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1-26)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씀과 율법에 관해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율법의 세부 사항에 해당하는 말씀들을 하나씩 말씀하십니다.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우리 일상에 있는 화 내는 일과 다툼, 정확히는 화해에 관해서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형제에게 화를 내며 욕하는 자는 이미 살인한 것이라는 말씀으로 유명한데, 사실 이 말씀의 본론은 여기가 아니라 뒷부분입니다. 우리가 누구와 화해해야 하는 상황인지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선 시작하시는 부분에 있는 옛 사람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 보겠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1)

 

옛 사람이라고 하면 우리는 쉽게 조상들을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도덕이나 역사 혹은 사회학 책을 읽고 있는 게 아니라 성경을 읽고 있으므로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옛사람, 즉 그리스도로 거듭나기 전 상태의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옛사람은 율법 안에 있는 사람, 성경을 행위로 지키려는 구습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즉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살인으로 대표되는) 범죄 행위(행동)을 심판한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2-24)

 

우리는 형제에게 화가 나서 욕을 하는 게 이미 살인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말이 그렇지 뜻이 그런 게 아니다라면 인위적으로 침소봉대 합니다. 조금 더 신중한 부류는 행위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걸 강조하신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들의 말씀을 사람이 불편하다고 맘대로 가감하면 안 됩니다.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이 완성되지 않은 옛 사람의 대표인 바리새인보다 의가 낫지 않다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 또한 궤를 같이 한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보고 욕하는 자는 이미 살인한 것 즉 살인범과 같은 범죄자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여기서 사람이 왜 화를 내고, 욕을 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화를 내는 이유는 사실 단 한 가지입니다. 바로 자기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상대나 상황이 자기 기준,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화를 내고 욕을 합니다. 내 기준에 충족된 사람이나 상황에서 욕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에 재밌는 게 있습니다. 바로 라가라는 욕의 의미입니다. ‘라가(ακά)’는 당시 유대인들이 쓰던 아람어레카(reqa)’에서 온 단어로 우리나라의 욕으로 바꾸면 골 빈 놈’, ‘머리에 아무 것도 없는 놈’, ‘쓸모 없는 놈과 비슷한 뜻으로, 사용 빈도로 보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장 기초 단계의 욕인 개새끼와 비슷하게 널리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를 연결해 보면 사람은 자기 기준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사람을 보며 화를 내며, ‘나의 기준에 너는 쓸모 없다라고 화를 내고 욕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분을 내고 형제를 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애초에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의 쓸모를 정의한다는 건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선악과를 먹은 사람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처럼 되려고 먹었고, 선악과를 먹었다는 건 선과 악에 대한 판단 기준을 사람이 가지게 된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은 자기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그 기준으로 화를 낸다는 자체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같은 큰 범죄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에 대해 바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은 의학적 관점 또는 생물학적 관점에서 살아 있는 걸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성경의 많은 곳을 통해서 멀쩡히 숨쉬고 있는 사람을 사망가운데 있다고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말씀하시는 생명 있는 상태는 바로 창조의 목적을 기준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의와 뜻을 표현하는 육신의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생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기준으로 사람을 쓸모 없다고 한다는 건 사람의 존재 목적을 자기 맘대로 정의하고 사망을 선고하는 살인범의 짓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사람의 교만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옛사람의 가치관과 세계는 살인으로 대표되는 분노의 표출을 심판하고 치리하는 게 정의지만, 하나님의 법, 율법이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라는 생명 기준을 가지고 있기에 사람이 자기 기준으로 사람을 심판하여 화를 내며 쓸모 없다고 판단하는 게 바로 살인범과 같은 흉악한 범죄인 것입니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희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엡 4:12)

 

예수님의 가르침은그러므로(therefore)’라는 접속사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두 가지 사례, 곧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상황과 송사에 휘말려 법정으로 향하는 상황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물을 드리기 전이든 송사를 당했을 때든 모두먼저 가서 화해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화해하라는 것인지 직접적인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지만, 앞서 언급된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보아 그 화해의 내용은 분명히 분을 내며 형제를 욕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창조주하나님께 제사와 예물을 드린다는 건 창조주가 사람을 지으신 본래 목적에 합당한 삶의 내용물로 자기를 드린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바울 사도가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육신은 애초에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는 전적으로 하늘의 뜻이 땅인 자기에게 이루어지기를 순종하고 헌신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사람의 존재 목적을 정한 상태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면? 게다가 그 목적마저 나의 이익을 위한 기준이었다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자기가 선과 악을 판단하는 하나님의 위치에 있는데 굳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상태로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실 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에 합당하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화목하게 한 후에 와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것은 단순하게 분노를 자아내게 한 특정한 사람을 기억하고 가서 화해하라는 게 아니라 제사에 합당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에 합당한 사람은 하나님이 인생을 주신 목적을 전적으로 수용하겠다는 헌신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된다는 건 자기 생각으로 선악을 판단하고, 사람을 판단하여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람의 모습대로 낮은 마음으로 형제를 섬기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화목하라는 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자기의 뜻이 되는 상태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가던 길을 돌아간다는 회개의 의미와 일맥상통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면 이전에 특정인과 다툼과 분노 역시 다 돌이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옛사람이 자기 뜻대로 살던 삶을 다 돌이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거듭남이 주는 변화입니다.

 

이어지는 송사하는 자와 길에서 사화하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지금 이 말씀은 우리가 왜 화를 내는지, 화내는 나의 화목이 무엇인지에 관한 말씀입니다. 나를 송사하는 사람과 같이 있다는 상황도 묘합니다. 단순하게 재판을 받는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재판장은 당연히 하나님일 것이므로 결국 이 사화, 곧 화해와 합의 역시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 조명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의에 어긋난 일로 재판을 받는 것이고, 또 나를 송사한 사람 역시 같은 법리로 나를 송사한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송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즉 율법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말씀이 왜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씀 뒤에 오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모든 율법을 다 완성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과 자연스레 연결됩니다. 길은 우리 인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우리가 살 동안에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목적을 다 이루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율법을 완성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게 아니면 율법과 모세가 나를 심판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송사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송사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요 5:25)

 

우리는 성경을 문자대로 읽으면 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정말로 행간을 봐야 합니다. 우리는 화를 내는 행동에 주목하지만 성경은 왜 화를 내는 지를 말씀하십니다. 화를 내는 행동 자체로 죄라고 규정한다면 예수님도 죄인이 됩니다. 욕을 하는 건 물론이고(독사의 자식들아) 남의 장사하는 전을 다 뒤집어 버리기도 하셨습니다. 무엇을 인하여 화를 내는 지가 본질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을 보면 예수님과 다윗이나 화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화를 내는 이유가 나의 기준, 내 선악의 가치 기준에 의한 것이라면 행동으로 화를 내지 않고 참을 인자를 써가면서 참아도 이미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것입니다. 이 기준을 가진 자신을 돌이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를 향해 화를 내고 욕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송사를 당할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육신이 되었다면 그건 율법이 완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더 이상 나를 송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화를 내는 행위, 성경을 행동으로 어기는 게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 하나님처럼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그 기준에 이르지 못한다고 사람을 욕하고 화를 내는 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실 때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이 된다면 모든 판단 기준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말씀이 내 육신이 되어 그 생명의 본성대로 육신이 행하고 살아간다면 모든 성경을 이룬 것이고,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때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화를 내도 옳습니다. 때로 그래야 합니다. 화를 내는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기준으로 화를 내느냐가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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