상태에서 그냥 칠한 것이 벗겨진 것이고, 감추려 했던 것이 드러난 것일 뿐인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베드로전서 5:12-14) 끝 인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6. 23. 13:37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이 흔히 베드로전서는 고난 받는 성도들을 향한 위로라고 말합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것은 틀리지 않은 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아니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난은 사뭇 다릅니다. 먼저 사람들은 인생을 자기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대로, 마치 자신이 이 인생을 설계한 것인 양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생은 자신이 설계한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가만히 있는 것도 자기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겪는 모든 갈등을 고난이라고 하고, 그래서 <인생은 고(苦)>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은 앞서 아주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는다는 것은 인생이 자기의 기획으로 시작된 것이 아님을 알고 뜻하시고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겠다는 것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이 고난입니다. 이것이 고난인 이유는 앞서 너무 많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다시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성경은 단 한 가지 맥락에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한 가지는 육신을 가진 인생은 그 육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같이 우리 모든 인생도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인생이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살 때 구원이고 하나님의 아들이고, 무엇보다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순종하느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사람들의 의지에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을 로봇이나 아바타와 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강제할 수 없어서 자유 의지를 주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강제된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 사람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선택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사람들이 선택할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 본을 보이신 예수님께서 자신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표면적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힘을 빌리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해 왔고,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삶을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자기 안에 있어서 자신들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기 위하여 종과 같이 섬기고 죄인이 되어 육신을 소비하고 드리는 삶을 사는 그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가치관에서 보면 어이없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런 삶에서 벗어나 보라고 조롱을 받는 것입니다. 모두들 성공이라는 크고 넓은 문을 향하여 달려서 피라미드의 꼭대로 가면서 그 다툼에서 이겨내는 것을 성공이며 복이며 은혜로 여기는데, 그 반대로 가는 모습이야 말로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고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난의 삶이 영광과 권세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베드로 사도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베드로 사도만의 관점이 아닙니다. 모든 사도들의 관점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생명이 큰 문을 행해 달려가는 자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다르기에 영광도 권세도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교회들이 세상에서의 권세를 얻어서 교회를 영화롭게 하고, 그 권세를 자랑하며 전도하고, 교회가 하나님의 일이라고 채색한 일들을 잘 추진할 수 있게 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 다른 생명의 세계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마지막에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신데, 그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권력이라고는 전혀 없고, 오히려 그 세상의 권력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죄인으로 처형된 분인데 이 권력이 세상의 권력일 리가 없는 것입니다.(그럼에도 이 시대의 교회들이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참 어이없는 일) 그러므로 예수님이 권력으로 또 그것이 영원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지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또 그것을 권력으로 아는 생명을 가지지 않고서는 그것을 은혜로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아무리 증거를 해도 그 증거가 자기 심령에서 생명이 되지 않았다면 이 또한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그저 자신들이 사업이나 자녀나 건강에 대하여 기도하는 입장에서 그것들이 무난히 흘러가는 것을 보거나 아니면 바람대로 될 때 그것을 은혜로 여기고 감사하는 안목으로는 세상의 기준으로 죄인이 되는 것(십자가)을 은혜로, 권력으로, 또 감사로 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생을 고난 자체로 여기는 것에 출발해서 그것을 감하여 주시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 안목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고난은 인생은 정말로 감사하고 또 예수님께서 보이신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 육신의 삶을 삶에 있어 육신을 좀 더 수고하고, 넘쳐나는 자기가 옳다는 주장들 앞에서 죄인이 되어서 살아가는 그 애매하고 괜스런 삶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입니다.


베드로전서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까지 많은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체계적인 준비가 없었던 탓도 있을 것이지만 그 내용의 깊음을 지속적으로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라 여깁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다들 고달프게 여길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글을 통하여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곤고하게 여기는 것은 단지, 축구를 제 아무리 잘하고 좋아하는 사람도 축구하는 동안 숨이 차는 것과 같은 것일 뿐입니다. 인생은 정말로 감사하고 또 예수님께서 보이신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 육신의 삶을 삶에 있어 육신을 좀 더 수고하고, 넘쳐나는 자기가 옳다는 주장들 앞에서 죄인이 되어서 살아가는 그 애매하고 괜스런 삶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을 자기 삶으로 여기는 모든 이들이 그 삶에 숨겨진 영광을 발견하기 바라고, 그것이 진정한 권세임을 또한 알기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입맞춤으로 문안하는, 즉 그 삶을 나누어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참교회가 이 글들을 통하여 세워지기를 바라며, 저 또한 베드로 사도의 바람과 같이 이 고난을 짊어진 모든 분들에게 평강과 삶의 안식과 삶이 감사한 생활을 기원합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