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6:16-18)
예수님께서는 외식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을 연이어 직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을 올바른 구제와 기도와 금식의 대칭점에 두셨습니다. 구제는 왼손이 모르게, 기도는 골방에서, 그리고 금식은 티 내지 않게 하라는 말씀을 관통하는 은밀함은 확실히 외식의 대칭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은밀함은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외식과 다른 행동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본질은 내재된 생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속에 있는 생명이 이끄는 온전한 구제와, 그 본성을 구하는 기도와 금식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외식하지 말라는 말씀은 결국 심령의 변화, 거듭난 생명을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금식이 자주 나옵니다. 특히 크게 회개할 때나 큰 일을 앞두고 있을 때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시작 전 40일 금식하신 건 우리가 모두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외식을 논하는 마당에 금식을 육신의 음식을 금하는 행동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금식의 의미를 새길 수는 없습니다. 금식이 가진 의미,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금식의 본질을 고찰해야 합니다. 물론 인생을 살며 정말로 중대하고 간절한 일이 있을 때는 어쩌면 금식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금식은 절대적인 결핍 상태입니다. 자의적으로 그 결핍에 들어가는 게 금식입니다.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는 게 성경의 의도라는 관점에서 육신이 금식의 상태가 된다는 건 영적으로 채워야 할 것이 있는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영적으로, 심령에 채울 것이 없거나 혹은 하나님이 결핍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을 채우려고 금식한다면 내용과 형식이 어긋난 것입니다. 이렇게 내용과 형식이 어긋나는 게 외식인데 금식이라는 행동을 빌미로 이런 외식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온전한 금식은 내 안에 하나님의 의가 절대 결핍 상태임을 고백입니다. 그 고백이 육신의 음식을 금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방향은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합니다. 심령의 결핍이 육신의 음식을 금하는 방향으로 나타나야 온전한 금식입니다. 그 반대는 당연히 외식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금식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절대적인 결핍 상태라는 걸 인지하고 시인해야 합니다. 이것이 죄를 시인하고 자백하는 것입니다. 금식은 음식을 끊고 기도하는 자체가 쟁점이 아니라 어떤 의가 절대 결핍 상태인지를 인지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금식은 육신의 음식에 관한 말씀이 아니므로 육신의 초췌하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할 때 육신의 초췌함을 드러내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는 외식을 경계하시는 의도와 상관이 있습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지 않으면 자연히 초췌한 모습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와 다르게 말씀하신 건 육신의 부족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시고 살게 하신 뜻에 대해 어두울 때 이 궁핍을 채우기 위한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금식의 참 의미를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금식은 비우는 거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채워져야 할 게 잘 채워져 있다면 굳이 비워낼 필요가 없습니다. 콜라병에 콜라가 멀쩡히 담겨 있는데, 다른 걸 담을 목적으로 콜라를 비워내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 원리로 볼 때 성경이 금식을 말씀하시는 건 사람 안에 원래 있어야 할 게 아닌 다른 게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질그릇으로,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이걸 비워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아닌 것을 비워내는 게 금식의 시작
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의가 거하기 위해 창조된 질그릇이자 성전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선과 악을 판단하는 가치관을 넣고(선악과를 먹고), 그 기준에 따라 세상에서 자기가 선하다고 하는 것을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세상의 가치를 채웠습니다. 금식은 이걸 비워내는 것이며, 더 이상 이걸 채우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식은 비우고 이전 것을 더 이상 채우지 않는 게 궁극의 목적이 아닙니다. 있어야 할 것, 원래 자기 것,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뜻을 채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절박한 상황을 마지하면 금식을 하곤 합니다. 우리가 사용구처럼 생각하는 구원도 잘 생각해보면 어떤 위험, 그것도 나로서는 해결할 수 없어 도움이 필요한 위험이 무엇인지부터 정의해야 온전하듯이, 금식 역시 내 안에 있으면 절대로 안 되고, 더 이상 취하면 안 되는 게 무엇인지부터 정의가 되어야 온전한 금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일반으로 금식이라도 해야 할 것처럼 느끼는 절박한 상황들이 과연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없어서, 하나님의 의와 뜻이 아닌 세상 가치가 내 안에 충만하다는 게 인생의 절박한 상황인지 반추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뜻인 인생의 목적이 없는 상태가 금식이 필요한 절박한 상태
그러나 기독교 신앙 안에서 금식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이 있는 지는 모르겠는데, 예전 7,80년에는 방언을 받겠다고 기도원가서 금식하면서 때론 소나무 하나 뽑아야 한다는 농담 같은 말로 간절히 기도해야 함을 강조하고 각오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방언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뜻,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는 계획해야 하지만 사실 그런 사람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같이 기도하는 사람들 중에 자기만 방언을 못하니까 그렇게 간절한 수단으로 금식과 철야를 선택한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건 당연히 올바른 금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금식을 해야 할 정도의 절박함을 느껴야 하는 건 육신의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닙니다. 남들 다하는 데 방언을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상대적인 것 역시 아닙니다.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결핍한 것은 우리가 사는 목적, 인생의 목적, 삶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없는 심령이 바로 신랑이 없는 금식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이건 우리가 창조주도 아니고, 내 삶을 스스로 선택한 것도 아니므로 내 안에 전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건 나를 창조하신 분에게만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존재한다는 걸 인식하기에 존재의 목적을 모른다는 건 그야말로 절대 결핍입니다. 이게 우리가 금식해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입니다.
내 안에 채워야 하는 건 오직 내 육신이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
또한 금식은 육신의 음식을 금하는 게 다가 아닙니다. 금식의 핵심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아닌 걸 금하는 것입니다. 육신보다 영혼이 중요한 건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내 심령에 있어야 할 게 없는데, 있어야 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걸 채워서는 안 됩니다. 있는 것도 비워내야 하는데 더 채운다는 건 당연히 안 되는 일입니다. 육신의 금식은 전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본질과 핵심은 심령에 채워야 하는 것, 의와 뜻과 가치관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 내 육신이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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