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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상) 26. 다윗을 사랑한 요나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무엘상 Date : 2025. 9. 18. 10:22 Writer : 김홍덕

다윗과 요나단은 우정의 표상이다. 이들의 우정은 실로 대단했다. 요나단은 다윗을 죽이려는 아버지 사울에게 목숨을 걸고 맞섰고, 자기 것이 거의 확실한 왕관마저 흔쾌히 다윗에게 양보했다. 다윗은 요나단과의 약속대로 평생 자기 상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앉게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대단한 이들의 우정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사울은 자기 생각에 좋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불순종의 아이콘이다. 그리고 요나단은 그의 아들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라는 관점에서 보면 요나단은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의가 육신이 된 아들이다. 그러니까 요나단은 내 인생을 주관하는 왕위의 계승자다. 그런데 요나단이 이 미래에 균열을 일으킨 것이다. 바로 하나님이 정한 왕을 사랑한 것이다. ? 세상 가치의 상징인 골리앗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긴 것을 봤기 때문이다.

 

세상의 위대함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긴 다윗을 사랑한 요나단

 

요나단은 우리 육신, 우리 옛사람 안에 있는 양심이다. 혈통으로는 불순종의 아들인데 하나님이 세운 왕을 사랑하고 그에게 자기 왕위를 양보하는 양심이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우리 육신 안에 하나님이 세운 왕을 영접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바로 요나단이다. 우리는 모두 요나단처럼 하나님이 정한 왕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도록 물러서야 한다. 그게 하나님을 믿는 모습인데, 요나단은 이걸 우리에게 보여준다.

 

요나단은 골리앗을 이긴 다윗의 말을 듣고 다윗을 사랑했다.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세상을 이기려는 시험과 고난을 하나님의 정체성으로 이긴 일을 듣고 하나님이 세운 왕을 사랑한 것이다. 이는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정한대로 살려는 남아 있는 양심이다. 이 양심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하게 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사랑하게 한다. 이 양심이 작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양심에 화인 맞았다는 말씀이 여기서 비롯된다.

 

이렇듯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걸 아는 양심이 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려운 일을 만나면 신을 찾는 건 본능적으로 자기를 주관하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게는 그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걸 본질로 알고 골리앗과 같은 거대함과 위대함을 추구하고, 그걸 얻지 못한 자신을 초라하게 본다. 그런데 요나단은 다윗의 가치를 바로 본 것이다. 세상의 위대함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기는 걸 사랑한 것이다.

 

아닌 듯 해도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자 양심은 늘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나를 따라 오라라는 말 한 마디에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간 제자들의 일처럼 마치 요나단이 한 순간에 다윗을 사랑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제자들이나 요나단은 모두 긴 시간 예수님과 다윗에 대해 관해 기생 라합이 창을 열고 이스라엘 소식을 모니터링하듯이 귀를 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를 따라오라는 말과 골리앗을 이긴 일이 잔을 넘치게 하는 한 방울의 물이 된 것이다. 즉 스모킹 건이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 육신은 거저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을 마냥 하나님 앞에 버려야 할 존재처럼 보기도 하지만, 우리 옛사람은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로켓과 같다. 우리에게 육신이 없고, 육신에 깃든 가치관이나 의나 경험이 없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 육신의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아는 일에 필요 없다면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시고, 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육신이 될 이유가 없으며, 우리 육신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할 이유도 없다.

 

우리는 육신으로 살면서 얻은 경험과 가지게 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관찰하고 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로 대변되는 내 인생이라는 왕국을 하나님이 세운 왕에게 넘겨주는 연결고리다. 자기 것이 될 수도 있는 나라를 하나님께 드리는 양심이다. 얼마든지 우리는 우리 인생을 자기 것으로 삼고 살아갈 수 있음에도 하나님께 드리도록 결정하고 순종하는 육신의 경험과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육신으로 살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 것들은 내가 순종하기에 따라서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주체다. 요나단은 그런 주권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딤전 4:4)

 

사람 안에는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체성,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시며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골리앗과 같은 세상을 이기는 것을 동경하고 믿는 마음이 있다. 이 마음이 자기 목숨을 위협하면서까지 불순종의 아들로 살기를 강요하는 사울에 맞서 다윗을 사랑한 요나단처럼 육신의 정욕을 이기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려 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사울과 같은 옛사람은 아들 요나단을 위협한 사울처럼 우리를 위협하지만, 우리는 그런 위협에도 다윗을 사랑한 요나단 같은 마음으로 인해 하나님이 세운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는 인생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양심이고, 예수님께 바통을 넘기는 세례 요한과 같은 요나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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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쓰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말은 초한지 유방과 한신이 나눈 마지막 지적 대화 속에 나온다. 왕인 유방이 한신에게 나는 어느 정도의 군사를 다스릴 수 있나?” 물으니 한신은 폐하는 기껏해야 10만 정도의 병사를 부릴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빈정상한 유방은 그럼 너는?”이라고 물었을 때 한신이 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라고 답한 게 그것이다. 그러자 유방은 그럼 넌 왜 내 밑에 있나?”라고 물었고, 한신은 폐하는 나와 같은 장수를 다스릴 수 있고, 이는 신이 내린 능력이다라고 답했다.

