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서신을 넘어선 생명의 책

디도서는 배금주의로 물들고 타락한 그레데 지역의 교회를 향해 경건을 권면하는 바울 사도의 서신이다. 본문 안에 그레데 교회가 구체적으로 타락했다는 직접적인 책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서신은 책망보다는 경계와 권면의 목적이 강함을 알 수 있다. 바울 사도가 타락한 사회 속에서 성도들이 경건한 삶을 배우고 살아내도록 제안한 목회적 대안은 오직 하나, 바로 '모범'이다. 장로와 같은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먼저 책망할 것이 없는 경건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성도들이 그 삶을 보고 배우게 하라는 목양의 지침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학계에서는 디도서를 목회서신으로 분류한다. 잘못된 분류는 아니지만, 이 내용을 단지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할 도덕적 윤리 지침이나 남편, 아내, 종과 같은 사회적 신분의 행동 규범으로만 읽어낸다면 그것은 성경의 겉껍데기만 보는 것이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행위 규범'을 가르치는 도덕책이 아니다. 행위는 절대적으로 내면에 심긴 '생명'에 종속되어 나타나는 표현의 일환일 뿐, 결코 그 자체가 본질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정제되고 압축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굳이 본질이 아닌 인간의 도덕을 길게 써 놓을 이유도, 여유도 없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디도서를 목양 서신으로 읽되, 이를 단순한 성도의 윤리 강령이나 가정과 사회의 도덕적 본분으로 축소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위는 생명체의 고유한 표현 방식

디도서나 야고보서는 물론, 바울의 여러 서신서에 등장하는 "~하라" 혹은 "~하지 말라"는 명령들을 문자 그대로 표면적으로만 받아들이면 신앙은 심각한 오류에 빠진다. 성경의 행간에 흐르는 생명의 법칙을 보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만 읽는다면, 도올 김용옥처럼 성경은 그저 남의 나라 중동 부족의 전쟁사나 신화로 읽는 것일 뿐이다. 심청전을 읽고 나서 진짜로 인당수에 몸을 던져야만 효자가 된다고 믿는 사람이 없듯이, 성경 역시 그 문자가 가리키는 이면의 진리를 보아야 한다. 세금을 내지 않으면 재산을 압류하겠다는 세법의 진짜 목적이 압류 그 자체가 아니라 국가를 부강하게 하려는 법리에 있듯, 성경의 명령들 역시 그 이면의 생명 원리를 향하고 있다.

 

이처럼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지 않고 행간의 의미를 좇는 시각을 향해, 일각에서는 자의적이고 알레고리적인 해석이라며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앙을 가졌다면 누구나 성경을 '생명의 말씀'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어떤 존재에 생명이 있다면, 그 생명만이 가지는 고유한 행동 양식이 반드시 밖으로 표출된다는 것 역시 상기해야 한다. 성경을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권면은 오직 '그리스도라는 생명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행동과 본성'을 기록한 증언임을 깨달아야 성경을 바로 읽는 것이다.

 

기독교의 선과 세상의 선의 본질적 차이

물론 모든 동물이 공통으로 숨을 쉬는 호흡의 본능을 가지듯, 성경의 권면 중에는 세상 사회가 훌륭하다고 여기는 선한 행동들과 외형적으로 겹치는 부분들이 많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절대적인 근원의 차이가 존재한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선한 행동은 철저히 '그리스도라는 생명', 즉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새로운 본성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열매다. 반면 우리가 세상 사회에서 배우고 칭송하는 선한 행동은 철저한 교육과 사회화의 산물이다. , 인간의 이기적인 타락 본능을 억제하는 훈련과, 착하게 살면 돌아오는 사회적 보상 체계에 길들여진 결과물이라는 것이 가장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차이다.

 

그러므로 디도서를 비롯한 모든 성경에 등장하는 행위 규범들은, 인간이 지켜내야 할 도덕률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행동으로 나타나는지'를 증언한 기록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으니 이 정도는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종교적 의무감이나, 천국에서 주어질 금면류관 같은 보상을 기대하며 억지로 본능을 억누르는 신념적 행위를 요구하지 않는다. 성경은 거듭난 생명이 당연하게 보여주는 삶의 궤적일 뿐, 종교인의 도덕 가이드북이 아니다.

 

억제된 본능인가, 거듭난 생명인가

우리는 디도서를 묵상하며 오늘날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시대의 시공간을 돌아보아야 한다. 무한 경쟁에서 이기려는 탐욕으로 가득 찬 이 시대는 고대 그레데의 상황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다. 오히려 더 교묘한 배금주의에 물들어 있으며, 과거의 할례당들처럼 육신이 바라는 정욕과 성공을 성취하려는 소망을 신앙과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히 교회 안에 거룩하게 서 있다는 걸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세태를 그저 반성하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 경건이라는 것은 신앙인의 무거운 의무도 아니며, 천국에서의 보상을 바라고 현재의 욕망을 이 악물고 억제하는 고행도 아님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참된 경건은 내 안에 심긴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이 일상으로 번역되는 가장 자연스러운 현상이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거듭남의 증거'라고 부른다.

 

만약 이 경건이 내가 생각하는 경건과 다르고, 내 안에서 본능으로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가장 두렵고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만 한다. “나는 과연, 정말로 거듭난 게 맞는가?”라는 질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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