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어떤 존재이고 상호간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말씀이다. 그 사람의 자리를 성경은 땅, 이를 곳, 약속한 땅, 지시할 땅이라고 말씀한다. 히브리서 12장 18절에서 말씀하시는 “이른 곳” 역시 같다. 땅이 아니라 사람의 정체성이다. 어떤 사람이 되었느냐의 문제다. 이것이 12장 마지막에 가서는 “땅”이라고 표현한다. “흔들리지 않는 땅”은 히브리서가 강조하고자 하는 확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이 자리, 그 상태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라도 사람이 흔들리지 않는 땅과 같이 온전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늘 있을 것이기 때문에 히브리서가 성경으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함에 있어 사람의 능력 이상이 되어야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불붙는 산과 검은 구름과 폭풍과 나팔소리와 같은 것을 견디고 들을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예수를 온전히 바라보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돌아보면 우리 주변에는 작게는 방언에서부터 여러가지 은사를 행하면 그것이 더 좋은 신앙이라 생각하는 것은 신앙 세계의 저변임을 언제나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을 많이 본 사람도 그런 대접을 받고, 헌금 많이 하는 사람도 늘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신학이라는 공로의 열매가 공로를 인정하시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거룩함이 되어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것을 여러가지 말로 미화시키는 것이 바로 무덤에 회 칠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굳이 이런 것을 언급하는 것은 그런 모습들이 바로 히브리서가 말씀하는 사람의 능력 이상의 자리에 이르러야 온전한 믿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가진 신앙의 모습을 히브리서로 반추하고 거기서 시작하여 온전한 믿음을 가진 흔들리지 않는 땅(진동하지 않는 땅)으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혹 어떤 사람이 굳이 성경이 말하는 사람의 자리로 가야할 이유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자기 나름으로 성경 아닌 것을 가지고 인생의 목적을 찾았다고 한다면 그것을 추구함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더욱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신앙 안에 있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이 곧 내 인생의 목적임을 인정하는 것이므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자리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 신앙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있다면 그렇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어 인생의 목적을 알려고 하기 보다, 주어진 인생의 필요와 곤고함의 해결을 위해 하나님을 믿고 있다. 그것은 천로역정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 넘어 순례의 길을 들어간 사람과 같다. 순서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존재를 인식하고서 그 존재로 살아감에 있어 어떤 필요를 느낀다면 먼저 자신이 존재한 이유를 아는 것이 먼저다.


따라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께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필요와 기대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런 신앙은 늘 진동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항상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이 항상 주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바빠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원하는 것을 공급하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대로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온전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다. 만약 우리가 가진 스마트폰과 같은 물건이 나를 이렇게 저렇게 매이게 한다면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처럼 믿으니 사람들도 자기 소유의 물건에 맞추어 가려고 종과 같이 살아가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사람의 존재 정체성과 관계가 온전하지 않는 상태의 신앙은 언제나 흔들린다. 이랬다 저랬다 하기 일쑤고, 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한다는 것은 최대한 양보해도 그 알려고 하는 순간만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다. 바로 진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진폭이 있다. 그것은 “항상”도 “범사”도 아니다. 한 마디로 온전한 신앙이 아니다. 진동 없는 땅이 아니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을 설명한 것은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고 생각하며 담대히 나아가기를 권면하기 위함이다. 그 맥락에서 보면 진동하지 않는 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이 진동 없고, 흔들림 없는 자리로 가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것에 대하여 간절한 권면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면서까지 우리를 구속하셨음에도 사람들이 굳건하지 못함을 심히 안타까워하기 때문이다.


앞서 8장에서부터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의 온전함을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제사와 희생이 더 이상 반복이 필요 없는 온전한 제사임을 강조하고, 이제는 죄사함을 위한 제사가 더 없다고 단언한 것은 예수님을 인하여 모든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희생과 제사를 믿는다면 그 믿음을 굳게 잡고 담대하게 자신의 정체성이 하나님 앞에 죄 없는 자가 되었다는 굳건함에 서기를 권면하는 말씀이 바로 이 히브리서다.


그러면서 사람이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되려면 하나님의 약속,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모든 것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분명히 알고 그것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런 사람은 불붙는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음을 또한 말씀하신다. 엘리야의 일을 생각하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자기 육신의 한계 너머를 늘 사모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 안에 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이르러야 하는 자리고 진동이 없는 굳건한 땅이다. 그 땅과 같은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의 나라, 진동치 못할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은 <교회>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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