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예수님의 희생의 십자가가 있었음에도 자신을 죄 없는 존재로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형제가 아닌 것이다. 그런 이들이 바로 손님이다. 형제가 아닌 사람인 손님을 대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지 않은 사람들을 종과 같이 섬기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보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지도 알지도 못한 유대인들의 주장 앞에 자기 육신으로 대접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당연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형제가 아니다. 즉 아버지가 다르다. 유대인들의 하나님 아들은 세상에서 이긴 자이고, 예수님은 세상에서 패배하였다. 그리고 아들이 다르다는 것은 당연히 아버지가 다르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과 같이 하나님과 그의 아들에 대한 개념이 다른 사람들이 바로 손님이다.


아버지는 가정의 모든 의를 가지고 있고 그를 중심으로 한 가족 구성원이 아닌 사람이 바로 손님이니, 하나님 아버지의 의가 아닌 다른 의를 가진 사람이 바로 손님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이들을 자기 육신으로 대접하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다.


예수님께 그런 본성을 주신 아버지가 같다면 그 본성도 예수님과 같다. 즉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접하는 것, 종과 같이 그들을 섬기는 본성과 삶을 가진 사람이 바로 예수님과 같은 의를 가진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하나님 아들은 당연히 죄가 없다.


이와 같이 자신이 예수님의 희생으로 예수님과 같은 생명과 본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믿음이 나타나서 삶이 되면 손님을 대접한다. 나타난 것 곧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믿음의 표현된 것이다.


특별히 이것이 천사를 대접하기도 한다는 했다. 언뜻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찾아 온 손님 3명을 대접하였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이때 그것을 들은 사라가 웃기도 했고, 그래서 아들 이름이 이삭(웃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브라함의 행운과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손님을 대접하는 본성을 가졌기에 일어난 일이다.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천사를 대접하는 것이 되기도 하니 그렇게 하라는 것은 빌립보서 2장의 말씀을 보면 쉽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3-5)


이와 같이 손님을 대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신앙 없다고 멸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나보다 더 나은 존재로 여기고 섬기라는 말씀이다. 아마도 이 빌립보서의 말씀은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힘든 말씀에 속할 것이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많은 기독교인들은 전도도 적선하듯이 한다. 이런 본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는데 바로 교회 세습에 대한 사회적 비난에 대처하는 자세다. 기독교인의 한 부류인 교회를 세습하는 사람들은 교회 세습에 대한 비난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악한 시험”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기독교 안에서도 비판 하지만 알고 보면 하나님을 모른다고 차별한 사람들에 대한 일관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하나님을 아는데 너는 알지 못하니 세상에서의 관계나 형편이야 어떻든 너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나의 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니 내 말을 듣고 천국에 가도록 해라’라는 마음을 가진 것이 바로 신앙인들의 모습인데, 그것은 손님을 대접하는 삶이 아니다. 이것은 손님을 대접하는 삶이 아니다.


그렇게 손님을 대접하는 삶을 살 수 없다면 당연히 예수님과 다른 존재다. 아버지가 다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가진 마음이 바로 하나님을 모른다는 이유로 신앙적 차별과 심지어 멸시를 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적선하듯 전도하고 은혜를 베풀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다른 존재다. 그런 사람들은 분명히 자신은 구원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희생이 자신의 것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예수님과 아버지와 생명이 달라서 형제라고 할 수 없는 이들의 주장에 육신을 내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알고, 그것이 자신의 존재 정체성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노력하거나 훈련할 일이 아니라 그냥 살기만 하면 손님을 만날 때 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만날 때 마다 자기 심령에서 육신으로 나타나는 삶의 모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삶이 그러하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 같지만 믿지 않는 것이거나, 아직은 아주 어린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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