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맘이 조려서 못 가네" (찬송가 302장 3절)
여러 글을 통해 우리는 확실하지 않은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언급했다. 그리고 교회를 습관적으로 다니거나, 하나의 교양 생활 정도 심지어 정치적인 목적 등을 이유로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기 신앙에 모순적인 부분과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있음을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다.
교회의 신앙 수준은 설교로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설교는 우선 내용이 중요하고, 지속성은 교회가 그걸 어느 정도 수용하지는 지를 대변한다. 그리고 그런 설교의 일반적 수준에서 가장 좋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내 생각과 뜻에 우선해야 한다고 전하는 것이다. 덧붙인다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복을 주신다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나와 다를 때,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려고 했으나 그게 늘 성공하지 못한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문제는 이런 실패에 대응하는 방법, 아니 자세다. 여기서 신앙의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 물론 이런 도전을 하지 않는 사람은 무늬만 교인일 뿐, 그에게 하나님은 램프의 요정 지니 이상이 아니므로 논외로 한다.
온전한 신앙, 정말로 하나님을 잘 믿어보고자 애썼던 사람은 결국 여기서 한계를 느낀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하는 자기 모습에 좌절하고, 그게 반복될 뿐 해결책을 모른 체 반복만 해야 한다는 것에 절망한다. 예수를 제대로 한번 믿어보겠다고 도전했던 사람이라면 이 감정을 알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겐 임계점이 있다. 언제까지 같은 반복, 경험으로 이제는 실패한다는 걸 뻔히 아는 데 반복에 지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말한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14)"라고. 이 말씀으로 반복되는 자신을 변호하려 한다. 그러나 이 말씀조차 앞서 언급한 신앙의 반복, 솔직히 말하면 실패의 반복이 사람의 상태라는 말씀이지, 그게 당연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마음은 가득하지만, 졸고 있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한계, 실패하는 한계는 홍해고 요단강이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큰 물을 건넌 사람"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그런 실패 속에서 인내하고, 언젠간 이길 것이란 기약 없는 기대를 소망이라 착각하며, 그런 서로를 위로하는 걸 사랑이라 위안하면서 웃는 얼굴로 교회에 다니는 게 아니라 이런 실패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런 큰 물을 건널 때 비로소 히브리인, 곧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된다.
문제는 "어떻게?"다. 이 <어떻게>가 내 영혼의 영원한 시간을 결정한다.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신앙적 명제이자 사실이다. 여기서부터 신앙은 갈라진다. 비록 교회의 설교가 기복이라는 복선 없이 정말 순수하게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고 해도 이 <어떻게>가 없다면 요단강에 멈춘 신앙이거나, 가나안을 앞에서 두려움으로 멈춘 신앙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 하지만 늘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좋은(?) 신앙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떠돌 듯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갈망하면서 노력만 하며 인생을 다 소진한다. 이게 오늘날 신앙인의 안타까운 모습이다.
이 쳇바퀴를 벗어나려면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용기가 필요하다. 성경대로 사는 삶이라는 약속하신 땅이라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었으니 땅이다)이 될 수 있다는 걸 믿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지 않은 삶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에 영혼을 의탁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건 "내가 지시할 땅"이라는 모호한 목적지를 행해 떠났다는 것이다. 여정은 분명 육신의 관점, 세상의 가치, 보편적 사람의 생각으로 보면 모호했지만, 단 하나, 하나님이 지시하셨다는 이 하나를 믿고 본토 아비 집을 떠나는 결정을 하는 용기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믿음>이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려면 이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분명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다. 이게 하나님의 약속이다!"라는 확실한 믿음이 필요하다.
이 약속과 믿음에는 반복적 실패라는 옵션은 없다. 반복적 실패라는 옵션은 필연적이지만 그건 "이게 바른 방법이 아니구나!"라는 걸 깨닫기 위한 것이자. 실패의 반복을 얼마간 하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는 게 하나님의 법이 아니다. 일만 개의 율법을 지키다 하나를 범하면 모든 게 수포가 된다는 말씀이 이걸 의미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란 말인가?
