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10. 하나님과 충돌한 웃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무엘하 Date : 2025. 12. 27. 13:01 Writer : 김홍덕

앞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가는 과업에 있어 주목할 단어는 바알레유다충돌이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오늘은 그 두번째 충돌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이 사건을 조명하는 데는 사용된 단어의 의미들을 들여다보는 게 제법 재미있고 의미가 있다.

 

여호와께서 웃사와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삼하 6:8)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려는 행렬은 나곤의 타작마당이라는 곳을 지나게 되는데 이때 수레를 끌던 소들이 날뛰는 일이 생기고 소들이 날뛰니 수레에 있던 언약궤가 떨어지려는 듯 보였고 이를 본 웃사라는 사람이 언약궤을 붙잡으려고 손을 댔다가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그를 그 자리에서 죽게 하시는 일이 이 사건의 개요다.

 

하나님께서 충돌하셨다는 표현은 아주 인상 깊은 표현이다. 다만 이 표현은 개역한글판의 표현이고 다른 성경 번역에서는 다윗이 웃사가 죽은 땅의 이름에 붙인 베레스웃사라는 말 속 베레스가 가진 치시다라는 의미를 기준으로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셨다고 번역하고 있다.

 

 

잠시 성경 번역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면, 어느 번역이 더 낫다고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최초의 대중적 번역이라고 할 수 있는 개역한글판에서 한 번씩 번역될 때마다 하나님의 권위적 표현들이 완화되는 느낌이 든다. 얼마 전 목사인 친구와 이 주제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내가 오랜만에 성경을 샀는데 개역한글판을 샀다고 하니, “왜 오래된 걸 샀느냐?”는 친구의 말에 나는 나는 이게 익숙해서…”라고 하면서 이 말을 했다. “마태복음 1 1절을 봐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계보>어느 게 권위가 있고 좋으냐라고 말하긴 했다. 그도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여기에 나오는 충돌의 원어는 베레사다. 옛말은 대게 단어가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베레사의 히브리적 표현인 ‘'파라츠(פָּרַץ, parats)’충돌’, 치다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 단어는 성경에 50여차례 나온다고 하는데 유일하게 웃사의 사건에서만 충돌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 사건은 역대하 13장에도 나오는데 거기서도 개역한글판은 충돌로 번역되어 있다.) 어떤 이유에선 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초대 번역을 하신 분들은 이걸 꼭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상황의 결론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셨다는 말이나 충돌하셨다는 말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약간 뉘앙스가 다른데, 비유해 보면 치셨다는 건 왕의 명을 어긴 사람을 처벌하는 느낌이라면 충돌했다는 건 왕이 행차하는 수레에 뛰어들어 부딪힌 느낌이다. 충돌했다고 하는 건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행하시는 걸 어긴 게 아니라 직접 막아 섰다는 뜻에 가깝다.

 

지금 이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시온성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발생했다. 이 길은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이 계시는 성읍과 하나되는 길이다. 그러니까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이 거하시기 위해 창조된 사람이라는 형식과 성전 안으로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라는 언약을 이루기 위해 사람의 심령 안으로 들어가는 일의 예표다. 그런데 그걸 웃사가 막아 선 것이다.

 

웃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계획대로 사람 안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는 걸 막아 선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으로 들어간다는 건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이라는 육신의 심령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씨가 심기듯 들어가는 것을 설명하는 사건이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인 언약이 거하시기 위해 창조되었다. 시온성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읍이라면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인 하나님의 언약이 거하는 존재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회복되는 길을 웃사가 막아섰다.

 

그래서 표현의 적절성을 비교하는 건 아니지만 충돌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하나님께서는 그 뜻하신 대로 행하고 계시는데 사람이 하나님을 걱정하여 하나님의 일에 관여하고 무엇보다 막아 서는 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시는 능력의 행하심에 충돌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육신 가진 존재로 창조하신 건 그 속에 거하셔서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함이다. 그런데 사람이 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자기 뜻대로 살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 존재의 정체성과 목적을 본을 보이심으로 전하시고,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창조의 목적대로 사람 안에 임하셔서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살아 그 육신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일을 위하여 직진하신다.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복귀하는 게 바로 이걸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 안에 거하시려는 계획을 향해 직진하시는데 사람이 그걸 부인하는 게 충돌하는 것

 

그러므로 웃사의 일을 더 깊이 조명하면 웃사의 행위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원천적인 계획을 막아 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런 존재를 적그리스도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걸 부인한다는 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부인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웃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세우신 뜻에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을 걱정하면서 막아 서는 적그리스도의 표상인 셈이다.

 

이게 참 남의 일 같고 또 억지 해석 같아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 환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걸 부인하는 사건들이 너무 많고, 웃사처럼 하나님을 자기 생각으로 걱정하는 사람도 널려 있다. 오히려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와 기독교의 기본 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를 가장 대표하는 말이 예수님은 우리와 다르다. 우리는 그저 노력만 할 뿐이라는 겸손을 가장한 적그리스도의 말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달라, 우리는 그저 노력할 뿐”이란 말은 “나는 적그리스도다”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 혹은 우리와 다르다고 분리하여 예수님이 우리처럼 늘상 죄를 범하는 존재의 집합에서 제외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예수님을 걱정한다. 하지만 연약하고 죄를 범하는 육신을 가진 우리와 다르다고 분리하는 건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걸 부인하는 것이지 예우가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노력할 뿐이라고 말하는 건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우리 안에 거하셔서 성경대로 살고, 죄 없는 존재로 거듭나게 하시겠다는 계획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과 달라서 그저 노력할 뿐이라는 말은 나는 적그리스도다라는 고백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향하여 정한 뜻을 향하여 멈추시지 않는다. 어저께나 오늘이나 영원 무궁히 하나님은 이걸 위해 일하시고, 태초에 이 목적과 뜻을 가지고 사람을 창조하신 이래로 멈추지 않으신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너무 좋았다는 이 육신 안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과 자기를 구분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과 충돌한다. 그 결과는 죽음이다. 하나님이 뜻하신 바를 이루려 나아가시는 걸 믿지 않는다는 건 당연히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