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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먹을까?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1. 1. 3. 20:42 Writer : 김홍덕

새해다.

또 습관처럼 어떻게 한 해를 살 것인지 생각한다.

생각의 속살은 육신의 먹고, 입고, 마시며, 자는 것이다.

 

문득 생각해 봤다.

사람은 '부활'과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 중에 어느 것을 더 믿을까?

 

부활은 당장 현실적이지도 않고 믿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는 늘 걱정하는 것으로 불신이 드러난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걱정스럽던 <내일>이 <어제>가 되면

언제나 하나님의 경륜에 놀라고 감사하는 오늘들을 살면서도

내일을 늘 걱정한다.

아직 밥 굶은 적 없으면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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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고 있다.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본다면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신앙에 허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매번 기도할 때마다 회개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나,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주셨다고 하셨는데 자기 삶이 평안하지 않다는 것도 그렇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할 것도 없다. 천국은 죄 없는 자가 간다는 것을 알기에 매일 회개하고 후회하는 자신이 과연 천국에 갈 수 있는지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앞서 열거한 고민들은 일반적이지 않다. 가끔 불연 듯 생각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문제로 알고 해결하기 위해 길을 나서는 경우는 사실 거의 없다. 그나마도 이런 고민들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상고가 있는 사람들 중 일부의 이야기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그것에 좀 열심을 가져보면 마주하는 많은 의문들이 있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산다는 것이다. 그 의문이 구원이라는 신앙의 근원적 문제인줄 알면서도.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인생의 일부나 삶의 한 옵션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생을 거는 일이다. 어떤 신이 나의 창조주요 주권을 가지신 분이라고 믿는다는 것은 당연히 인생 전부를 걸어야 하는 일이다. 나의 주관자를 대하는데 그것이 내 인생의 일부에 해당하는 일이 될 수는 없다. 사람들이 인생의 성공을 위해 공부하고 일을 열심히 하는 것과 동일한 목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공부하는 것이나 일을 열심히 하는 것과 그 격이 같은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여정에서는 반드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한 번은 낯설어야 할지 모른다. 아니 그래야 한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 믿는 믿음은 인생의 성공을 위해 하는 공부와 같은 것이다. 그런 신앙은 당연히 세상에서 높은 곳을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낮아지신 예수님은 당연히 이상하게 다가와야 한다. 높은 곳을 지양하는 자신이 낮아져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자신의 목적을 구하고 있다는 것을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겨야 한다. 그런 자신이 이상하지 않다는 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염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육신으로는 예수님과 같아질 수도 없고 성경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오늘날 신앙인들과는 달리 자신들과 동일한 육신을 가진 초라한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었던 제자들조차 낯설었던 십자가를 지시는 그리스도였다. 그런데 세상에서 이기고 성공하는 것을 예수님께 구하면서 그것을 좋은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은 파렴치함 그 자체다. 문제는 파렴치함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멸망이다.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구함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자기 암시나 신념일 뿐이다. 낮아지신 그리스도에게 높은 곳으로 이끌어 달라고 기도하면서 스스로 그 모순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착각이 아니면 다른 것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인생이 걸린 문제를 착각 속에 둘 수는 없다. 말 그대로 이건 인생이 걸린 문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생이 걸린 문제

 

육신 가진 인생으로 나서 왜 인생으로 창조했는지 말하는 유일한 존재인 하나님을 삶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하나의 옵션처럼 믿는다는 것은 낭비이자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우리가 왜 인생으로 사는지에 대한 이유를 가지신 분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그 목적을 말씀하셨다. 이 정도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전부다. 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분명히 높은 곳을 추구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높아지는 것은 끝도, 좌표도 없고 성공했다는 이도 없다. 그러나 낮아지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누구나 알 수 있다. 높아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지만 모두가 추구한다. 하지만 낮아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앙망하는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자리로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그것이 우리 인생의 본질이고 목적임을 보이셨다.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것을 모두가 바라는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갔다면 분명히 이상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성경대로 사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구원 없는 사망이다.

 

이 글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낮고 낮은 십자가로 가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생경한 모습이었는지 상기하기를 바라는 글이다. 낮아지는 예수님이 낯설게 여겨진다는 것은 자신이 높은 곳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각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온전한 신앙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 시작은 생명의 세계이므로 시작이 곧 온전함이다. 그 생명의 잉태하심을 이끄신 성령께서 온전하게 시작되는 그리스도라는 본성대로 사는 삶을 이끄실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특히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기를 바라는 이들의 이정표다.