 

다윗이 블레셋을 이기고 지금 말로 승리 축하 퍼레이드를 펼쳤을 때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소고를 들고 춤추며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자는 만만이라고 노래했다. 이 말로 인해 사울은 다윗을 크게 시기하고 결국 죽이려고 마음을 정한다. 물론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이유는 단지 시기만이 아니다. 그 아들 요나단이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막고자 한 이유도 크다.

 

초한지의 유방과 한신은 유방이 나름의 승자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울과 다윗은 다윗이 승자가 된다. 정치적으로 본다면 사울이 다윗을 전쟁에서 쓸 유용한 장수로 계속 인정했다면 결과는 나아졌을 수 있다는 이론을 전개할 수 있다. 물론 성경은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때 이미 다윗은 오래 전에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상태였으므로 하나님 백성의 나라인 이스라엘의 왕으로 낙점 받은 상태였다.

 

이후로 사울과 다윗은 오랜 시간, 아니 오랜 세월 다투게 된다. 사울은 다윗을 감시할 목적으로 딸 미갈을 주어 사위로 삼지만, 다윗은 도망자가 되고, 사울은 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점점 미쳐가듯 다윗을 죽이려 한다. 사울은 자기 아들 요나단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려 하지만 정작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며 오히려 아버지인 사울을 적대시하는 관계를 보인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를 이스라엘 역사의 한 단면과 정치적 사건으로 보고, 그 갈등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조명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스라엘 왕궁에서 일어나는 왕과 백성의 지지를 받는 왕자의 친구이자 공주의 남편인 다윗과의 갈등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다윗을 돕는지를 말하고자 하는 게 본질이 아니다. 우리 각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법이 자아를 어떻게 이겨가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이 관점의 정당성을 위해 다시 한번 우리 각 사람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추구하며 살아가는 각자의 인생에서 왕이라는 걸 상기시키고자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건 손바닥을 뒤집듯이 쉽게 안착하는 게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한 땅으로 가는데 40년이 걸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믿는데 3년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오순절 성령강림의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서 그 말씀이 생명이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다. 그냥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간단한 문장으로 표현하니 즉시 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모습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새사람이 내 삶을 주관하는 것을 방해하고 유혹하는 옛사람의 본성이다.

 

사울과 다윗의 갈등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기름 부은 약속된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내 삶을 주관하는 왕이 되기까지 내가 생각하는 좋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사울의 마음과 치열한 싸움이 있다. 쉽게 표현하면 옛사람과 새사람의 지속적인 갈등이 있고, 그 길고 지루한 싸움 끝에 다윗이 왕이 되듯, 하나님의 약속하신 생명과 본성이 나를 지배하는 왕이 된다. 사울과 다윗의 다툼은 정치 싸움에서 하나님을 잘 믿는 다윗이 이긴다는 표면적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영적 싸움에 관한 이야기다.

 

다윗과 사울의 갈등은 우리가 익히 아는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전환되는 전환의 상세 설명판이다. 사도 바울은 아주 간략하게 예수 안에 있는 나에게 정죄함이 없다라는 간증으로 표현했지만, 그 과정은 길고 긴 싸움이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기까지, 그리스도의 본성이 나를 주관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린다. 하나님의 의와 법이 어렵고 시간이 걸리는 의와 법이어서 그런 게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 짐은 가볍고 쉽다. 다만 사람이 하나님의 의와 법에서 너무 멀리 가 있기 때문에 돌아오는 여정이 필요한 것이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갈등 속에서 사울의 아들과 딸이 돕는데, 아들은 그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이고, 딸은 아버지의 형식이 육신이 된 존재다. 즉 내 안에 있는 나의 의와 삶의 양식과 말과 행동과 생각들이 내가 그리스도의 본성이 주관하는 사람이 되는 과정을 돕는다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다윗과 요나단의 눈물 겨운 이별처럼 결국 내 안에 있던 옛사람의 옳음과 이별하는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다윗과 요나단이 화살을 매개로 이별하는 장면을 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으로 여길 때가 많다)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의 다양성을 표현하기에 삶의 환경과 형편과 경험과 과정이 모두 다르다. 그래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했던 것처럼 나의 옛사람이 거듭난 새사람이 나의 인생을 주관하지 못하도록 하는 유혹과 습관과 욕심으로 나를 주관하려 하는 각양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대입하는 숫자는 달라도 공식은 일정하듯, 개인의 삶이 다양해도 누구나 새사람이 자기 삶을 주관하기까지 적지 않은 갈등의 세월을 보낸다. 사울과 다윗의 갈등은 이것을 말씀하고 있다.

