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5:33-37)
예수님 공생애 당시 사람들은 맹세를 많이 했는데, 맹세한 내용을 준수하는 해석에 있어서는 맹세한 대상에 따라 수준을 조정하는 아주 편의적인 유권해석을 하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늘, 땅, 예루살렘, 머리 등의 사례를 드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시대 비판을 하신 건 아닙니다. 맹세의 대상을 언급하신 건 대상에 대한 주권이 있는지를 말씀하신 것이고, 더 나아가 그냥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면 될 뿐 이에서 지나쳐서 더 많은 의미나 의무를 부여하는 건 ‘죄’라고 하셨는데, 맹세하는 사람의 의도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사소한 일에도 자기 생각이 옳다는 걸 주장합니다. 알고 보면 가정에서의 작은 다툼도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의의 충돌이고, 바닥에서의 싸움이나 나라 간의 전쟁 모두 ‘내가 옳다’는 걸 주장하는 의의 충돌과 다툼입니다. 그래서 신뢰할만한 대상에 맹세하여 내가 생각하는 옳음, 선함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람이 맹세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초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맹세에 대해 언급하신 것은 맹세하는 방법이나 어떻게 준수해야 하는 지를 말씀하시려는 게 아닙니다. 머리털 하나도 희게 할 수 없다고 하신 건 사람의 주장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없다는 말씀입니다. 피조물인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창조주의 의와 뜻이지 자기 의와 뜻이 아닙니다. 자기 의를 주장하려고 하나님이 계신 하늘과 창조하신 세계를 대상으로 맹세한다는 건 분명 월권을 넘어서 창조주의 세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옳은 건 옳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만 하라고 하신 말씀은,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이 옳다고 하는 일에 옳다고 인정하고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하신 건 아닌 것으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으니, 이 하나만 순종해서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지 않으면 되는데, 굳이 자기가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고, 세상은, 너는, 사람은 이렇게 해야 한다며 주장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자기 주장을 위해 맹세까지 하는 건 당연히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은 이처럼 단순하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남발하지 말라, 혹은 맹세에 대해 맘대로 유권해석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단순해 보이는 언급은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걸 잊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피조물이라면, 더욱이 피조물이라는 것과 존재한다는 걸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와 뜻을 주장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법을 떠나 자기 주장을 펼치며 사는 건 죄, 곧 선악과를 먹은 삶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어쩌면 신앙의 근간에 관한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서 또 왜 선악과가 언급되는지 의문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모든 것은 임의로 할 수 있는데, 단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그냥 과일 하나 먹지 말라는 말씀이거나, 시키는 걸 얼마나 순종하는지 가늠하는 척도로서 선악과에 관한 말씀이 있는 건 아닙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는다는 건 선악을 판단하는 존재가 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무엇이든 자기 임의로 해도 되나,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지는 말라는 이 하나의 계명만을 주신 것입니다.
실제로 하와를 유혹한 뱀의 말이 그렇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는다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악을 알게 된다는 건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입니다. 자기 자리를 벗어난 것인데, 죄의 원어가 바로 ‘자기 자리를 벗어나다’라는 의미의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입니다. 신학적으로 선악과와 원죄를 여러가지로 해석하지만 성경적 올바른 의미는 피조물인 사람이 자기 자리를 벗어나 하나님 행세를 하는 것, 이것이 원죄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죄는 사람이 자기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과 세상을 판단하는 것에서 생깁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니 다른 사람을 억제하고 강제하게 되고, 심지어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나는 이래도 된다’, ‘나는 그럴 자격이 있다’라고 판단하고 믿으면 소란을 피우고, 도둑질도 정당화됩니다. 이처럼 사이 범하는 모든 되는 자기가 옳다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맹세하는 이유도 이것과 결이 같습니다.
이 선악과와 원죄의 개념 위에서 보면 맹세한다는 건 피조물이 자기 자리와 권한을 넘어서서 자기에게 주권도 없는 하늘 또 자기 몸을 대상으로 맹세하면서 자기 의를 주장한다는 건 죄가 되는 게 당연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본질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가 피조물이라는 걸 확실히 깨닫고, 창조주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육신이 되면, 그러니까 자기 삶을 이끄는 본성이 되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합니다. 하나님이 옳다는 일을 옳게 여기고, 하나님이 화를 내실 일에 화를 내고 분노합니다. 이런 일이 본능적으로 일어나려면 생명이 바뀌어야 하기에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은 생명의 DNA이고 성령은 이 말씀이 생명이 되게 잉태케 하십니다. 이렇게 거듭나면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과 행동이 됩니다. 굳이 맹세가 필요 없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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