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이라는 말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의미 그대로입니다. 남이 받는 고통에 대한 배려와 자비 그리고 고통을 해소해 주려는 마음입니다. 원어인 헬라어 엘레오스(λεος)나 히브리어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긍휼을 유발하는 고통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살면서 겪는 질병과 가난 같은 육신의 고통도 포함되겠지만, 가장 근원적인 것은 우리가 줄곧 이야기해 오고 있는 존재의 목적에 대한 어두움입니다. 자기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모른 채 그냥 견디듯 살아가는 사람이 천국에 속한 자가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는 팔복 이후 6장에 나오는 구제도 같은 맥락입니다. 구제라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을 몰라 방황하는 상황에서의 구제가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제의 본질입니다. 이렇듯 가장 중요한 고통과 결핍을 돕는 것이 진정한 긍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 어두워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알려주는 긍휼을 베풀려면 먼저 자기 안에 그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있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긍휼에 관한 복 이전에 말씀하신 복이 있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하고, 의가 풍요한 사람이어야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한 이 긍휼은 사실 그리스도의 본성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 실망한 예레미야가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겠노라 다짐을 해도 자기 마음이 불 붙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어 다시 핍박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본성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생명 속에 있는 긍휼의 본성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9)

 

또한 긍휼은 남는 여분을 나누는 게 아닙니다. 자기 육신을 내어주는 희생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기 육신을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심과 같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가진 긍휼이라는 본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으니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육신을 내어주는 게 긍휼입니다.

 

이걸 내 몸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같은 형식의 준수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육신을 내어 준다는 건 크게는 목숨을 내어 주는 것이지만, 근본은 내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처럼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먼 길을 가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육신의 수고를 감당하는 것이 육신을 내어주는 십자가의 삶이 긍휼입니다. 이런 희생 없는 긍휼히 여김은 없습니다. 말로 되는 긍휼을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긍휼을 베풀면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건 당연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이 여기신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인 형제들끼리 하나님의 의를 나누고 보증하는 혜택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매끄럽습니다. 이는 뒤에 나오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내가 영적으로 궁핍할 때 돕는 형제의 모습은 분명 나에게 하나님의 모습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더 나아가 교회라는 공동체의 역할로 확장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는 사람이 아니며, 육신을 향한 위협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육신의 환난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성도에게 있어 진정한 고통은 하나님의 의로 인한 고통과 핍박일 것입니다. 이런 고통을 긍휼한 마음으로 서로 위로하며, 보증하는 곳이 교회 곧 그리스도의 공동체라는 걸 생각하면 바로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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