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지 않는 신앙은 없다. 믿는 신이나 신앙의 부류를 막론하고 기도는 다 한다. 심지어 신앙의 대상 없이 사는 사람조차 간절한 순간에는 기도한다. 이렇게 사람은 누구나 기도하고, 어느 순간이든 기도하는 존재다. 사람이 이렇게 기도와 불가분의 관계인 것은 사람에게 없는 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한다. 다만 무엇이 없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
부족함은 목적에 종속된다. 목적에 따라 부족한 게 달라진다. 잔이나 그릇은 목적에 따라 모양이 다르고 채워지는 게 달라진다. 성경은 사람을 질그릇이라고 말씀한다. 무언가를 채워야 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다만 무엇을 채울지는 또 다른 문제다. 인생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걸 구하고, 땅의 성분인 흙으로 빚은 질그릇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늘의 뜻을 구한다.
흙으로 창조된 질그릇 같은 사람에겐 하늘의 뜻이 부족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아들로 오신 예수님도 사람에게 기도가 필요하고, 기도해야 하는 부족함과 갈증이 있음을 아셨다. 다만 사람은 구하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들을 부족하게 여기고 구하나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사람의 필요를 아신다고 하셨다. 자동차 주인이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듯이 창조하시고 주시는 이가 알고 있다는 건 부족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달리 생각하고 있다.
여전히 같은 걸 구하고 있다는 건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먹을 걸 간구한다는 걸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구하고 있다는 건 아직 얻지 못했다는 뜻이다. 먹을 것은 항상 필요한 것이기에 항상 구해야 한다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항상 공급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이상 믿음의 문제인데, 눈만 감으면 육신의 필요를 구한다는 건 결국 하나님을 불신하고 있는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여전히, 아니 항상 하나님께서 부족하지 않다고 하시는 것들을 구한다. 거의 모든 교회 예배 시간에 건강과 사업과 자녀들의 성공 그리고 육신이 속한 나라와 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구하는데 그건 하나같이 아직도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얻은 것을 이렇게까지 꾸준하게 구할 리는 없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약 4:3)
생각이란 게 있다면, 이렇게 꾸준하게 기도하고 있다는 건 얻지 못했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더 현명하다면 기도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이건 하나님께 구하는 게 아닌가?'라고 합리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분명히 그건 이방인, 곧 하나님의 의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기도라고 하셨을 뿐 아니라, 얻지 못했다는 건 정욕을 구한 것이라고까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이걸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건 진정한 어두움과 어리석음이다.
여전히 구하고 있다는 건 얻지 못했다는 것이고, 얻지 못했다는 건 육신의 정욕을 위해 구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사람에겐 반드시 기도하고 구해야 하는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예수님께서 기도로 가르쳐 주실 정도로 부족한 게 무엇인지 바로 알아야 한다. 그건 바로 우리의 존재 목적이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라는 주기도문은 이 하나를 구하는 기도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건 존재 목적을 위해 필요한 양식을 구하라는 뜻이지 육신의 필요를 구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기도하고 간구해야 하는 건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인 이상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일 수밖에 없다. 만약 사람이 이걸 스스로 알 수 있다면 굳이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사람은 물론이고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도 자기 존재 목적을 스스로 알 수는 없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심의 위대함을 아울러 알 수도 있다.
다행히도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존재 목적을 숨김 없이 아주 밝히 말씀하셨다. 사람을 창조하셨기에 사람이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으로 늘 말씀하신다. 그러면서도 그걸 강제하지 않고 스스로 깨달아 순종하길 기다리시는 긍휼도 함께 베푸신다. 성경의 시작부터 창조 목적을 밝히 말씀하시고, 그래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아들, 곧 그 뜻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를 보내서 십자가에 높이 달아 그 목적을 보이셨다.
그 뜻은 다름 아닌 십자가다. 십자가가 바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며, 우리 삶의 목적과 의미다. 이건 십자가에 달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과정과 모습 속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우리가 가져야 할 본성이라는 뜻이다. 높고 높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므로 전하고자 한 뜻은 하나님 안에 있는 낮고 겸손하며 섬기는 마음을 사람이 표현해 주기를 바라서다. 우리는 하나님 속에 있는 낮고 섬기고 사랑하고 긍휼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존재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지시는 하나님 아들을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 안에 있는 낮아지고 섬기는 성품을 표현하는 게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가진 존재가 되기를 구해야 한다. 그 마음이 땅에 이루어져야 하는 하늘의 뜻이다. 땅은 사람이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건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건 노력이나 신념으로 되는 게 아니다. 본성은 생명 정체성이므로 생명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아는 건 기도의 의미를 깨우치는 단편적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께 내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간구한다는 건 많은 게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나는 존재 목적을 모른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그걸 모르고 살아온 삶이 하나님 앞에 죄악이란 걸 깨닫고 고백해야 한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선과 악을 판단하고 살았다는 것과 그게 죄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나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걸 믿지 않고 그걸 하나님께 구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바른 기도는 신앙의 모든 것이다. 어긋난 시작을 바로 잡는 기회이자 간절함이다. 순종과 회개가 아우러져야 온전한 게 기도다. 밥 달라고 기도하는 건 정말로 이방인의 간구며 부끄러운 것임을 알고 몸이 떨리는 수치스러움을 느껴야 비로소 제대로 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육신의 삶에 필요를 구하는 건 기도가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시고 인생을 주신 목적을 구하는 것
우리는 이제 기도에 관해 다르고 바르게 알아야 한다. 더 이상 이방인의 간구는 없어야 한다. 매일 구하는 건 얻지 못한 것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깨달음도 있어야 한다. 아직 얻지 못했다는 건 바로 구하지 못함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알아야 하는 건 우리가 구할 것은 하늘의 뜻, 곧 나를 창조하시고 삶을 주신 목적, 그것이다. 그걸 구하는 게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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