놀랍게도 답은 간단하다. 거듭나면 된다. 기독교인들은 거듭난다는 말을 그저 상투적으로 사용할 뿐 이 말의 중대성을 가늠하지 않는다. 이건 분명하다. 만약 이 말씀의 중함을 알고 있다면, 그래서 의미를 바로 안다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의 실패의 반복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란 걸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삶을 사는 생명으로 거듭났는데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이 생명으로 나서 생명대로 살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게 가능하냐?"라고. 또 말한다.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다"라고. 그래서, 소망은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그럴 값이면 뭣 하러 예수를 믿느냐고 나는 반문한다. 성경대로 사는 것도 안 되고,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님과 형제로 거듭났는데 생명의 본성은 다르다면 도대체 왜 예수를 믿고, 왜 남들 쉬는 일요일 아침에 평소보다 더 차려입고 교회에 가서 돈 내고 앉아 있느냐는 것이다. 정말 이걸 신앙생활이라고 해도 될 것인가?
다른 건 볼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된다고 하시지 않는가? 심지어 우리를 성경대로 살게 하시려고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지 않는가? 이 하나님의 뜻을 믿지 않으면서, 그렇게는 될 수 없다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살겠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거지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이게 바로 떠나야 하는 본토 아비 집이다. 이 불신의 신앙을 떠나지 않으면 모태 신앙 아니라 그 할배라도 구원은 없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구원을 바란다는 건 도둑놈이다.
중학생 시절, 중등부 교육 전도사님이 설교를 하다 말고 당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고 제법 비싼 물건이었던 PAKER 45 만년필을 꺼내 들고서 "누구든지 이걸 가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앞으로 나오라. 그럼 그냥 주겠다"라고 했다" 그때 난 '설마?'했다. 나뿐 아니라 많은 학생이 그랬다. 그런데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교회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남학생 하나가 정말로 앞으로 나갔고, 정말로 약속대로 만년필은 그 학생 것이 되었다. '나는 그렇게 비싼 걸 공짜로 준다고?'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구원을 값없이 준다는 말에 감동한다. 그런데 그 구원을 얻은 삶인, 성경대로 사는 삶은 믿지 않고 의심한다. 그건 믿는 게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성경대로 살 수 있다는 것, 성경은 우리에게 의심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히 믿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믿음을 의심하는 건 생명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생명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우리에게 생명이라고 믿는다. 또 생명은 본성이 있고, 그 본성은 거스를 수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둘을 합하지 못한다. 생명의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이 살았다고 하는 생명을 얻어 거듭났다면, 당연히 그 생명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생명의 본성을 의심한다. 이러고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어리석음이다. 그런데 이게 오늘날 교회의 겸손한 신앙이자 교리가 되었다. 이 신앙을 떠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 다니던 교회를 떠나라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교회를 떠나라는 게 아니라 신앙을 떠나야 한다. 삶의 울타리를 부수거나, 삶의 구조를 신앙을 위해 갑자기 바꾸는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예수님과는 다르므로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건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임을 인정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하는 반복은 열심히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며, 안 된다고 하는데 자꾸 하는 건 도전이란 걸 시인하고 그 신앙에서 떠나야 한다.
이런 불신과 도전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한 본토 아비 집이다. 물리적 공간이 교회와 사회적 공동체인 교회를 떠나라는 게 아니라 이 신앙의 유전을 떠나야 한다. 이걸 떠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며, 당연히 구원이란 은혜도 없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안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하나님을 믿어야 얻는 구원을 얻는다는 건 어이없는 일이지 신앙생활이 아니다.
물론 오랫동안 괜찮을 것이라 기대했던 신앙을 떠나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더욱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른다면 그건 더 기막힌 일이다. 그래서 이 블로그를 통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오랫동안 전해 왔다. 무엇을 할 것인지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오랫동안 설명하고 전해왔다. 많은 사람이 들락거리고 있다는 것도 통계를 통해 알 수 있다. 정말로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드리면서까지 전한 복음이 자기 생명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본성대로 살 수밖에 없다. 아니 그렇게 살지 않을 수가 없다.
복음은 결코 어렵지 않다. 어려운 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건 어려운 것이라는 사람의 인식이 바뀌는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인생을 통해 마음 밭이 갈리는 이유도, 필요성도 이것일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쉽다고 말씀하시는 걸 어렵다고 생각하는 자기 생각, 이 하나를 바꾸기 위해 탕자는 그렇게 세월을 허비했는지도 모른다.(눅 15장)
이런 모든 설득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신앙을 떠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다. 예수를 더 잘 믿으려고 노력한 사람일수록, 노력한 열정이 클수록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오늘 그런 열정에도, 또 그런 열정이 오래되었음에도 이루지 못한 건 뭔가 잘못되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이걸 알면 좋겠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고,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푸는지를 즐기는 고약한 취미를 가진 신으로 믿을 게 아니라면 이제 본토 아비 집을 떠나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하는 지는 이 블로그에 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생명으로 거듭났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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