 

지금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이 관점을 중심으로 조명해 보면 많은 이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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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상) 24. 다윗과 골리앗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무엘상 Date : 2025. 9. 16. 06:57 Writer : 김홍덕

(삼상 17)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일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거의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물론 이 일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는 일에 비하면 기적에 비할 수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았다면 이렇게 전개될 수 없는 일이라는 건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바란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승리를 얻기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살펴보려 한다.

 

골리앗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위대한 힘이다. 상대를 제압하는 크고 강력한 힘은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힘에 대한 본능적 기대와 소망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그런 힘을 의지하는 삶이 아니다. 그런 게 필요 없다는 건 아니다. 그걸 문제를 해결하는 근원적 원리로 보지 않으며, 그런 힘으로 얻을 수 있는 인생의 편리와 평안이 우리 삶의 목적이나 지향점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것들은 목적을 위해 일어나기도 하는 일이다.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싸우지만, 나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싸운다라고. ‘여호와의 이름으로라는 말 속의 이름은 호칭이 아니다. 이건 정체성이다. 휴대폰이라는 이름은 휴대하여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전화기라는 정체성을 대변하듯 이름은 그 존재의 정체성이다. 골리앗의 정체성은 칼과 창이다. 세상의 강함과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다윗의 무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정체성

 

반대로 다윗의 방법은 여호와의 이름, 곧 하나님의 정체성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게 세상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믿음이다. 잠언의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며, 여호와를 아는 것이 명철이라고 했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셨다.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려면 근원적으로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건 진화론을 믿느냐 창조론을 믿느냐를 조명하는 각도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원리가 어디에 있느냐는 문제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명철이자 영생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면 세상의 모든 경영과 원리와 이치는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는 걸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문제의 해답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걸 믿어야 한다. 그러면 그 원리와 이치와 해답은 모두 하나님의 정체성에서 나온다는 걸 알게 된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는 건 세상의 모든 이치와 원리와 방법 그리고 힘과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걸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세상에선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걸 이기는 힘

 

또한 다윗은 골리앗을 일컬어 할례가 없는 자라고 했다. 이건 육체적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하나의 증표인 할례 이야기가 아니다. 할례는 형식과 내용 중 무엇을 본질로 보는 사람인지를 구분하는 표식이다. 우리 육신은 우리 자아의 겉모습이자 껍질과 같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내용의 표현하는 형식이며,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도구다. 그래서 할례를 받았다는 건 하나님처럼 외모가 아니라 속사람을, 육신이나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본질로 보는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의미다.

 

할례가 없다는 건 하나님의 정체성이라는 내용을 보지 못하는 상태

 

칼과 창이라는 도구로 전쟁에 나선 골리앗을 할례 없는 자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정체성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욕한다는 건 쥐뿔도 모르는 놈이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다는 말이다. 내용과 본질인 하나님의 의는 모르고 껍질과 같은 크고 위대함으로 세상을 이기려는 건 바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는 다윗에겐 이게 보였지만 다른 사람에겐 이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윗이 이긴 것이다. 세상에서의 삶은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인 것 같지만, 그 껍질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이 진정한 힘이고 본질임을 아는 것이 할례를 받은 것이고, 그런 영적 할례가 있어야 세상을 이길 수 있다. 내용이자 본질인 하나님을 알아야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살아가면서 겪는 많은 어려움과 문제들은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면서 해결한다. 문제와 어려움은 하나님의 뜻과 의대로 살지 않아서 겪는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사랑과 긍휼로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문제를 겪는다는 건 당연히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므로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면 해결되는 게 당연하다. 이건 신앙의 범주 이전에 상식적 논리다. 이게 상식이 되려면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과 같은 방향으로 살아가면 문제는 해결된다.

 

우리는 세상에서 문제를 마주하면 그 문제보다 더 큰 힘을 하나님께 구하곤 한다. 그러나 이제는 방법을 달리 궁리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고 있고,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세상을 경영하신다는 걸 믿는다면, 그런 하나님의 경영 아래에서 겪는 문제는 하나님의 뜻과 다른 방향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같은 방향으로 돌아서서 간다면 인생의 문제는 해결되고 평안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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