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5:17-20)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유대인들이 보기에 율법을 파괴하는 듯한 행동을 많이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거나 제자들과 함께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는 것과 같은 일은 물론이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다 엎어 버리기도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가르치시는 말씀 자체가 율법을 문자대로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매번 경기를 일으킬 만한 파격이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예수님은 기존의 율법을 폐하거나 대치하는 전혀 새로운 복음을 전하시는 것으로 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표면적인 괴리는 우리에게 ‘율법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은 율법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이 지키던 계명이고, 자신은 예수님 오신 이후의 시대를 살기 때문에 복음의 시대를 산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지 예수님이 오신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복음 신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돼지 고기 먹지 말라’ 같은 구약 성경의 계명이 아닙니다. 가령 요한계시록의 문장이라 할지라도, 말씀을 주신 의도는 제쳐두고 사람이 그것을 “반드시 행해야 하는 의무(Have To)”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은 다 율법이 됩니다. 즉 행위로 달성해야 하는 것으로 받는 모든 성경은 모두 율법입니다.
세상에는 법리(法理)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도로교통법은 어떤 교통 위반에 대해 얼마의 벌금과 벌점을 부과한다는 상세한 조문들을 정해 놓은 법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그 문자적인 조문만을 법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도로교통법이 존재하는 진짜 법리는 벌금 징수가 아니라 ‘안전’입니다.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도로를 운행하고 걸어 다닐 수 있도록 보장하겠다는 의도가 바로 그 법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義)’의 개념입니다. 율법이 교통 위반에 대해 얼마의 벌금을 부과하는 겉껍데기 조문이라면, 예수님은 안전이라는 진짜 법리, 곧 의 자체이신 분입니다.
사람들은 정말로 구약을 율법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중의 집단적인 확증편향일 뿐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행동으로, 또 육신의 생각과 신념으로 지켜내야 하는 과제로 인식하는 순간, 신약도 예수님의 말씀도 모두 그 사람에게는 율법이 됩니다. 즉, 행동으로 의로워지려는 근거로서 말씀을 인식하는 모든 태도가 바로 율법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가 내재되지 않은 사람이 구약의 율법은 물론이고, 예수님의 말씀이나 사도들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지키려는 신앙생활은 모두 완성되지 않은 율법에 머물러 있는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신 것은, 사람이 종교적 의무감이나 보상을 기대하면서 혹은 벌이나 화를 피하기 위한 마음으로 성경 말씀을 지키는 껍데기만 있는 외식적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어두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라는 생명이라는 하나님의 의를 채우시겠다는 뜻입니다. 신념이나 노력으로 성경을 지키는 게 아니라 본능으로, 곧 육신이 된 말씀의 생명력 있는 표현으로 성경을 지키는 존재가 되도록 하셨다는 선언입니다. 쉽게 말하면 로보트태권V에 로봇에 정의를 수호하려는 훈(김훈)이와 영희(윤영희)라는 조종사가 탑승하므로 완성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듯 율법과 말씀을 행하는 주체인 사람의 육신은 사실 형식입니다. 당연히 그 육신을 통해 나오는 행동 역시 형식이자 외모입니다. 비단 신앙의 세계가 아니더라도 모든 행동은 생각의 표현이며, 육신은 그 생각을 담아내는 수단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육신으로 창조하신 본질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품을 세상에 표현하시려면 가시적인 형식이 필요했고, 그렇기에 형식을 가진 존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존재가 바로 육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의 행동과 삶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온전히 표현하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 신앙의 근간에 해당하는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이 생명을 얻는 게 바로 우리의 거듭남입니다. 거듭난 새로운 생명,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이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면,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은 당연히 자기 본성대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본성에 의한 삶,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율법으로 또 말씀으로 주신 계명과 말씀을 준수하는 그 자체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생명을 얻는 것, 이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고 하신 그 완성입니다.
생명이 그 본성대로 사는 삶보다 더 온전함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보다 우리의 의가 더 나아야 한다고 하신 말씀은 이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노력과 신념으로 율법과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본질이자 내용이 그 심령에 없기에 외식이라 늘 책망을 받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율법을 지키는 행동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의로웠습니다. 그렇게 훈련되고 신념을 가진 이들보다 더 온전한 하나님의 의로움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 더욱이 완성된 방법은 바로 율법과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본능을 가진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 바리새인보다 더 온전하고 완성된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는 법은 세상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생명, 율법과 말씀을 완성된 삶으로 표현하는 생명의 실체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 생명의 이름은 그리스도이며, 실체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늘의 군사로 모든 걸 물리칠 수 있는 예수님께서 순순히 십자가를 지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일반으로 알고 있듯이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한 사명감이나 신념으로 십자가를 지신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순순히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생명이므로 그 본성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 가진 사람을 통해 표현하시고자 한 하나님의 성품, 낮아지고, 겸손하면, 자기를 내어주어 사랑하는 그 하나님의 성품이 예수님의 본성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자기를 순순히 내어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면에서 더 강한 아빠가 아들 딸에게 지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옥합이 깨어지듯 육신이 깨어지니 그 안에 있던 물과 피, 곧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드러나 사람이 알게 되었고, 그걸 깨달은 사람은 깨달음과 동시에 자기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 밖에 있었다는 죄를 시인하므로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자기 생명이 되었습니다. 이게 물과 피로 거듭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된 사람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살게 되니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거듭난 사람이 됩니다. 비로서 창조와 존재 목적이 본성이 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완성입니다.
결국 율법과 모든 성경 그리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일은 모두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의와 뜻을 나타내신 일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의와 뜻(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 말씀이 본성인 생명으로 산다면 그 사람은 모든 율법과 모든 하나님의 뜻과 성경을 다 이루고 성경대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노력이나 신념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다시는 주를 위해 살지 않겠다” 다짐해도 돌아서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고양이가 난 내일부터 개로 살겠다고 아무리 다짐해도 그 순간 바로 “야옹”하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의 일점 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룰 것이라고 하신 말씀 역시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같은 말씀입니다. 생명으로 거듭나면 어느 순간, 어느 하나 예외 없이 그 생명으로 삽니다. 이게 생명의 본질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보게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고백하는 순간 그 사람에게 율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듭남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신다는 건 예수님 안에서 완성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율법을 모두 지키는 존재가 되는 게 바로 율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므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율법의 의는 이미 예수님 안에 다 완성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완성되어야 하는 대상은 바로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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