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산상수훈 내용 중에 딱 한 절만 독립된 문단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내용의 흐름으로 봐도 다른 말씀과 직관적으로 즉시 연결되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너의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인데, 여기서 아주 특이한 게 있습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주면 돼지가 너희(사람)’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주가 상하는 건 이해할 수 있는데, 진주를 돼지에게 주면 왜 사람이 상한다고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진주가 금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고 합니다. 금과 은은 녹여서 가공이 되는 반면 진주는 훼손되지 않는 가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요한계시록에서도 귀하게 쓰인 것이라 생각하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진주 자체가 신앙에서 가치를 가지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진주나 금과 은을 말씀하시는 것은 <가치의 개념> 때문이지, 비유로 쓰고 있는 세상의 가치가 말씀의 본질은 아닙니다.

 

이런 점들로 볼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 지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의 것을 가치 있게 다루듯이 복음과 하나님의 뜻도 그 귀함을 알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가치가 있는 것은 늘 구분하여 취급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와 뜻과 말씀을 귀하게 여긴다면 구분하여 대할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입니다. 거룩은 구분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이 우리에게 존귀한 것은 세상에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사람이 인지할 수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도,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사람에게 없는 건 정말로 딱 하나입니다. 자기가 존재하는 목적, 쉽게 말해서 인생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존재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목적을 알 수 있는 역량은 말 그대로 1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걸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까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진정한 은혜입니다. 은혜란 내가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것을 거저 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실체가 필요했기에 육신을 주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은 이 목적을 정말로 은혜롭게 표현한 말씀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 계획)을 표현할 존재인데, 그 목적이 달성된 분이 예수님이며,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오신 것은 육신을 가진 우리가 그렇게 되어야 함을 보이시려 함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서 향유 옥합처럼 그 육신이 깨어지니 그 안에 있던 물과 피, 곧 육신이 되었던 생명의 말씀이 드러났습니다. 그걸 본 사람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분이었다는 걸 알았다는 뜻입니다. 아들은 남자인 자녀를 한정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사람들은 육신을 가진 자기 인생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구원의 실체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가치와 명확히 구분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는 피라미드 꼭대기로 갈수록 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은혜의 가치는 내려갈수록 귀합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그래 네가 옳다며 자기를 낮추어 내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일을 하는 날이 365일 중에 몇일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인 아들이심에도 너는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라는 사람들의 주장에 자기 육신을 내어 주시고는 세상에서 가장 낮고 천한 사형수의 자리로 가셨습니다. 그것도 신념이 아니라 육신이 된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을 통해 표현하시고자 하신 낮아지고 겸손히 섬기는 사랑의 본성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세상과 구분되는 거룩함입니다.

 

이 거룩한 것을 가치를 알지 못하는 돼지에게 준다면, 세상에서 좋다는 것이면 무엇이든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사람에게 준다면 그건 나를 상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나의 낮아짐을 이용하려 할 것이고, 나의 인생을 갈취할 것입니다. 우리가 낮아지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해야 하는 대상은 좋다면 양잿물도 마시는 욕심 많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생의 목적을 구하고, 하나님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이렇듯 대상을 잘못 정하면 진주 같은 거룩함을 인하여 내가 상하는 것입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주면 내가 상한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되 듣지 않으면 나와서 신발의 먼지마저 털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한 것,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을 그렇게 책망하신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정한 인생의 목적을 알고 순종하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램프의 요정처럼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냉소와 질책을 하셨지만, 자기 인생에 겸손한 이들에게는 눈물을 흘리시며 긍휼을 베푸신 것 역시 같은 이유입니다. 이 모든 건 오직 하나, 우리 육신을 통해 표현하시려는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전지전능하신 만유의 주 하나님께서 가장 제일로 여기시는 사랑을 표현하시기 위해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 나를 창조하셔서 삶을 살게 하신 은혜와 뜻의 거룩함을 알고, 그것에 순종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고 구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고, 인생의 목적을 알기 원하는 거룩하고 존귀한 사람에게 나의 육신의 수고와 하나님이 원하시면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순종하는 본성을 늘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오늘 하루 누군가에게 그래 네 말이 맞다라고 하는 것에서부터 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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