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다는 것은 나라의 구성원 모두가 진동하지도, 흔들리지도 않는 땅과 같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의 구속을 온전히 믿고 자신의 죄를 위하여 드리는 제사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담대히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바로 진동하지 않는 나라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과 같으시므로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존재가 아니면 다 소멸 당하므로 이 나라를 은혜로 받은 사람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섬기라고 권면한다. (히 12:28-29)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이런 경고와 권면의 말씀을 대할 때 경고가 초점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본성이 없는데 경고가 두려워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십일조 하기 싫은데 하지 않으면 재물적 손해를 볼 것이라는 교회의 협박이 두려워 십일조를 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말씀은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 말씀 그대로 은혜로 받으면 모든 것은 다 종식된다. 은혜는 자신의 능력으로 되지 않는 것을 받았다는 의미다. 그리고 사람에게 있어 자신의 능력으로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과 과정이다. 육신의 형성 과정이야 성인이 되면서 교육도 받고 또 결혼을 통해서 경험하고 알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그 정신과 존재의 유일한 개성까지 어떻게 형성되고 그 육신에 그 존재가 부여된 이유와 같은 것은 스스로 절대로 알 수 없다.


따라서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은혜는 자기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알려 주는 분이다. 더욱이 그것을 나에게 알게 하시려고 큰 희생을 드리셨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은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알게 하신 그 뜻을 우리가 은혜로 받고 순종하면 그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없다.


간단한 예로 음식을 대접한 사람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은 그 음식을 감사히 그리고 맛있게 먹는 것인 것과 같다. 음식을 준비한 사람의 목적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목적을 가진 이에게는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 이상의 기쁨이 없다. 합격이란 목적을 가진 이에게 합격이 가장 큰 기쁨인 것도 동일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만들고 경영하시는 목적 안에 내가 거하고, 그 목적대로 사는 것이다. 그것 이상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이 없다.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끼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 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냐(미6:7-8)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의 목적을 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본질이 있다면 그것이 나타난 것,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형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3장에서는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 목적과 하나가 된 사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설명한다.


이것을 볼 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13장에 나오는 말씀대로 행동한다고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언제나 그렇듯, 성경에 나오는 행위에 대한 권면, 행위 규범은 그 행위를 실행하므로 말씀을 지키는 것이 되지 않는다. 성경은 오히려 그것을 외식이라고 하고, 그런 모습은 본질적으로 율법적인 신앙이다.


신약성경에 있는 말씀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문자로 기록된 성경의 구절을 행동으로 지켜내어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다 생각하거나, 아니면 행동으로 말씀을 지켜내며 하나님께서 의롭고 선하게 여기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또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생각이므로 모두 율법이다. 히브리서 13장 시작에 나오는 것과 같이 어떤 행동에 대한 권면은 그런 행동을 하는 존재가 되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자신이 신념을 가지고 노력하고 있다면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적인 신앙이라는 의미다.


다시 히브리서의 시작부터 생각해보면 히브리서의 시작은 하나님은 이제 아들로 말씀하신다는 것으로 시작했다. 아들로 말씀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로서 말씀하신다는 뜻이다. 아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의와 본성이 육신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 존재다. 그리고 그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형식이 된 육신으로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행동으로 그 본성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아들로 말씀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통해서 말씀하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의 본성이 되어 육신이 그 본성으로 살게 되므로 그 삶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인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되게 하겠다는 의미다. 아들로 말씀하시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자기 본성이 된 사람의 삶, 곧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는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게 하겠다는 뜻이다. 그것이 아들이다.


그리고 지금 히브리서 마지막에 와서 그 아들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11장 초반에 말씀하신 것을 토대로 보면 이 행동은 본질이 아니다. 이 행동들은 보이지 않는 본질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앞에 설명한 것과 같이 사람을 창조하여 나타내고자 하신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다.


무엇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진동이 없는 땅과 같이 회복된 사람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는 히브리서의 마지막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보여주신 우리 존재가 회복되었을 때 그 회복된 본성이 나타난 모습이다. 히브리서 13장의 말씀을 들고 “이대로 살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생각하거나 주장할 것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뜻대로 회복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의 삶의 모습이 이렇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이 본성이 된 사람의 삶이 이렇다는 것이지, 이 말씀을 지킨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을 기쁘게 한 사람, 하나님께서 사람 지은 목적이 회복된 사람이 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이것이라는 설명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섬긴다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 만든 목적에 자기 삶을 드린 것이고, 자기 삶을 드리는 것이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먼저 그런 사람이 되면 이 말씀대로 살 것이라는 의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