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3-14)

예수님께서는 어떤 것이라고 구하면 다 주신다고 해석할 수 있는 말씀에 이어서, 찬물을 끼얹듯 이번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세상에서도 이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아주 경쟁률이 높아서 들어가기 힘든 대학에 들어가면 좁은 문을 뚫고 들어갔다라고 하듯이, 세상의 가치관에서도 성공하려면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길, 남들이 어렵다고 꺼리는 길을 갈 때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너무나도 유명한 이 좁은 문은 단지 확률적 배경을 바탕에 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다닌다는 것, 예수를 믿는다는 게 인구 대비 좁은 길이라는 의미만 가지고 있다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가끔씩 생각해보면 확률적 측면에서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가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많을 수 있나?”와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확률 혹은 대비로서 좁고 적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 좁다협착하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물리적 협소함을 말하는 게 아니라, 굳이 설명하자면 심리적 압박 혹은 자유도 같은 것입니다. 좁은 문(στενς πύλης, 스테네스 퓔레스)은 내가 맘대로 할 여유가 없는 제한적이고 통제 받는 상황을 말합니다. 내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좁다는 의미입니다. 협착(τεθλιμμένη, 테들림메네)은 더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포도주 틀 안에서 압착되는 포도의 상황 같은 걸 의미하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반대로 멸망으로 인도하는 큰 문과 넓은 길은 운신의 폭이 넓은 길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넓고 큰 길로 가는 사람이라고 말한 부류는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뜻대로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신앙을 떠나서 일반 사람의 관계 속에서도 남이야 뭐라든, 남이 불편하든 말든 자기 맘대로 하는 사람이 바로 넓고 큰 길로 가는 사람입니다. 이상하게도 세상과 사회에서도 그런 사람의 결말은 극과 극입니다. 아주 성공하거나 아주 망하거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이 말씀을 다른 말씀으로 표현한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젊을 때는 네 맘대로 다녔지만, 나중에는 사람들이 너를 원치 않은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좁고, 협착하며, 압박을 받는 길은 남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는 길입니다. 전쟁에 패한 백성들이 적국에 종으로 끌려가는 길은 그 길이 아무리 넓고 편한 길이라고 해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좁은 문, 협착한 길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설명을 하고 나면 인생을 압박 받으면서 억지로 사는 게 예수 믿는 인생인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맘대로 하려는 사람의 생각이 사람에게 좋고, 합당하고, 맞느냐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당장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존엄성 있는 인생처럼 보이지만, 이는 학생이 지금 당장 게임하고 노는 걸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학생일 때는 학생의 본분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사람의 본분이 있습니다. 이 본분을 져버리고 자기 맘대로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큰 문과 넓은 길로 가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분명 내가 선택하고 조성한 인생이 아닙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부자인 건강하고 잘 생긴 남자의 삶을 선택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도 내가 내 인생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인생은 불행한 것이라는 의미 같지만, 본질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를 헛갈리게 하는 건 우리는 하고 싶은 것이 있고, 또 그걸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자아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인생은 또 내가 맘대로 선택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 인생을 개척하고, 선택하면서 자기가 꿈꾸고 소망하고 원하는 것을 향해 노력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을 아름다운 인생으로 칭송합니다. 인생을 낸 맘대로 선택하고 추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것은 내가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인생 그 자체가 나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맘대로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인생 자체가 나의 주권으로 얻은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게 좁은 문으로 가는 것

 

이는 내 인생에는 주인이 있다는 걸 뜻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 주인, 나에게 인생을 주신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신 빚(debt)입니다. 이 존재적인 의무를 벗어나, 내가 조성하거나 선택하지 않았지만, 존재를 인식한 상태에서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고 그게 당연한 것이고, 그게 인생이라고 착각하는 건, 길에서 주운 지갑 속에 있는 돈을 내가 쓸 수 있다고 뭔가를 마구 구매하는 것과 같은 도적질입니다. 내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인생의 존재를 인식했다면, 가장 근본으로 생각해야 하는 건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 나를 존재한 이가 나에게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찾고, 구하라는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그걸 찾는다면, 그래서 나에게 인생을 주신 주권자의 의도대로 산다는 건 내가 맘대로 하는 것과는 다른 삶입니다. 이게 좁은 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인생을 주신 뜻을 아는 것은 인생을 구속하는 일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그것이 협착이기도 한데, 존재에게 가장 평안하고 복된 상태는 존재하는 목적대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자동차 브레이크 패드는 빠른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 속도를 줄이거나 세우려면 자기 몸이 갈리는 엄청난 부하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브레이크 패드의 존재 목적입니다. 컴퓨터로 게임을 할 때면 CPU나 그래픽카드가 엄청난 열을 냅니다. 모든 기계에게 발열은 자기에게 치명적이지만, 그게 자기 본분입니다. 몸이 길리며 열을 내지만 브레이크 패드가 그 자리를 버리면 그냥 쓰레기, 산업 폐기물이 됩니다. 컴퓨터의 CPU나 그래픽카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목적을 벗어나면 상태는 평안하지만 그건 심판을 받아 쓰레기가 된 것입니다.

 

모든 존재에게 가장 평안하고 존귀한 것은 목적대로 쓰이는 것

 

사람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자기 뜻을 굽히고, 내가 편리한 것을 버리며, 높아지면 편하다는 걸 알지만 낮은 자리에서 남을 섬기고, 내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게 세상의 가치(브레이크 패드에게 평안 상태가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 가치)로 보면 실패한 인생이고, 자기 맘대로 하지 못하는 인생이지만, 그것이 원래 우리의 자리이므로 그렇게 살 때, 정확히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거듭났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안의 상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라고 하신 좁은 길은 바로 이 길입니다. 세상의 가치로 보면 실패자요, 조롱받는 자리와 삶이기에 모두가 가기 싫고,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압박 받는 삶인 듯해도 그게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이고, 내 존재의 목적이고 본질이라는 걸 알고 그렇게 사는 것, 아니 살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 그것이 구원이고, 평안이고, 복락이며, 진정한 삶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세상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인데 핍박과 조롱을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진정으로 좁은 길,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협착된 길입니다.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삶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삶을 단지 남들 가지 않는 블루오션을 선택하듯이 선택하는 걸 좁은 문으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기엔 표면적인 숫자로 볼 때 기독교인이 너무 많기도 합니다. 신천지와 같은 대규모 신앙 집단이 온전하지 않은 이유도 같습니다. 누구나 자기 맘대로 하는 걸 가치와 성공으로 아는 사람 사회에서 누구나 싫어하고 꺼리는 십자가에 끌려가는 삶을 그렇게 많은 사람이 짧은 시간에 동의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모두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복락을 추구하는 집단일 뿐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오늘날 정통이라는 교회들 역시 세상의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두가 큰 문을 지나 넓은 길,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의 가치와 자유와 편함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대로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본성대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거듭나는 좁은 길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영광이고, 평안이며, 존귀함입니다. 그건 한마디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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