 

지금 이전에도 많은 이들이 그 낯선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중요한 것이기에 그것을 전하고 말하며 기록했다. 그와 같은 사람의 노력은 거듭난 사람의 본성이다. 그리스도의 본성이다. 그리스도로 난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렇게 할 것이다. 그 본성에 여러분을 오늘 다시 초대해 본다. 높은 곳만 향해가던 삶에 지친 모두가 낯선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바란다.

 

 

이번 글을 끝으로 <낯선 그리스도>를 마칩니다. 2021년 초에는 다시 성경을 본문으로 하는 글로 만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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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반추(反芻)하자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12. 26. 22:12 Writer : 김홍덕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고 믿을 수 없었던 제자들의 모습부터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성경은 내 삶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것까지 설명했다. ‘그리스도가 어떻게 십자가를 지는가?’라는 제자들이 느꼈던 생경스러움이나 어떻게 우리가 성경대로 살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의구심은 동일한 프레임이다. 이 두 가지 의아함을 동일한 프레임으로 연결하는 것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심판을 받아 십자가를 지시므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어떻게 세상에서 천대를 받는가에 대한 의문을 몸소 해결하셨고,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으로 오시므로 육신을 가진 사람은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이셨다. 그렇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시므로 사람이 가졌던 자기들의 생각을 허무셨다.

 

이런 하나님의 법은 사람들의 생각과 방향이 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성경을 다 지킬 수는 없고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낮은 곳을 보시는데 사람은 낮은 곳을 보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높은 자라고 생각하는 것과 성경을 다 지킨다는 것은 보통의 사람 이상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생각과 반대라는 증거다.

 

하나님과 사람의 생각이 반대라는 것의 대표적인 것은 방향성이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람은 높은 존재라 여기는 반면 하나님은 낮아져서 자기 육신을 높아진 자의 주장 앞에 내어주는 존재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을 지킨다는 것 역시 그렇다. 사람은 성경을 보고 그것대로 행동하면 성경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하는 반면 하나님은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살면 그 삶이 성경을 이룬 것이라고 여기신다.

 

생명은 본성이 있고 본성은 삶과 행동을 이끈다. 그리스도로 나면 그리스도의 본성이 삶을 이끌고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는 삶은 예외 없이 행동이 있다. 그 행동, 그 삶을 기록하면 성경이 된다.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도 사실 그것이다.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므로 그 의가 이끄는 삶을 산 삶의 이야기, 예수님의 정체성과 말씀과 삶 그리고 예수님을 인하여 거듭난 제자와 사도들의 삶과 생각과 말을 기록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리스도로 거듭난 모든 사람의 이야기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같고, 그 모든 하나님의 말씀의 원본인 예수님의 말씀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듯 예수님을 인하여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삶이 된 하나님 아들이니 그들의 모든 것은 당연히 성경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이 당연함이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어색함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를 지러 간다는 예수님이 낯설었던 제자들처럼 그래야 한다. 성경에 분명히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는 동일한 혈통, 동일한 생명, 동일한 본성과 동일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진 생명이 되는 것이라 하고 있다. 그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심과 같이 스스로가 거듭났다고 믿고 살았다면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렇게 된 자신은 모든 것을 이룬 존재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게 성경이 말씀하시는 거듭난 사람의 정체성이다. 그렇지 않다면 거듭났다는 것은 자기 착각일 뿐이다. 그 착각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임도 잊지 말아야 한다.

 

제자들이 십자가를 지러 가신다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어서 그렇게 괴로웠던 것처럼, 오늘 자기 스스로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다면 자신이 성경을 다 이룬 사람, 성경의 모든 것이 자신에게 이루어진 사람, 성경의 모든 말씀이 자기 본성임이 발견되는 사람,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 사람, 자기 삶을 돌아보니 성경에 기록된 것을 발견하는 감동을 가진 사람으로 살고 있지 않다면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을 느껴야 한다.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는데 존재하게 되었음에도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살면서 태연하게 교리 문답에 답했다는 것을 구실로 자신이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이라 믿으며 시계추처럼 교회에 왔다갔다하며 예수님처럼 되려고, 또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며 태연하게 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을 외식으로 기만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높아지려는 자기 육신의 정욕을 이루기 위하여 세상 가치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기도하면서 자신을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만한 것이 아니며,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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