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9

교회에 조금만 다녔다면 ‘이 세상은 그림자’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림자라는 것은 본체가 있어야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은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 블로그에서는 <내용과 형식>이라고 표현했다. 이 세상과 사람과 모든 존재하는 것은 목적이 있기에 그 목적을 나타낼 형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질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 곧 존재의 목적이 본질인 것이다.


이것을 알고 세상이 그림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의가 본질이고 그것이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야고보서에서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고 하심은 하나님은 본체이심을 세상은 그 그림자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히브리서기자와 배울 사도가 골로새서에서 율법을 그림자로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본체가 있으면 율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블로그에서는 그리스도의 생명만 있으면 성경을 다 지키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블로그의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실 성경은 행동 강령이 아니다. 이는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께서 <행위나 소유>의 하나님 아니시기 때문이다. 신의 정체성이나 성격이 그 신앙의 근간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 이름이 ‘여호와’고 그 뜻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름이 정체성이라는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자신을 믿는 존재의 행동이나 소유의 드림을 의로 여기시는 분이라는 것이 전혀 없고, 오히려 ‘있다’라는 것이 그 정체성이신 분이다. 즉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행동 강령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그에 기초한 신앙이나 공동체 역시 그 정체성이 존재적인 관점이어야 한다. 무엇을 하느냐가 쟁점이 아니라 ‘너는 누구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네가 어디(정체성)에 있느냐?’과 같은 것이 쟁점인 것이다. 그것을 기조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무엇’에는 기도나 교리 문답이나 교회에 다니는 것과 같은 것도 포함된 것이다. 이것을 간과하는 교회나 신앙이 앞서 이야기 한 결혼도 하지 않은 큰 교회의 신앙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와 신앙의 타락과 변질에 있어서 근원적인 것은 그 존재의 정체성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교회가 어떤 짓을 했다거나, 목사가 어떤 추악한 짓을 했다는 것이 교회나 신앙의 타락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타락은 정체성의 상실인 것이지, 그림자와 같은 형식이나 행동의 어떠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말씀 앞에 어리석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러면 그리스도의 정체성만 가지면(혹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도둑질을 해도 괜찮은가?’라는 반문을 한다. 이런 질문은 어쩌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가장 어리석은 말 중의 하나일지 모른다. 그 말인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 도둑질도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 질문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더욱이 목사나 대학교수로서 장로나 집사가 된 자와 같이 똑똑하다는 자가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그 가치관이 행위를 의로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그림자 이야기로 돌아와서 보면 이렇듯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그림자 곧 형식만 보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신약 성경을 읽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행위 규범, 곧 율법적 신앙이 아닌 것으로 아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이다. (또 이 말을 듣고 ‘그럼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냐?’고 반문하는 어리석음까지 설명하기엔 지면이 부족하다.) 이러한 문제는 그림자를 본질로 아는 것으로 여기는 어두움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맹인을 고치셨다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그림자를 본질로 보는 그 안목을 고치셨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는 것은 반대로 이 세상이 그림자인 것을 안다면 예수님을 만난 것이고,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림자라는 것을 알 것이며, 그것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육신으로 인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의 본질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섣불리 보인다고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아마 신학 꽤나 만지작 그렸다는 것에 기대어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보인다면 우리 인생이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상태로 났다는 것이 인정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온전한 상태로 태어났다는 것이 인정된다는 것은 율법적인 신앙 관점, 그림자를 본질로 보는 어두운 안목으로 타락이라 규정한 것들이 재해석 될 것이고, 새롭게 보일 것이다. 이는 타락이 온전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타락이라는 것이 행위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정체성에서 기인된 것이며, 정체성이라는 것을 온전히 안다면 우리는 완전한 것이 아니라 온전한 것이라는 것을 또한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그게 생명의 법이기 때문이다. 


온전한 것은 행위의 부족함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방에서 사용하는 칼은 그 정체성이 식재료를 다듬고 잘라서 요리하는데 사용하는 목적 하에 날카로운 본성을 가지고 있다. 이 정체성은 분명 요리하는데 사용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칼을 다루다 보면 손을 베이기도 하는데 그렇게 칼이 손에 살짝 베었다고 타락이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사람과 신앙과 삶과 교회에 대하여 아무렇지 않게 적용되고 이해되는 지경이 되어야 진정으로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본질을 벗어난 타락이 무엇인지, 그리고 온전함은 또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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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교회에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흔히 교회라고 하는 곳은 건물 위에 네온사인으로 십자가를 걸어 놓았고, 내부적으로는 신학이라는 학문으로 공하고 경쟁하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목회자라고 높은 곳에서 서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된 일이며, 그렇게 세상 사람들과 남다른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며 그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대로 행동하고 살아야 한다고 설교하는 교회를 말한다. 이런 교회를 나는 규모에 관계없이 <큰 교회>라고 지칭한다. 크고 높은 곳을 지향한다는 의미이다.


