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3-48)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너무나도 유명한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이 말씀은 세상의 철학이나 도덕 그리고 다른 종교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어떻게 다른 지를 구별하는 대표적인 신앙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그런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본다면 이건 정말로 쉽게 이해하고, 순종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의미만 새기는 걸로 타협하고 싶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원술을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건 신앙의 높은 경지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출발점인 구원을 얻고 하나님 아들이 되는 자격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관해 우리는 의미만 새기는 걸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원수는 내 인생에서 용서할 수 없는 파멸을 선사한 사람에 한정하지 않는 제법 넓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원수는 나를 증오하고 적대시하는 사람 모두를 아우릅니다. 원어로 보면 에크드로스 (χθρός)’증오하다’, ‘적대시하다라는 동사 에크도(χθω)’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적대시하는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원수가 이 정도라면 핍박한다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원수는 나를 적대시 하는 모든 사람 가리키는 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앞서 말씀하신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연결됩니다. 나를 증오하고 적대시하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오른쪽 빰을 때리면 왼쪽 빰을 내어주라는 말씀과 궤를 같이 합니다. 결국 십자가의 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듯 모두가 십자가의 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으로 더 설명이 필요 없기도 한데, 우리에겐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씀이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야 구원을 얻는다는 건 완전히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걸 제법 거창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굳이 지지 않아도 되는 손해나 수고를 앞장서서 감당하는 것과 같은 걸 십자가를 진다는 걸로 인식하고, 더 나아가 일반의 신앙인들은 가지 않는 선교나, 목회나, 국경 없는 의사회 같은 수고를 감당하는 것으로 한정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아주 짙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은 의외로 우리 일상에 가득합니다. 소소한 일상에까지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소한, 어떻게 보면 겨자씨처럼 대수롭지 않은 작은 일들까지 모두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건 본능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당면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지?’라며 판단한 후에 하는 것으로 삶 전체가 십자가를 지는 삶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항상’, ‘쉬지 말고같은 빈도 부사를 준행할 수 없습니다.

 

아내에게 혹은 남편에게 물 한 잔 가져달라고 하기 보다는 자기가 가서 먹는 본성을 가지는 것, 이것이 육신을 내어 주어 섬기는 것이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치약 뚜껑을 닫지 않는 가족에게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그걸 보면 자기가 닫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게 십자가를 지는 본성으로 사는 삶입니다. 이런 일들은 사소하고 단순하지만, 그 순간에 판단하여 매번 그렇게 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육신()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려면 이렇게 거듭난 본성으로 사람을 섬길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 이름(정체성, 생명 본성)외에 구원받을 이름을 주시지 않았다는 말씀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적대시할까요? 적대시하고 핍박하는 자를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이는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대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앞서 말씀드린 십자가를 지는 본성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본성은 세상의 가치에 역행합니다. 세상은 높고, 크고, 위대한 것이 존귀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본성은 낮아진 본성으로 섬기는 것이 존귀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자기 가치에 동조하지 않기에 적대시하고 핍박합니다. 말 그대로 미운 오리새끼가 됩니다. 다르다는 건 곧 핍박의 이유가 되고 적이 되는 명분이 되는 게 세상의 가치입니다.

 

특히 우리가 이 세상의 가치를 따르기 원하는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위험합니다. 사랑하기에 세상에서 위대해지고 높아지기를 바라는데 그에 역행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낮아져서 사람을 섬기는 존재가 되려 한다면 극구 말리며 그렇게 되는 것을 적대시할 것입니다. 모든 부모는 자녀가 세상에서 성공해서 사람들이 그걸 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지 낮은 마음으로 사람의 발을 씻기듯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집안 식구가 원수(원어가 같음)라고도 하셨습니다. ( 10:36) 이 모든 건 하나님의 법이 세상의 법에 역행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 10:36)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는 나와 나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파멸적 손해를 끼친 한정된 사람을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세상의 가치를 좇아 피라미드 위로 가는 걸 선과 영광으로 여기고, 그곳에 서서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셨다. 너희도 하나님을 믿으라라고 외치는 걸 신앙이라 믿는 사람들이 모두 원수입니다. 그런 신념과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의 도를 경멸하며 핍박합니다. 이것이 원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겸손하고 낮은 마음으로 섬기며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할 존재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표현하는 데는 육신이 필요합니다. 말로만 배부르라고 한다고 배 불러지지 않습니다. 육신으로 수고해서 대접해야 하고, 이건 육신을 내어주는 것이며 섬기는 종의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몸소 보이셨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육신이 된 분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약 2:15-16)

 

그리고 그 육신이 향유 옥합처럼 십자가에 놋뱀처럼 달려 깨어지니 그 속에 있던 하나님의 마음이 향기처럼 퍼져 우리가 예수님의 그 모습이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걸 알고 이것이 내 생명이 될 때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생활의 소소한 것에서 목숨을 내어 주는 것까지 육신의 내어 주며 낮은 본성으로 섬기게 됩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이렇게 생명이 된 삶은 세상의 가치와 완전히 달라 핍박을 받지만 이 본성이 생명이 된 사람을 이를 금할 수 없습니다. 칼로도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 기준에 역행할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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