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는 이렇게 시작한다. “사울이 죽은 후라”. 이건 여기서 부터는 사울이 죽은 다음을 이야기하겠다는 선언이다. 표면적이고 객관적 사실을 기준으로 사울이라는 이스라엘의 1대 왕이 죽고 난 다음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걸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게 아니다. 그 객관적 사실은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에서는 세계사 시험 정답 이상의 가치는 거의 없다. 성경은 어느 세대의 사람에게나 그리스도의 정체성, 우리가 거듭나서 가져야 할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과 정체성을 말씀하시는 걸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앞서 사무엘 상을 설명하면서 사울다윗의 갈등은 우리 심령 안에 있는 옛사람과 새사람의 갈등이라고 설명했다. 이게 억측으로 들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사건들의 표면만 보면 하나님께 어떻게 하는 지에 따라 우리가 어떤 복을 받거나 어떤 벌을 받는 지로만 읽히게 된다. 그러나 성경을 그렇게 보는 건 심청전을 읽고서 어딘 지도 모르는 임당수에 몸을 던져야 효자 효녀로 인정받고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로 읽는 것과 같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은 그리스도라는 생명과 정체성에 관하여,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 생명이 되는 지를 알려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의도대로 사무엘 하를 우리 속사람의 이야기로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설교로 들어 온 관점과 제법 다른 말씀과 뜻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울이 죽은 후라는 시점을 선언하고 시작한 것은 옛사람이 죽은 후, 즉 새사람으로 거듭난 삶이 시작된 이후의 이야기라는 걸 선언하고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무엘 하의 말씀은 거듭난 사람의 이야기인 것이다.

 

‘사무엘 하’는 옛사람이 죽고 새로 시작한 새사람의 삶에 관한 말씀이다.

 

그러나 사무엘 하에 나오는 다윗의 일들은 새사람의 새 삶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들이 너무 많다. 특히 충신 우리야의 아내를 취하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야를 죽음에 내 몬 것은 막장 드라마에서도 크게 욕먹을 일이다. 이렇듯 사무엘 하에 나오는 다윗의 범죄와 인간으로서 연약함과 실수들은 일반적인 도덕 윤리 기준으로 보면 사울보다 더 나쁜 일들이 많은데도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버리시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벌을 내리시기는 했지만 아예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시면서 버려버린 사울과 비교하면 확연하게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리시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가 그 혈통에서 나오는 은혜와 영광을 주신 이유와 사울과의 차이를 알 필요가 있다. 세상의 도적적 가치로 볼 때 순전하지 않아 보이는 다윗이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혈통이 된 이유가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죄를 범하는 자아에 대한 죄책감과 이러다 구원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싶은 두려움을 이겨내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구원의 확신이므로 정리하면 우리가 의심과 의문 없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 사무엘 하에 나오는 다윗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세밀히 조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하는 목적을 가진 존재들이므로 우리 각 사람의 정체성과 본성이 다윗 그리고 그리스도와 같은 지를 돌아보는 건 피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다. 이건 우리가 스스로 구원을 얼마나 확신하는지, 얼마나 죄사함을 확신하는 지를 결정하는 문제다. ‘사무엘 하는 바로 이걸 설명한다. 행위가 구원의 기준이 아니라는 걸 총체적으로 설명한다.

 

어떤 이들은 또 물을 것이다. 거듭났다면 다윗과 같이 간음하고 살인을 저질러도 되냐고? 언제나 강조하시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구원을 모르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정체성과 죄와 구원 그리고 거듭남의 본질을 알면 그런 질문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하나의 힌트를 짚고 넘어가면,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는 지를 가지고 상이나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중심을 본다고 하셨고,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구원받았다면 다윗처럼 간음이나 살인을 저질러도 되냐고 묻는 사람들은 간음이나 살인이 행위라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본성을 모른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는데 간음이나 살인을 해도 되는 것으로 알고 저지른다면 그건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그렇다는 것이고, 그걸 걱정한다는 건 그리스도의 본성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는 사람이란 걸 드러낼 뿐이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그런 사람에게 구원은 없다. 자기 희망사항이나 정신 승리일 수는 있어도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