이 큰 교회는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선 글에서 비유했듯 이 큰 교회들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이기에 그들의 타락은 문란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온전한 자리에 오른 적이 없기에 불륜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즉 결혼한 적도 없는 처녀 혹은 총각과 같은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타락이 불륜이라고 할 때 큰 교회가 세상의 가치관을 좇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타락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즉 지금부터 이야기는 온전한 생명을 아는 교회들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는 것은 온전한 교회를 맛 본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 글들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까지는 가능하고, 때로 그 내용에 감정적인 흥분이나 분노 혹은 동의는 가겠지만 그런다고 자신들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임을 분명히 해 둔다. 지난 일요일에도 앞서 이야기 한 큰 교회에 다녀왔다면 알 수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교회는 먼저 생명이 있어야 한다. 생명의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에 생명이 없을 수 있겠는가 싶겠지만, 교회의 태생에서 그 교회의 생명력을 가늠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자신과 동일한 사람을 찾아서 모이게 되었다면 생명이 있는 교회지만, 그렇지 않고 형식과 절차에 따라 설립(設立)되었다면 생명이 없는 ‘조직교회’라 할 수 있다. 생명은 속에서부터 나고 로봇과 기계와 같은 제조물은 틀이 정해진 상태에서 조립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은 고유한 본성이 있고, 그 본성이 가진 ‘다움’이 있다. 사과라는 생명은 그 나무와 열매를 특성 짓는 본성이 있다. 나무의 어떠함과 꽃의 어떠함과 또 사과 열매의 어떠함이 있다. 그것은 유전자(본성)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나무와 열매를 보면 ‘이건 사과다!’고 할 수 있는 고유한 특성이 바로 유전자로부터 온 본성이다. 이 블로그에서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나타나는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그리스도의 본성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말은 언어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속심령을 표현한 모든 것을 말한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이 사람이 세상에서의 성공이 인생의 목적인지, 아니면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소비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려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 사람의 기도제목을 보면 알 수 있고,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바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의 행동과 말은 그 사람 속에 있는 의와 가치관이 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블로그에 글이 1,500개가 다 되어 가는데 어쩌면 이때까지는 여기 까지만 설명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생명에 대하여 본성을 이야기해 왔는데 그것이 ‘여기까지’라는 것이다. 생명은 그 본성대로 표현하는 것이 있고, 그리고 표현된 생명이 그 생명 다운 것인지는 연속된 다음 단계지만 또 다른 깊은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사람으로 치면 태어날 때 사람이라는 유전자를 가지고 나서 죽지만 않으면 사람이라는 동물적 행동, 유전적인 본성을 표현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사람이 사람답게, 또 사회가 바라는 것을 수용하는 사람다움을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관점인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 가치관이 큰 교회의 신앙과는 다르다.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 삶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의 간절한 추구와 거리를 둔다. 그것은 생명의 본성에서 기인된 것이다. 도무지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귀하게 여길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이 크고 높은 것을 추구하는 것에 회의가 들거나, 그것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나서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 것은 신념이지만 이것은 생명의 법이다. 마음에 동의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신념은 좌절이 있지만 생명을 인함은 좌절이 없다. 항상 그렇다.


그런데, 그렇다고 다 된 것은 아니다. 물론 생명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한정하여서 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신앙적 문제로 본다면 구원을 받았느냐 아니냥의 문제로만 신앙을 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편의 글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구원은 시작이지 끝이 아니라고 언급했듯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의 삶이 거기서 그치는 것이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서 생명이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의를 가진,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그 자신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을 찾고 만나서 교회가 되었을 때 생명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진정 생명이 있는 교회의 출발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시작한 교회는 성도들 서로에게 하나님의 생명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비로소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라가 되면 그 나라가 지향하는 것이 있고, 통치가 있으며 통치는 그 나라 다운 모습을 요구하고 구성원은 그것을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본성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통치가 순종되는 것이다. 말을 듣고 판단하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의 유전자에 순종하는 것과 같은 순종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가 생명의 온전함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세운 교회가 된다. 하지만 신학이나 교회법에 의하여 총회나 노회의 규정에 의하여 설립된 교회는 제도가 세운 교회지 하나님이 세운 교회가 아니다. 그래서 이 글부터는 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미리 언급을 했던 것이다. 그런 교회는 사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그건 그냥 조직이고, 조직 공동체며, 종교단체일 뿐이다.


