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살롬의 반역이 남긴 후유증은 실로 컸다. 무엇보다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왕권을 회복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던 유다 지파와 나머지 11개 지파 사이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겉으로는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를 두고 벌인 지분 다툼이었으나, 실상은 이스라엘 내부에 응축되어 있던 해묵은 갈등의 폭발이었다.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깃이 없다"라며 반기를 든 세바의 외침에 11개 지파가 동조한 사건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갈등의 불씨는 훗날 솔로몬 사후, 여로보암이 동일한 논리로 분립을 선언하며 북이스라엘의 독립으로 이어진다.)
베냐민 사람 세바가 일으킨 이 반란은 상당한 규모로 확산되었으나, 결국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에 의해 진압된다. 이 과정에서 요압은 자신의 실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주군인 다윗이 임명한 진압군 대장 아마사를 암살하는 잔인함을 보인다. 정작 반란의 주동자인 세바는 요압이 아니라 아벨 성의 안녕을 위해 협상에 나선 한 지혜로운 여인에 의해 목이 베여 죽음을 맞이하며 상황이 종결된다.
이처럼 요압은 주군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암살과 독단적인 판단으로 반란을 제압했다. 우리는 오늘 이 요압이라는 인물을 투영해, 신앙이 자람에 따라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핵심 가치인 <긍휼>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다윗을 향한 요압의 충성심과 전투력은 독보적이었다. 그가 참전한 전쟁은 사실상 전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지독히 잔인했다. 동생의 복수를 위해 아브넬(사울의 군대장관 출신으로 다윗에게 귀순하려던 자)을 독단적으로 살해했고, 아마사를 암살했으며, 무엇보다 다윗이 간곡히 살려달라 부탁했던 아들 압살롬을 제 임의로 죽였다.
영적인 관점에서 요압은 세상과 공중 권세 잡은 자들에 맞서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우리 내부의 '강력한 신앙 의지'를 대변한다. 그러나 요압처럼 유능하지만 긍휼이 없는 신앙은, 하나님을 모른다거나 신앙이 없다는 이유로 타인을 적대시하고 단호하며 강압적인 자세를 취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아주 많다.
흥미로운 점은 신앙이 어릴 때는 요압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 신앙에 확신이 생기고,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해 본 경험이 쌓일 때 '요압의 위험'이 시작된다. '세상과 신앙의 일은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자기만의 확고한 신앙관이 정립되면서, 이를 타인에게 강요하고 투사하려는 마음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거리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고압적으로 외치는 모습은 이러한 '긍휼 없는 열심'이 타인에게 얼마나 큰 불편함과 거부감을 주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고귀한 것이기에, 신앙이 깊어질수록 자신이 더 존귀한 삶을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이는 신앙 안에서 마주하는 실질적인 위협이자 교만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정한 고귀함은 '낮아짐'에 있다. 우리는 신앙의 가치가 세상적인 방식의 존귀함으로 증명되어야 한다고 오해하곤 하지만, 복음의 실체는 전혀 다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낮아지는 긍휼>로 얻어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고 공의의 심판만을 행하셨다면, 그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었을 것이다. 이토록 큰 사랑과 긍휼로 구원받은 우리가, 신앙의 기준을 들이대며 타인을 정죄하고 강압적으로 군다면 그것이야말로 '일만 달란트 탕감받고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옥에 가둔 종'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물론 우리는 내면의 영적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요압과 같은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영적 전쟁의 승리는 힘으로 압도하는 데 있지 않다. 성경(슥 1:18-21, 미 4:13)에 언급된 '철 뿔'이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을 요압처럼 잔인하게 들이받고 책망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장 강력한 무기는 타인이 스스로 돌이키게 하는 '십자가의 도'다. 하늘 군대를 동원하지 않으시고 놋뱀처럼 나무에 달리심으로 인류를 돌이키게 하신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이 요압의 창칼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요압은 주군의 명령보다 자신의 판단을 앞세우며 다윗에게 충성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과 십자가의 정신을 잃어버린 채, 오직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긴다'는 명분으로 연약한 자들을 책망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결국 채찍으로 백성을 다스리려다 나라를 잃은 르호보함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의한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에 불과하다.
신앙이 없는 이들의 가치관을 대할 때면 답답함과 분노가 치밀 수 있다. 육신의 정욕을 좇아 의미 없이 살아가는 인생을 보며 채찍을 들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대하셨다면, 우리는 그런 분노조차 느끼지 못하는 죄악 속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로 얻은 귀한 신앙을 위해 오히려 긍휼을 저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긍휼 없는 신앙의 끝은 결국 요압과 같은 비참한 결말일 수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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