 

특징 사울 (옛사람) 다윗 (새사람/그리스도의 혈통)
성경 상징 옛사람, 선악과를 먹은 번째 아담 새사람, 그리스도의 본성/혈통 ( 번째 아담)
사무엘
시점
죽음 () 시작 (거듭난 )
구원의 기준 행위 (내가 옳다고 여기는 , 세상의 도덕/윤리) 존재
(
하나님이 기준, 그리스도의 본성)
하나님 섬김의 기준 자기 주권 (자기가 좋고 선하다고 판단한 ) 하나님의 주권
(
순종, 듣는 )
하나님의 반응 버리심
(
창조 목적을 벗어난 존재)
버리시지 않음
(
본성이 하나님을 향함)
핵심 메시지 행위로 의로워질 없음. 존재의 정체성이 다름. 구원의 확신 (하나님은 행위가 아니라 존재를 보시는 ).

 

 

다시 본문이 될 사무엘 하로 돌아와서 이어가면, 사울과 다윗의 차이는 결론적으로 존재의 차이다.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존재였는 지의 차이다. 행위로 따진다면 사울은 적어도 자기 신하를 죽을 자리로 보내고 그 아내를 취하는 비열한 짓은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사울의 모든 행위를 자아내는 본성이 문제였다. 그러니까 존재의 정체성이 다윗과 달랐다. 아니 정확히는 사람은 보통 사울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다윗이 달랐다고 해야 옳다.

 

다윗과 사울의 차이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차이…

 

성경에 기록된 사울의 모든 행위에서 그는 자기가 좋게 여기고 옳다고 여기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자기가 무엇이 선한 것인지, 무엇이 악한 것인지를 먼저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 선한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선악과를 먹은 사람의 실체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자기가 좋다고 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게 문제가 되는 건 자기가 좋고 그른 것을 먼저 판단했고, 그걸로 하나님을 섬기기로 자기 주권을 행사했다.

 

게다가 좋고 나쁜 것을 판단하는 기준조차 세상적이었다. 외모와 눈으로 보기에, 세상의 가치로 보기에 좋은 양이라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상이 볼 때 좋은 양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겠다고 하나님의 명을 어겼다. 사울은 그런 본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사울을 통해 선악과를 먹은 사람, 그래서 자기가 옳다는 기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시는 지를 아주 선명하게 보여 주셨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라는 유명한 말씀이 선악과를 먹은 사람, 자기가 옳다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를 설명한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버린다. 창조 목적을 벗어난 존재기 때문이다.

 

반면에 다윗은 인간의 관점, 사울이 가지고 있었던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없었다. 모든 건 하나님이 기준이었다. 예수님께서 선한 선생이여!,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며 찾아 온 부자에게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라고 반문하신 건 그 부자 청년이 자기 기준으로(행함이 기준이었다) 예수님을 선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선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기준으로 죽은 사람도 살리는 예수님을 보니 그런 행위가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자기가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라는 말씀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을 향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며 존재 정체성을 물으신 하나님의 말씀과 결을 같이 한다. 다윗에게는 이런 기준이 없었다.

 

사울은 선악과를 먹은 첫번째 아담, 다윗은 그리스도의 혈통인 두번째 아담이다.

 

그러니까 쉽게 정리하면 사울은 선악과를 먹은 사람을 설명하고, 다윗은 그리스도의 혈통과 본성을 가진 사람의 표상인 것이다. 그러니까 완전히 존재의 정체성이 다르다. 예수님의 말씀을 빌어 비유하면 다윗은 손과 발만 씻으면 되는 사람이고 사울은 몸을 씻지 않은 사람이다. 우리가 보기에 우리야의 일은 너무나 패륜적인 일일 수 있지만,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가 본성인 사람이 구원을 상실할 일은 아닌 것이다. 이게 참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게 사무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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