다시 돌아와서 생명은 그 생명의 본성이 있고, 또 본성들이 서로 공감하는 생명다움이 있다. 생명이 있는 교회가 타락이나 변질이 된다면 그것은 먼저 그 생명다움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생명다움의 상실을 회복하지 못하면 생명사회에서의 도태적 성격의 격리를 당할 것이다. 그리고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은 교회도 개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런 것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생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자기 안에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시는 본성이 있어야 한다. 그 본성이 있다면 적어도 그리스도의 본성만 있으면 된다는 말씀 앞에 ‘그러면 그리스도의 본성만 있으면 죄를 지어도 되느냐?’와 같은 의문이 생기거나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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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여러 각도에서 함축된 표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와 같은.(물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종교의 범주로 격하 시킬 수는 없지만.) 그 하나의 표현을 하자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육신을 가진 우리의 삶을 어떻게 인식할 것이냐의 문제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진 인생이기에 이 인생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을 믿겠다는 것은 이 인생의 모든 의미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이 가진 육신으로 사는 인생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성경이 시작되면서부터 제기된 문제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도 이 육신으로 사는 삶이 하나님이 주신 삶이라고 인식하면서부터 자기 삶이 하나님의 세계로 열리는 것이고, 많은 이들이 각양의 의견을 내어 놓는 선악과도 이 육신을 어떤 관점으로 볼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 육신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기에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세계인 사람에게 인생은 감사한 것이기에 만족의 동산 에덴에서 살고 있는 것이며, 육신으로 에덴동산에서 산 사람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육신에 대한 관점은 예수님이 오셔서 아주 명확하게 보이셨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진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이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는데 천사와 같이 신비한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들과 같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에서부터 그 의미가 놀라운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육신을 드리셔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심으로써 우리의 육신은 인생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에 사용되는 것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육신을 가진 인생을 사는 이유와 의미를 보이신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가 육신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하여 명확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육신이 더 평안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르치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고 이를 위하여 신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이유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육신은 보존하고 평안해져서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소비하면 할수록 복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 육신은 명확하게 <소비재>입니다. 단 한 번 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이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은 ‘죽어서 천국’이라는 연장선을 그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장선입니다. 즉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산 삶의 모습과 의미 그대로 죽어서 천국이든 지옥이든 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곤고한 중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평안해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땅에서의 삶을 고난이라 여기기에 죽어서도 곤고한 삶이 될 것이고, 이 땅에서의 삶이 육신이 소비되고 연약해질수록 영광스럽고 감사하게 여기며 산 사람은 역시 고난이 없는 천국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소비재라면 그것은 어떤 목적 하에서 소비되는 것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의 구분이 생기는 것입니다.(그래서 굽이 갈라진 짐승을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 같이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에 소비되는 것임에 순종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육신이 평안해질수록 하나님께서 혹은 자기가 믿는 신이 복을 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나, 육신이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하여 육신을 소비(정확히는 허비)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1서)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모두 육신이 기준이 되어 육신을 허비하는 것을 이야기하심입니다. 육신이 평안을 바라니 내일 육신이 평안해지기 위하여 오늘 수고하는 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수고하니 이 인생이 곤고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일의 평안을 위하여 아니면 내일 벌을 받지 않기 위하여 오늘 육신의 본능을 제어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모든 것이 이 세계인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지키는 모든 것이 바로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고 율법신앙인 것입니다. 바로 흔히들 이야기하는 구약시대의 신앙인 것입니다. 지키려는 말씀이 신약이냐 구약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이 구약이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삶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시고, 내일 일을 염려할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으로 살아가는 이 삶이 하나님의 의도 아래서 창조된 것이라는 것을 온전히 믿는 사람은 이 삶이 깃든 육신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소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육신을 소비재로 여기자니 인생을 하찮게 보는 것 같지만 그 소비가 전능하신 하나님과 하나 되는 소비라면 그 보다 거룩하고 영광스럽고 고귀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이 어느 날 자기 삶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을 위하여 소비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날이 바로 하나님의 태초가 열리는 날이 되는 것이고,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의, 우리 육신을 소비하는 목적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이신 십자가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를 가진 인생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더 이상 의로울 수 없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두운 인생들이 각자 육신의 정욕을 좇아 자기 옳은 대로 판단하고 행하는 선악과를 먹고서 자기가 조성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주신 자기 삶에 대하여 하나님과 같이 주관하며 사는 자들의 주장에 끌려가서 그들의 주장대로 육신을 드리는 종과 같이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우리가 육신을 가진 이유이자 목적이자 의미인 것이며, 소비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 삶은 육신을 소비하는 것이기에 육신의 수고를 곤고함과 고난으로 여기는 인생들의 관점에서 보면 고난인데, 그 고난을 받을 이유를 살피자면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매 맞는 것 같으니 애매한 고난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 애매한 고난을 베드로가 볼 때 그러지 않아도, 아니 그러면 안 되는 것 같은 예수님의 끌려가심과 같아서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었기에 그 생명의 본성에 이끌려서 사는 모습일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양을 치는 것을 본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은 길거리에서 예수 믿으라고 외치다 받는 조롱이나, 지친 몸을 이끌고 안 가면 벌을 받을 것 같아서, 아들 사업이 안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새벽 기도회를 가는 곤고함이나, 주일 지킨답시고 회사 동료들 일할 때 교회에 가므로 당하는 불이익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은 육신을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에 소비하는 삶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을 수고하는 것에 소비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곤고한 것이기에 고난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도들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육신을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진정한 영광이고, 감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인생은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그 자체로서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것인 것입니다. 그게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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